기획·칼럼

사업 실패로 자살한 과학기술자들

[데자뷔 사이언스] 최성우의 데자뷔 사이언스(27) 르블랑과 암스트롱

역사상 저명한 과학기술자들 중에서 자살로 삶을 마친 인물들도 적지 않다. 우리나라에서도 과학기술과 산업의 발전에 큰 공헌을 한 분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안타까운 일들이 근래 가끔씩 일어난 적이 있다.

과학기술자들의 자살 이유로도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에서도 사업상의 실패가 원인이 되었던 경우로, 소다의 발명자 르블랑과 무선기술의 선구자 암스트롱이 있다.

프랑스 대혁명의 와중에 날아간 르블랑의 소다 공장

화학공업이 근대화되고, 급속히 발전된 오늘날에는 소다, 즉 나트륨계 화합물이 그다지 특별히 중요한 물질이 아닐 수도 있겠으나, 역사적으로 소다, 특히 탄산소다는 근대 산업사회에서는 무척 중요한 물질의 하나였다. 산업혁명기에 방적, 직물공업의 발전에 따라, 대량의 직물을 씻기 위한 비누의 원료로서 소다가 필수적이었기 때문이다.

1775년에 프랑스 과학아카데미는 나무를 태운 재를 원료로 하지 않는 새로운 소다의 제조방법을 거액의 상금을 걸고서 널리 공모하게 되었고, 여기에 당선된 화학자가 르블랑(Nicolas Leblanc; 1742-1806)이었다. 그가 발명한 소다의 제법은 소금과 황산으로 황산소다를 만든 후, 숯과 석회석을 섞어서 노 속에서 구워서 소다를 추출해내는 방법으로서, 이른바 ‘르블랑식 소다 제조법’으로 불렸다.

그는 공장을 세우고 소다를 생산하였으나 프랑스 대혁명의 소용돌이가 점점 거세어지면서 르블랑의 후원자였던 귀족 오를레앙이 단두대에서 처형되기에 이르렀다. 르블랑의 소다공장은 혁명정부에 의해 몰수되면서 그는 공장에서 쫓겨났고, 르블랑식 소다 제조법의 비밀은 아무런 보상도 없이 일반에 공개되고 말았다. 혁명의 소용돌이가 조금 잠잠해지게 된 후, 프랑스 정부는 산업에 꼭 필요한 소다의 제조를 촉진하기 위하여 그의 공장을 돌려주었으나, 이미 7년의 세월이 흐른 뒤였다.

르블랑의 동상. ⓒ Free Photo

르블랑의 동상. ⓒ Free Photo

르블랑은 공장 재건을 위하여 자금을 모으고 설비를 갖추려고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고, 아내마저 병석에 눕게 되었다. 아내와 함께 극빈자 구호소에 들어 간 그는 절망 속에서 실의의 나날을 보내다가, 1806년 권총으로 자살을 함으로써 한 많은 일생을 마감하였다.

르블랑은 소다 공장을 세우기 직전인 1790년 3월, 자신의 불길한 운명을 예견한 듯 소다 제조법이 담긴 가방을 한 변호사에게 맡겼는데, 보관기간이 ‘50년’이라고 말해서 변호사는 깜짝 놀랐다고 한다. 그로부터 66년이 지난 후, 프랑스 과학아카데미는 그 가방을 발견하였고, 그 안의 서류에는 르블랑식 소다 제조법과 함께 그가 최초로 그것을 발견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었다고 한다. 자손을 위하여 발명의 권리를 남기려 한 그는, 자신이 예감한 대로 프랑스 대혁명의 와중에서 비극적인 삶을 마쳤다.

무선기술의 선구자 암스트롱. ⓒ Free Photo

무선기술의 선구자 암스트롱. ⓒ Free Photo

대기업과의 경쟁에서 밀려나 자살한 암스트롱  

무선기술을 실용화 하는데에 공헌한 인물로는, 무선전신의 발명자로 잘 알려진 마르코니(Gugliemo Marconi; 1874-1937), 라디오 방송의 선구자 페슨던(Reginald Fessenden, 1866-1932),  3극진공관의 발명자 드 포레스트((Lee de Forest; 1873-1961) 등을 들 수 있다. 이들 이외에도 또 한사람의 중요한 인물로서, 피드백회로와 FM방식을 발명한 미국의 공학자 암스트롱(Edwin H. Amstrong; 1890-1954)이 있다. 그는 무선기술의 발전에 획기적인 업적을 남겼음에도 불구하고, 사업화와 관련된 경쟁에서 밀려나자 스스로 목숨을 끊고만 불우한 인물이기도 했다.

