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창림 이화여대 물리학과 교수
딱 30년전 필자는 8년간의 미국생활을 마치고 이태리 트리에스테(Trieste)에 있는 국제이론물리연구소(ICTP)의 연구원으로 가게 되었다. 국제이론물리연구소는 유네스코와 이태리정부의 지원으로 주로 아시아와 아프리카 등 제3세계 이론물리학자들의 연구를 돕기 위해 설립되었고 지금까지도 우리나라를 비롯해 다양한 국가들의 연구자들이 국제학회 등 다양한 행사에 참가하는 곳이다. 베니스에서 동쪽으로 100km정도 떨어진 국경도시인 트리에스테는 1,2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여러 차례 국적이 바뀌는 복잡한 역사를 가졌다. 20세기초에는 합스부르크 왕가가 다스리던 오스트리아제국의 가장 중요한 항구도시로 발전하면서 오스트리아풍 건물들이 즐비하며, 일리(Illy) 등 유명한 커피메이커들과 카페들로 이태리 커피의 메카로 불리기도 한다.
그간 동경하던 유럽생활을 할 수 있다는 들뜬 희망과 말도 통하지 않는 곳에서 잘 지낼 수 있을까하는 걱정이 뒤섞인 심정으로 현지에 도착한 후 우여곡절 끝에 내가 거처로 정한 곳은 연구소에서 바다를 따라 시내와 반대방향으로 10킬로정도 떨어진 두이노(Duino)란 마을이었다. 마을인구라야 천명 남짓한 작은 마을이고 관광객도 거의 오지 않는 곳이었지만, 깍아지른 절벽에 매달린 듯 서있어 곧장 그 아래 아드리아해로 떨어질 것 같은 오래된 성은 한폭의 그림과 같은 모습으로 이 마을의 자존심을 지키고 있다. 이 성엔 아직도 오스트리아계 귀족인 성주와 그 가족이 살고 있었는데 일요일이면 성에 딸린 작은 성당에서 마을 사람들과 같이 미사를 드리곤 했다. 처음엔 잘 몰랐지만 이 작은 마을에 다른 큰 유럽도시들 못지않은 역사가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내가 알게 되기 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비엔나대학의 루드비히 볼츠만(Ludwig Boltzmann)은 현대물리학의 시작을 알리는 열역학과 엔트로피의 법칙을 알아낸 물리학자이다. 볼츠만은 모든 물질들이 더 이상 쪼개지지 않는 근본물질인 원자(atom)들로 이뤄져 있고 원자들의 운동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지금은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이 원자론은 19세기말과 20세기초까지만 해도 하나의 가설일 뿐 학계의 정설이 아니었다. 볼츠만은 원자론을 바탕으로 열역학 법칙들을 전부 설명할 수 있었는데, 특히 제2법칙인 엔트로피의 법칙을 통계적 개념으로 밝혀내어 통계물리학이라는 현대물리학을 탄생시켰다. 계의 무질서도를 나타내는 엔트로피(S)는 같은 거시계의 상태를 주는 미시계의 경우의 수(W)로 결정된다는 S=k log W라는 공식은 그의 가장 중요한 업적이고 그의 묘비에도 새겨져 있다.
그러나 원자론을 바탕으로 한 미시세계의 존재는 마흐(Ernst Mach)등 당시 학계를 주도하던 다수파들에 의해 부정되었고 그들의 집중공격으로 볼츠만은 학계에서 왕따를 당한다. 이로 인해 극심한 우울증에 빠진 볼츠만은 1906년 지친 심신을 달랠 겸 가족들과 여름 휴가를 보내기 위해 두이노를 찾았다. 그러나 결국 심해진 우울증을 극복하지 못하고 가족들이 해변으로 놀러간 사이 그는 호텔방에서 목을 매어 인생을 마감한다. 그때가 1905년 아인슈타인이 쓴 브라운운동에 관한 논문으로 물질이 원자들로 이뤄져야 한다는 사실을 통해 원자론이 학계에서 받아들여지기 시작한 시점이었기에 그의 죽음은 더욱 안타까운 비극이고, 인간이 극복할 수 없는 운명의 한계로 느껴지기도 한다.
볼츠만이 죽은 후 몇 년이 지난 1912년 당시 두이노의 성주는 자신의 친구이자 저명한 시인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를 성으로 초청한다. 어느날 릴케는 두이노성 근처 아드리아해의 절벽을 따라 난 길을 산책을 할 때 폭풍속에서 “내가 소리쳐 부른들, 내 소리를 들어줄 천사가 있겠는가?”라는 시상을 떠올리고 그때부터 자신의 말년 대표작이 되는 시집을 집필을 시작한다. 그는 이 시집을 “두이노 비가(Duino Ellegies)”라고 명명하였고, 두이노의 산책길은 지금 릴케의 길로 불린다. 이 시는 문학적으로 릴케가 초월적 아름다움을 깨닫지 못하는 인간의 한계와 그 절망을 노래했다고 해석된다고 한다. 현대물리학을 탄생시킨 볼츠만과 현대문학의 선구자 릴케가 두이노에서 느꼈던 절망에서 어쩌면 과학과 문학에서 공통점이 발견되는 것 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훗날 릴케나 볼츠만 시대의 두이노 성주의 후손이 자신의 영지를 국제이론물리연구소의 부지로 기부하였고, 그 연구소에서 우주와 현대물리학의 한계를 연구하는 현재 상황이 단순한 우연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지금도 아드리아 절벽의 두이노마을이 눈에 선하다.
