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칼럼

빅뱅에서 우주 종말까지의 역사 속에서 인간의 위치

[과학명저 읽기] 과학명저 읽기 48

역사란 실제 사건을 이르기도 하고 그에 대한 기록을 뜻하기도 한다. 역사학자들은 이에 더해서 사건이나 그 기록에 대한 해석이라는 의미를 더하기도 한다. 학문 분야로서의 역사란 기록물을 대상으로 하는 것으로 여겼기에,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은 시대를 우리는 선사시대 즉 역사 이전의 시대라 부른다.

그런데 호주 출신의 러시아사 학자 데이비드 크리스천은 빅뱅으로부터 우주 종말까지의 역사 서술을 시도하며 ‘빅 히스토리’라는 분야를 창안하여 그 연구를 주도해 왔다. 그 간 <거대사>나 <빅 히스토리>라는 제목으로 몇 권의 책이 번역 출판 되었지만, 이 책 <시간의 지도>는 세세한 내용과 함께 빅 히스토리의 이론적 근거, 그리고 빅 히스토리가 역사학은 물론 현대사회에 어떤 성찰을 던지는지를 함께 담고 있는 대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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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시대는 길게 잡아야 수천 년을 넘어 가지 않는다. 인간의 역사 자체가 수만 년 정도이고 인간의 조상을 이야기 할 때도 몇 백만 년까지가 한계이다. 경기도 한탄강 강변에 널린 화성암 자갈들이 화산활동을 통해 분출되던 게 이백만년 전쯤이라고 하니, 이백만 년이면 이미 우리가 그 흐름의 추이를 상상할 수 있는 시간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 백배쯤 되는 시간 이전 즉 이억 년 전쯤이면 공룡이 번성하던 중생대였는데, 빅뱅 이론에 의하면 우주는 다시 그 시간의 칠십 배 쯤 전인 137억 년 전에 생겨났다는 것이다.

천분의 일초 정도의 사이에 빛보다 빠른 속도로 팽창한 우주에 물질과 반물질 알갱이들이 비슷한 양으로 생겨나고, 대부분의 물질과 반물질들은 충돌하여 사라지며, 이때 반물질과 짝을 이루지 못한 극히 일부의 물질들로부터 우주 내의 온갖 물질적 구성물들이 만들어 졌다. 이때 물질과 반물질이 함께 사라지며 남긴 에너지가 바로 빅뱅 이론을 뒷받침하는 우주배경 복사라는 것이다.

현대 우주 물리학은 이때 생긴 물질이 어떤 과정을 거치며 단순한 수소 원자를 만들고, 이들 단순한 원자들이 항성을 이루며, 또 그 항성이 폭발하면서 산소나 질소와 같은 좀 더 큰 원소를 만들뿐 아니라 초신성의 폭발을 통해서는 금이나 우라늄 같은 무거운 즉 복잡한 물질들이 만들어 지는지를 상당히 설득력 있는 방식으로 설명해 주고 있다.

현대 우주론은 이렇게 해서 생긴 은하계가 오십억 년 전에는 지구를 만들고 오억 년 전에는 동물을 만들며 오만 년 전에는 인간이 생겨났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런 우주의 역사가 역사학자들의 오랜 관심사인 인간의 사회와 정치 또는 문화에 어떤 통찰을 더해 줄 수 있단 말인가? ‘빅 히스토리’에서는 전통적인 역사학의 주제가 사라지는 게 아닌가?

하지만 크리스천은 국가, 종교, 문화 등 익숙한 주제가 사라지는 대신, 이전에 보지 못했던 역사적 풍경이 나타난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인간의 환경이나 역사적 사건의 생태학적 맥락 같은 게 ‘빅 히스토리’를 통해 드러난다는 것이다.

사실 역사학은 모든 사건을 역사적 맥락에서 살피려는 시도이며, 역사학자들의 특별한 능력이란 이렇게 사건들을 역사적 맥락 속에서 기술하는 것 아니었던가. 그런데 지금까지 역사학자들은 정작 역사 자체를 맥락화해 보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다. ‘빅 히스토리’란 바로 전통적인 역사학을 시간의 지도 속에 편입시켜 맥락화하려는 시도인 것이다.

그렇다 해도 ‘빅 히스토리’는 역사적 관심사를 지닌 독자들에게 매력 있는 분야는 아닐 듯싶다. 무엇보다도 역사의 능동적 주체로서의 인간의 얼굴이 소외되는 역사일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크리스천은 ‘빅 히스토리’가 오히려 인간의 중요성을 부각시키는, 아니 인간 행위자의 무서운 힘의 의미를 깨닫게 해주는 시각일 수 있음을 지적한다. 예를 들어 자유에너지 밀도의 복잡도라는 개념을 동원해 볼 경우, 은하계의 복잡도를 1로 보면 지구의 복잡도는 그 25배, 동물의 경우 2만배, 인간은 50만배라고 이야기 할 수 있다. 게다가 단순한 인간이 아닌 인간 사회 조직의 경우, 그 복잡도는 무한대로 확장되어 갈 여지가 있다는 것이다.

