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칼럼

“본성 대 양육” 논쟁 다시 생각하기

[과학명저 읽기] 과학명저 읽기 27

일찍이 프란시스 베이컨(Francis Bacon)은 학문의 대개혁이라는 웅대한 꿈을 제시했다. 이를 위해 그는 17세기 당시 학문의 발전을 가로막았던 요인들을 네 개의 ‘우상(idol)’으로 나타냈는데, 그 중 하나가 ‘시장의 우상’이었다. 시장의 우상은 오염된 언어, 잘못된 언어 사용으로 인해 생기는 폐단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런 언어들이 참된 이해를 방해하고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에 제대로 정의된 개념이나 용어, 개별적인 사례에서부터 논의를 시작할 것을 제안했다.

 

저명한 과학사학자이자 과학철학자인 이블린 폭스 켈러의 <본성과 양육이라는 신기루>는 여러 면에서 베이컨의 기획을 따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본성 대 양육’이라는 오래된, 하지만 쉽게 풀리지 않고 있는 논쟁을 다루고 있다. 이 논쟁의 대중적인 버전은 하나의 질문으로 요약될 수 있을 것 같다. 개인의 행동이나 특성을 형성하는 데 있어 타고난 본성과 양육 중에 어느 것이 더 중요할까?

호기심을 자아내는 문제이지만, 켈러의 관심은 논쟁 내부에 들어가 유전자가 중요하다, 환경이 중요하다, 또는 둘 다 중요하다 식의 입장을 선택하고 이를 보여주는 데 있지 않다. 그렇다고 과학사학자들의 장기를 살려 논쟁의 역사를 짚어서 본성 대 양육 논쟁을 이해하는 데 그 목적이 있는 것도 아니다. 일흔이 넘은 이 노장의 관심은 왜 이 논쟁이 이렇게 오랫동안 해결되지 않는 것인가를 이해해 보는 데 있고 그는 이 논쟁에서 사용되는 언어의 “고질적인 모호함, 불확실성, 미끄러짐(slippage)”에서 그 주된 이유를 찾고 있다.

이 책에서 켈러는 두 가지 측면에서 본성 대 양육 논쟁을 분해하고 있다. 우선 그는 논쟁의 핵심 질문 자체를 분해하여 논쟁의 기저에 깔려 있는 전제를 수면 위로 드러내 놓는다. 그에 따르면 본성과 양육 논쟁은 본성과 양육이 분리되어 있는 영역에 속한다는 가정을 깔고 있으며, 이를 출발점으로 삼아 본성과 양육을 상호배타적인 것으로 이해하고 대비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켈러는 “본성과 양육(nature and nurture)”이라는 문구를 유명하게 만든 프랜시스 골턴에서 그 시작점을 찾고 있으며 19세기 후반 유전자 입자 개념의 도입이 본성과 양육, 유전자와 환경을 서로 대립적인 항으로 놓게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지적하고 있다. 이를 통해 그는 이 책의 원제목(“The Mirage of a Space between Nature and Nurture”)이 의도하는 것처럼 본성과 양육 사이에 존재한다고 여겨져 왔던 ‘간격(space)’이 신기루(mirage)에 불과하다는 점을 보이고자 했던 것이다.

두 번째로 켈러는 본성 대 양육 논쟁에 사용되는 언어들을 분해하여 그 언어들이 지니는 다의성이 이 논쟁을 해결하기 어렵게 만들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유전력(inheritability)”은 일상적인 언어와 과학의 언어가 섞여 다의성을 낳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유전력은 유전적 변이로 인해 나타나는 표현형의 변이 비율을 나타내는 것으로, 집단과 관련되어 통계학적인 수치로 나타나는 전문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지만, 그것이 지니는 일상적인 의미, 즉 부모로부터 자손에게로의 전달(transmissibility)이라는 의미와 혼재되면서 집단과 개체, 유전적인 것과 환경적인 것, 유전적 영향과 사회문화적 영향이 뒤죽박죽 혼재되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이런 논쟁들을 통해 켈러가 제안하고 싶어 하는 것은 본성이든 환경이든 아니면 둘 다이든 간에 인간의 특성이 어떤 결정적인 요인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생각 자체의 전환이 아닌가 싶다. 그보다 “인간 개개인의 발생이 얼마나 유연한지, 그리고 각 단계마다 그 유연함은 어떠한지”, 바로 그 유연함에 초점을 맞춰야, 결정론적인 생각들에서 연유하는 정치적, 사회적 폐해, 예를 들면 우생학이 야기한 것과 같은 문제를 피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본성과 양육이라는 신기루>는 과학과 과학사/과학철학 사이의 상보적인 발전 관계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도 흥미로운 책이다. 본성과 양육 논쟁에 대한 켈러의 통찰과 문제의 재정의는 상당 부분 후생유전학이나 진화발생생물학 등 현대 생물학의 연구 성과에 기대고 있고, 이런 점에서 과학의 발전은 과학사와 과학철학에 새로운 통찰을 제공해 주고 있다.

역으로 켈러의 이 책은 이 분야를 연구하는 학생들에게 그들이 붙잡고 있는 문제와 그들이 사용하고 있는 개념 및 언어에 대해 성찰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고 있다. 물리학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거기서 얻은 문제의식을 과학사 과학철학으로 풀어내갔던 켈러의 개인적인 이력과 관심사가 두 분야 사이의 상보적인 관계를 보여주는 것으로 나타난 것이 아닌가 싶다.





소개도서: 이블린 폭스 켈러, 정세권 옮김, <본성과 양육이라는 신기루>, 이음,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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