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르헤스 소설 ‘알레프(aleph)’를 구현

국립현대미술관, ‘알레프 프로젝트’ 전시회 열려

‘알레프(aleph)’는 보르헤스의 소설 이름이다. 극한의 사고 실험과 추리 소설적 기법, ‘변화’와 ‘반복’이라는 세계관이 응집된 단편으로 유명하다. 20세기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한 작품이라는 평가도 받고 있다.

헤브라이어 첫 번째 알파벳이자 ‘처음’을 뜻하는 ‘알레프’. 그러나 소설 속에서는 ‘모든 각도에서 본 지구의 모든 지점들이 뒤섞이지 않고 있는’ 장소로 현실과 초현실, 과거와 미래, 모든 시대의 장소와 사건을 한데 모은 집적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개관작인 ‘알레프 프로젝트’는 바로 소설 ‘알레프’를 현실화한 기념 전시회이다. 내년 3월 16일까지 진행될 이 전시회에서는 과학과 융합된 예술이 어떤 모습을 띠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비록 3점밖에 전시되고 있지는 않지만 작품 전체 규모가 워낙 커서 감상하는 시간이 의외로 많이 소요된다.

미래 건축의 나아갈 방향, ‘착생식물원’

제7전시실을 모두 차지하고 있는 작품은 ‘착생식물원’이다. 작가는 현 건축학과 교수인 필립 비슬리이다. ‘착생식물원’은 언뜻 보면 뉴런 다발 같다. 또 자세히 보면 활짝 펼친 천사의 날개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 작품에 살짝 손가락을 갖다 대면 불이 켜지기도 하고 촉수처럼 늘어뜨려진 와이어가 바짝 움츠리기도 한다. 마치 손을 대면 봉오리를 닫는 식물 같다. 그뿐인가. 감각을 섬세하게 표현하기 위해 작가는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를 작품에 입혔다.

▲ 필립 비슬리, ‘착생 식물원’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착생식물원’은 앞으로 건축이 나아갈 방향을 보여주는 작품이기도 하다. 건축물을 가볍게 하기 위한 초경량 소재, 건축과 인간의 상호작용을 구체화한 분산망과 센서, 우리 몸의 피와 같은 건축물 안에서의 순환 시스템 등이 그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작가가 건축물을 하나의 리빙 시스템(living system)인 생명체로 여겨 작품을 하나의 유기생명체로 표현했다는 점이다. 그래서 다양한 은유가 이 작품에 숨어 있다. 작품을 감상하면서 그 은유를 찾아보는 것도 이 전시회를 감상하는 하나의 방법이 된다.

먼저 10만개 디지털 센서는 세포를 은유한다. 공기, 관람객의 움직임 등을 센서로 감지하고 작품이 마치 우리 몸이 반응하는 것처럼 움직인다. 투명한 작품 소재 안에서 노란 액체가 보이기도 한다. 전시실 전체에서 느껴지는 시큼한 냄새의 원인은 식초다. 그 식초가 구리와 반응해서 에너지를 생성하는데 우리 몸을 움직이는 파워소스를 은유한다고 볼 수 있다.

눈으로 볼 수 없는 세계 시각화

미디어랩 전시실에서는 ‘정교한 실험실’이라는 작품을 볼 수 있다. ‘척도 없는 네트워크’라는 뜻을 가진 ‘에스에프엔(SFN)’이라는 이름은 예술가 브라이오니 바, 재클린 스미스와 미생물학 생태학자 그레고리 크로세티가 호주 멜버른에 기반을 두어 추진하고 있는 예술과 과학 간의 협업 프로젝트명이다.

▲ 에스에프엔(SFN), ‘정교한 실험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사실 지구상의 생명체 중 최소 90%는 육안으로 확인이 불가능하다. 과거에는 눈으로 보이지 않은 세계를 그림과 과학적 설명으로 대중에게 선을 보였다. 하지만 17세기 현미경이 사용되면서 일반인들은 상상력을 동원할 필요없이 직접 볼 수 있게 되었다. ‘에스에프엔’은 이런 역사적 배경이 작업의 기반이 되고 있다. 우리 주변에 분명히 존재하지만 우리가 볼 수 없는 것들을 시각화하고 있는 셈이다.

전시실에 들어서면 여러 대의 현미경이 놓여 있다. 그리고 한 대의 현미경 옆으로 여러 개의 페트리 접시가 있다. 그 안에는 연못, 물웅덩이, 개울, 강 속에 숨어 있는 다양한 생명체들이 담겨 있다. 관람객은 직접 40~100배의 배율을 통해 직접 관찰할 수 있다. 단순히 보고 확대하는 것에 불과하지만 그 자체로 지구를 구성하는 것들의 아름다움과 복잡성을 그대로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이 실험실 입구에서 작은 유리 구멍이 벽에 붙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보르헤스의 소설 ‘알레프’를 연상시키는 동시에 이번 ‘알레프 프로젝트’의 주제를 관통하는 ‘알레프 포인트’이다. 의도적으로 관람객들이 입실 전에 ‘정교한 실험실’을 살짝 엿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설치됐다.

신경 세포 시청각으로 표현

‘에디윈 판 데르 헤이더’의 ‘진화형 스파트 네트워크’는 멀티프로젝트홀에서 진행되고 있다. 작가는 사운드, 공간, 상호작용의 영역을 탐구하는 연구자이자 예술가로 작곡과 음악적 언어를 공간적, 상호작용적, 융합적인 방향으로 확장시켜 왔다. 이번 작품에서도 이런 성향이 잘 드러나고 있다.

▲ 에디윈 판 데르 헤이더, ‘진화형 스파트 네트워크’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어두컴컴한 홀 안으로 들어가면 불꽃이 터지는 스파크가 번쩍인다. 소리마저 불규칙적으로 터지며 마치 전기에 감전될 것만 같은 느낌을 받는다. 일정한 간격으로 배치된 80개의 스파크 브리지가 빛과 사운드로 구성된 전자 스파크를 만들어내며 공간적 네트워크를 형성한다. 그리고 관람객이 들어서면 우리 신경 세포를 감지해 시청각으로 표현된다. 이곳에 들어서면 바로 나가지 말고 어두운 공간에서 한참을 서 있어 볼 것을 권한다. 스파크의 모습을 통해 광활한 우주에 서 있는 듯한 착각을 자아내기 때문이다.

한편, 중앙홀에서는 기계생명체 작가로 유명한 최우람 작가의 작품을 만날 수 있다. 높이 5m에 이르는 가상의 거대한 기계생명체 ‘오페르투스 루눌라움부라’가 그것이다. 바이킹족의 배에 달린 노처럼 좌우 대칭 형태를 지닌 수십 쌍의 거대한 날개는 다양한 패턴으로 움직이며 관람객들의 시선을 뗄 수 없게 만든다. 신비로운 빛을 품은 듯한 거대한 몸통을 지닌 애벌레 형상의 이 작품은 기술적 완성도와 정밀한 구조미가 돋보이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9611)

뉴스레터 구독신청
태그(Tag)

전체 댓글 (0)

과학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