물론 복잡도가 어떻게 우주 속에서 인간의 무게를 더해주는 척도일 수 있는지, 그가 정의한 복잡도가 정말 의미 있는 척도가 될 수 있을지 의문을 던질 수도 있겠다. 어쨌든 복잡도를 통해 그가 그린 인간의 위상은 역사시대 내에서 훨씬 더 인상적으로 드러난다. 만 년 전 600만 정도였던 지구상의 인구가 이제 60억 정도로 늘었다고 보자. 천배 정도 는 것이다.

그런데 현대인들은 만 년 전의 인간보다 평균 50배 정도의 에너지를 사용한다. 만 년 전의 인류가 매머드 등의 거대 포유동물 수십 종을 멸종시킨 주 된 힘이었다고 하는데, 당시보다 5만배의 에너지를 사용하고 있는 현대 인류가 다른 생물이나 환경에 미칠 수 있는 영향력은 어느 정도일 수 있을까?

인간이 이렇게 우주의 역사에서 영향력 있는 존재가 되어 왔던 힘의 기반을 학자들은 인간이 지닌 집단 학습 능력에서 찾는다. 인간은 생애 주기 동안 배우고 익힌 내용을 언어를 통해 후대와 타인에게 전달하며 사회 속에 집적해 가는 독특한 능력을 지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인터넷이나 휴대전화는 개인들 사이를 훨씬 더 다양하게 연결시키며 혁신적 사고와 이해를 만들어 가고 있으니, 미래에는 지금까지 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변화해 갈 것이고, 인간의 영향력 역시 더 커 질 것이라는 전망도 쉽게 할 수 있다. 현대 우주론이 인간의 역사에 던지는 이와 같은 통찰로부터 크리스천은 인류의 미래, 먼 미래가 아닌 일 이백 년 후의 미래를 위해서 개인적 삶의 방식, 경제 제도에 대한 개선 방안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그리스천의 시도로부터는 러시아사 학자로서 그가 지닌 인간사회의 물질적 토대에 대한 관심도 드러나며, 계량화나 긴 호흡의 역사적 시각을 살피는 아날학파의 장기지속 역사관의 그림자도 분명해 보인다. 다른 한 편, 빌 게이츠 같은 이들이 ‘빅 히스토리 프로젝트’를 추진하는 모습에서는 9·11 사태 이후에 문명권 사이의 갈등을 걱정하면서 ‘새로운 세계사’를 구상하는 서방 학자나 서방 정치, 경제권의 의도도 읽혀진다.

그래도 여전히 빅뱅이라는 시작점이 마음에 걸린다. 빅뱅 이론을 뒷받침하는 증거들을 모아 발표하는 학자들이, 정말 실제로 우주가 그런 과정을 거쳐 ‘창조’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특히 첫 천분의 일초 사이의 이야기는 아무래도 의심스럽지 않은가? 그리고 보니 빅뱅 우주론의 정립을 향한 중요한 첫 걸음을 떼며 이름을 만들어 붙였던 물리학자는 가톨릭 사제이기도 했다는데…. 크리스쳔의 답변을 들어보자.

“고대의 창조신화로부터 현대 과학에 이르기까지 모든 지식 체계는 현실에 대한 지도로 볼 수 있다. 그것은 결코 단순한 진실이거나 거짓일 수 없다. 현실에 대한 완벽한 묘사는 인간을 포함한 모든 학습 생명체에게 성취 불가능한 일이고 불필요하며 지나치게 비용이 많이 드는 일이다. 하지만 현실적인 묘사는 반드시 필요하다. 따라서 지식 체계는 마치 지도와 같이 현실주의와 융통성, 유용성 그리고 영감의 복잡한 결합체다. 그것은 어느 정도 상식적 경험에 부합하는 현실에 대한 설명을 제시해야 하며, 반드시 유용해야만 한다. 또 그것은 모든 공동체가 영적이거나 심리적이거나 정치적이거나 기술적인 문제들을 풀어나가는 데 도움을 주어야만 한다” (40쪽 서문).

생각해 보자. 역사학으로서의 ‘빅 히스토리’가 현실에 대한 지도라고 이야기하면서, 저자는 과학 지식 체계 역시 현실에 대한 지도라고 이야기 하고 있다.

소개도서 : 이비드 크리스천 지음, 이근영 옮김, <시간의 지도: 빅 히스토리>, 심산,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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