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칼럼

불완전한 이카로스의 꿈

[과학명저 읽기] 과학명저 읽기 38

지금으로부터 20년 전 1994년 10월 21일 오전 7시 성북구 성수동과 강남구 압구정동을 연결하는 성수대교의 상부 트러스트 48미터가 붕괴되었다. 마침 붕괴 시점이 출근 시간대여서 피해가 특히 컸다. 텔레비전을 통해 생중계된 사고 현장은 “세상에 어떻게 저런 일이…“라는 탄식이 절로 나올 정도로 참혹했다.

이 사고를 기억하기 어려운 젊은 세대들도 최근 개봉한 영화 <더 테러 라이브>나 드라마 <응답하라 1994>를 보았다면 당시의 긴박한 상황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사고 후 진상 조사에서 부실 공사와 엉터리 감리 사실이 밝혀졌고, 이 사고는 관련자들이 제대로 규칙만 지켰다면 충분히 막을 수 있는 인재(人災)로 결론이 났다.

성수대교 붕괴 사고는 분명 원칙대로 일을 처리하지 않고 적당히 관련 법규를 무시하며 공사를 강행하는 당시 건축 관행이 낳은 참사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모든 교량 붕괴사고가 그렇다고 할 수 있을까? 혹은 좀 더 일반화해서, 모든 기술적 대상과 관련된 사고에는 항상 누군가 ‘조금만 조심했다면‘ 사고를 막을 수 있었던 사람이 있는 것일까?

 

이 점에 대해 가장 적극적으로 그리고 가장 설득력 있게 반론을 제기한 사람 중 하나가 헨리 페트로스키이다. 토목 공학자, 특히 사고 분석 전문가인 페트로스키는 연필이나 클립처럼 일상적인 물건이 어떻게 디자인되고 시간에 따라 형태나 기능이 달라져왔는지에 대한 역사적 연구로 유명하다. 우리나라에서도 그의 책이 여러 권 번역되어 있고 사소해 보이는 사물의 역사를 다양한 관점에서 분석한 <연필>과 같은 작품이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 페트로스키는 현재 듀크 대학교의 토목공학과와 역사학과에 동시에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과학자들 중에는 과학 대중서를 잘 써서 유명해진 사람이 쉽게 떠오를 정도로 많은 편이지만, 공학자 중에서 기술이나 공학에 대한 교양서를 성공적으로 써낸 사람은 상대적으로 드물다. 그런 의미에서 페트로스키는 과학기술 저술가 중에서도 특별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페트로스키의 글쓰기의 특징은 마치 대중 강연에서 차근차근 재미있는 이야기를 풀어내 듯 써내려가는 잘 읽히는 문장이다. 하지만 그의 부드러운 글 속에는 숨겨진 과격한 주장들이 여럿 있다. 오늘 소개할 <인간과 공학 이야기>에는 이 특징이 가장 잘 드러나 있다.

페트로스키는 공학적 인공물을 보다 더 잘 만들기 위해서 실패의 경험이 얼마나 중요한지 강조한다. 실패를 통해서 우리는 기존 공학 설계가 어떤 문제가 있는지 알 수 있고, 이를 보완하여 다음에는 더 나은 인공물을 설계할 수 있다. 여기까지는 그다지 과격하게 들리지 않는다. 하지만 페트로스키는 이보다 훨씬 더 나아간다. 그가 보기에 실패를 통해 좀 더 나은 공학 설계를 추구하는 방식이 공학 설계가 진보할 수 있는 현실적으로 거의 유일한 방식이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가 자원을 얼마든지 써도 되는 행복한 상황에서 공학적 인공물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항상 한정된 자원을 효율적으로 활용하여 공학 설계를 해야 한다는 현실적 조건을 고려할 때, 공학적 대상이 실패하는 일은 피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방식으로 보다 나은 공학적 설계를 만드는 것이 공학 이론의 성격이나 우리가 공학 설계를 수행하는 방식을 고려할 때 거의 유일하게 효율적인 방식이기 때문이다.

왜 그러한가? 페트로스키는 책 전체에서 여러 흥미로운 공학적 실패 사례에 대한 분석을 통해 이 생각을 다양한 방식으로 옹호해 간다. 하지만 결국 핵심은 공학이 인간이 하는 일이라는 점에 있다. 즉, 신처럼 모든 것을 고려하고 모든 것을 알 수 없는 유한한 인간이 현대 기계 시스템처럼 수많은 부속이 결합해서 매우 복잡한 방식으로 상호작용하는 공학적 인공물에 대해 수행한 공학적 분석은 결코 완전할 수 없고 항상 단순화된 근사치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아무리 정교한 공학 설계를 통해 만들어진 공학적 인공물이라도 그것의 미래 거동을 완전하게 에측하는 것을 불가능하기에 결국 미래의 사고 가능성을 완전히 제거하는 일도 역시 불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공학 설계는 자신이 만든 날개를 달고 너무 높이 날다가 바다에 추락한 이카로스의 처지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 이카로스의 후예로서 우리는 공학적으로 가능한 것을 끊임없이 꿈꾸고 만들어내지만 그것이 가진 잠재적 위험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결국에는 사고를 당하게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하지만 이카로스의 경험을 통해 우리가 밀랍으로 연결한 기계장치가 열에 녹았을 때의 위험성에 대해 알게 되듯이 우리는 실패 경험을 통해 좀 더 나은 공학 설계로 나아갈 수 있다. 페트로스키는 자신의 책 마지막 절의 제목을 ‘이카로스의 날개’로 붙임으로써 공학 설계의 이런 근본적 특징을 강조하고 있다.