안창림 이화여대 물리학과 교수
※ 외부 필진의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607)
로그인후 이용 가능합니다.
/ 이종호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은 29일 “극한소재 실증연구 기반조성 사업은 우리나라 극한소재 실증연구 역량을 강화하고 기술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는 교두보 마련의 기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 장관은 이날 오후 경남 창원 한국재료연구원을 방문해 극한소재 실증연구 기반조성 사업 현황을 점검한 자리에서 이같이 밝혔다고 과기정통부가 전했다. 이 사업은 초고온·극저온·특정극한 등 미래 유망소재
/ 금융권에서 전산장애 사태가 발생하지 않도록 금융당국과 각 금융협회가 가이드라인 제정에 나섰다. 금융감독원은 29일 금융 정보기술(IT) 안전성 강화를 위한 가이드라인 제정을 위한 태스크포스(TF)를 구성하고 이날 금감원 본원에서 각 금융협회와 첫 회의를 열었다고 밝혔다. TF는 오는 6월까지 성능관리, 프로그램 통제, 비상대책 등 3개 과제를 검토하고, 각 협회는 금융회사 의견을 수렴해
/ 시각이나 촉각 센서 도움 없이 계단을 오르내리고 울퉁불퉁한 곳에서도 넘어지지 않고 움직이는 사족보행 로봇기술이 국내 연구진에 의해 개발됐다. 한국과학기술원(KAIST) 전기및전자공학부 명현 교수 연구팀은 잠에서 깬 사람이 깜깜한 상태에서 시각적인 도움 없이도 화장실을 갈 수 있는 것 같은 블라인드 보행(blind locomotion)을 가능케 하는 로봇 제어 기술 ‘드림워크’(DreamWaQ)를 개발했다고 29일 밝혔다.
/ 챗GPT 등장 이후 인공지능(AI) 교육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가운데 AI를 바르게 활용할 ‘리터러시’(문해력)를 키워야 한다는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다. 서울시교육청은 29일 학교 AI 교육이 나아갈 방향에 대해 현장 교원의 의견을 수렴하는 ‘챗GPT 시대의 AI 리터러시’ 토론회를 이날과 31일 양일간 개최한다고 밝혔다. 토론회에서는 ‘서울형 AI 윤리교육 모델’을 상세히 소개하고 학교의
/ 서울디지털재단은 이달 28∼31일 대만 타이베이에서 열리는 아시아 최대 규모의 스마트시티 전시인 ‘SCSE(Smart City Summit & Expo) 2023’에 서울관을 최초로 설치했다고 29일 밝혔다. 올해 SCSE 주제는 ‘스마트시티의 새로운 차원으로 이끄는 디지털 전환’이다. 47개국에서 1천700개 부스를 마련했다. 서울관은 서울시의 디지털 포용정책 등을 알리는 정책존, 서울의 혁신 서비스와 솔루션을 효과적으로 소개하는
/ “사람마다 속도나 원인이 다른 관절의 노화를 어떻게 하면 제어할 수 있을지 고민이 많았지요.” 휴대전화 센싱(sensing) 기술로 관절의 노화 인자를 찾아내 치료하는 연구에 성공한 원광대학교 생명과학부 진은정 교수는 28일 유전자 전사체(유전체에서 전사되는 RNA 총체)를 먼저 설명했다. 사람마다 얼굴이 다르듯 유전자의 발현 양상이 천차만별인데, 이를 분석·통제하는 게 생명과학 연구의 기본이다. 유전자의
/ 식품의약품안전처는 올해 들어 인공지능(AI)을 활용한 소프트웨어 3종을 혁신의료기기 통합심사·평가 대상으로 지정했다고 27일 밝혔다. 지정된 제품은 딥노이드의 뇌동맥류 뇌영상검출·진단보조소프트웨어, 코어라인소프트의 뇌출혈 뇌영상검출·진단보조소프트웨어, 메디컬에이아이의 심부전·심전도분석소프트웨어다. 혁신의료기기 통합심사·평가 제도는 식약처, 건강보험심사평가원, 한국보건의료연구원이 순차적으로 진행하던 평가를 통합적으로 진행해, 의료기기가 허가와 동시에 신속하게 의료 현장에 진입하게 하는 제도다. 딥노이드 제품은 뇌혈관 MRA(자기공명혈관조영술) 영상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