그가 고안한 피드백회로(Feedback circuit)는 출력부의 신호를 다시 입력부로 되돌려서 증폭시키는 것으로서, 오늘날에도 전기회로기술에서 매우 폭넓게 응용되는 중요한 발명이다. 그는 피드백회로기술을 둘러싸고 3극진공관의 발명자인 드 포레스트와 특허분쟁을 벌였는데, 특허권에 따른 경제적 이익보다는 ‘피드백회로의 창시자’라는 명예를 더 중시하여 먼저 소송을 제기하였으나, 지리한 분쟁 끝에 미국의 대법원은 암스트롱의 독창성을 중시하면서도 그와 비슷한 생각이 드 포레스트 등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도 착상되고 있었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판결을 내렸다. 이에 대하여 암스트롱은 너무도 분개한 나머지, 피드백회로 발명의 공로로 미국 무선공학자협회로부터 받은 기념메달까지 반납해 버렸다고 한다.

그의 또 하나의 중요한 발명은 기존의 진폭변조(AM) 대신에 주파수변조(FM)를 택하여 노이즈 등을 줄이고 감도를 높이는 새로운 라디오 방송 방식을 창안해 낸 것인데, 이러한 FM(Frequency Modulation)방식은 지금도 음악방송 등의 스테레오 라디오 방송에 그대로 이용되고 있다.

그러나 그가 창안한 FM 방송은 기술적으로 뛰어난 점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대형 방송사로부터는 그다지 환영받지 못했다. 왜냐하면, RCA(Radio Corporation of America; 미국 라디오회사)와 같은 당시 미국 최대의 방송관련 제조회사는 이미 AM방식으로 대규모 투자를 해 놓은 상태였으므로, 굳이 새로운 방식으로 인하여 손해 보는 것을 꺼려했기 때문이다. 암스트롱은 RCA에 대항하여 독자적으로 새로운 FM 방송망을 이루려 노력하였고, 여러 군소 방송사들에 의해 FM 방송도 서서히 빛을 발하기 시작하였다.

RCA와 암스트롱은 드디어 숙명적인 ‘한판승부’를 벌이게 되었는데, 어느 쪽이 더 많은 주파수대역을 차지하는가 하는 싸움에서 승부는 판가름 나게 되어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후 민생용 텔레비전 방송의 확장에 주력해 오던 RCA는 텔레비전 방송을 위한 좋은 주파수대역을 차지하려 하였고, 암스트롱측은 FM방송을 위한 더 많은 주파수대역을 얻어 내려 애썼다. 그러나 ‘심판관’인 미국 연방통신 위원회(FCC)는 결국 RCA의 손을 들어 주었고, FM 주파수 대역을 다른 곳으로 옮기고, 예전의 FM 대역을 텔레비전 방송이 사용하도록 결정을 내렸다.

이로 인하여 종래의 FM 방송관련 장비, 시설들이 일순간에 고철덩어리로 돌변하였고, 암스트롱은 치명적인 패배를 당하게 된 것이었다. 그는 다시 RCA와 그 소유방송사인 NBC(National Broadcasting Company)를 상대로 하여, 이들이 자신의 FM 방송관련 특허를 침해하였다는 소송을 냈으나, RCA와 같은 거대기업에 단신으로 맞서 싸운다는 것은 너무도 벅찬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다시 오랜 시간을 끈 소송과정에서 그는 심신이 몹시 지치게 되었고 경제적으로도 거의 파산상태에 이르고 말았다.

1954년 암스트롱은 자신이 살던 아파트의 10층 창문에서 투신자살하여 영욕이 교차했던 일생에 스스로 종지부를 찍었다.

1887년에 제작된 르블랑 기념 메달. ⓒ http://wellcomeimages.org/indexplus/image/V0028733.html

1887년에 제작된 르블랑 기념 메달. ⓒ http://wellcomeimages.org/indexplus/image/V0028733.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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