이상을 고려할 때 <인간과 공학 이야기>의 원제인 ‘To Engineer is Human’의 의미를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다. 페트로스키가 보기에 공학적 설계를 하거나 그 설계에 맞추어 공학적 인공물을 만드는 것은 지극히 인간적인 것이다. 물론 그 둘 모두 인간이 한다는 의미에서 뻔하게 인간적이지만 인간이 가진 인식적 한계를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인간적이다. 여기서 우리는 페트로스키가 공학의 인식론적 한계를 인간이 수행하는 활동으로서의 공학 개념의 부산물로 파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필자가 보기에 비슷한 맥락에서 페트로스키는 자신의 책 제목을 ‘To Engineer is Social’로 붙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페트로스키는 엄청난 자원을 들여 절대로 무너지지 않는 다리를 짓는 것이 결코 바람직한 공학 설계일 수 없다고 단적으로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다리는 절대 사고야 나지 않겠지만 다른 곳에 쓰일 수 있었던 희소한 자원을 낭비한 것에 해당된다. 훌륭한 공학자라면 그보다는 사고의 위험과 자원의 효율성을 잘 가늠하여 일종의 타협점을 찾아야 한다. 즉, 공학자는 경제적, 사회적 고려와 공학적 고려를 자신의 설계 과정에서 현명하게 결합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페트로스키의 과격함이 드러난다. 결국 페트로스키는 공학적 설계는 경제적 요인과 안정성 요인 사이의 타협점을 찾아 좋은 공학 설계를 하다보면 사고를 완전히 제거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이렇게 되면 공학적 설계는 이렇게 논리적으로 불가피한 실패 경험을 통해서만 진보할 수밖에 없다는 주장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보다 구체적으로 페트로스키에 따르면 공학자들은 일단 (페트로스키의 용어는 아니지만) ‘수용가능한 위험’ 수준을 적절하게 설정한 후 그 위험 수준보다 확률이 낮은 위험에 대해서는 사고를 감수하고 설계를 해보는 것이 필요하다. 그래야만 사고를 나면 우리는 처음 설정했던 수용가능한 위험 수준이 너무 높았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배울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페트로스키의 <인간과 공학 이야기>는 여러 의미에서 매력적인 책이다. 복잡한 공학적 대상에 대한 그의 인식론적 주장, 즉 우리가 수행하는 아무리 정교한 공학적 분석도 결국에는 대상을 단순화시켜 분석한 것이므로 항상 놓치고 있는 요인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그의 주장은 과학기술철학의 최근 논의와도 잘 어울리는 주장이다.

이에 더해 이러한 인식론적 한계 때문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적절한 수준에서 사회가 수용가능한 위험 수준을 정하고 이를 건물을 지을 때나 다리를 놓을 때 제도적으로 강제한 다음, 그래도 사고가 일어나면 그 경험에 비추어 기준을 조정할 수밖에 없다는 주장도 기술적 규제의 제도화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 많은 주장이다.

하지만 페트로스키가 위험하게 접근하고 있는 주장, 즉 공학적 설계란 어차피 불완전할 수밖에 없으므로 경제적 고려로 공학적 안전성을 얼마간 훼손하는 것은 원리적으로 당연하다는 생각은 자칫 공학자들에게 공학적 사고에 대해 일종의 윤리적 면죄부로 악용될 여지가 있다. 사실은 이윤을 내야 한다는 경제적 압박과 상사로부터의 정치적 압박에 떠밀려 설계를 변경해 사고가 발생할 위험을 높여놓고서도, 페트로스키식 답변, 즉 공학은 원래 실패를 통해 배우는 거 아니냐는 식의 궁색한 변명을 내놓을 가능성이 있다는 말이다.

이 책의 초판은 1985년 나왔는데, 그 다음해 1월 26일 미국 우주왕복선 챌린저호가 발사 직후 공중분해 되는 초유의 사건이 일어났다. 책의 재판을 찍으면서 페트로스키는 저자 후기에서 이 사건을 언급했다. 그는 보이졸리와 같은 몇몇 공학자가 사고의 가능성을 제기했지만 실제로 사고가 난다는 확신을 줄 수는 없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다시 한번 공학적 설계의 불확실성을 강조했다.

그러면서도 페트로스키는 이를 공학자를 위한 ‘변명’이 아니라 공학자들의 ‘겸손’이 필요하다는 교훈으로 연결시켰다. 즉, 챌린저호 사고는 우리에게 우리가 만들었기에 공학적 인공물에 대해 우리가 모든 것을 잘 알고 있다는 자만심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잘 보여준다는 교훈말이다. 독자들도 이 책에서 공학적 설계에 대한 페트로스키의 날카로운 인식론적, 사회적 분석은 받아들이되 이를 공학자들이 윤리적 변명의 근거로 삼지 말아야 할 이유를 읽어내기를 바란다.





소개도서: 헨리 페트로스키 지음, 최용준 옮김, <헨리 페트로스키의 인간과 공학 이야기>, 지호,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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