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칼럼

뮤즈, 뮤지엄, 기억술(2)

이름들의 오디세이(68)

2019.12.10 08:40 사이언스타임즈 관리자
사이렌을 물리치는 뮤즈로 장식된 석관. 뮤즈는 기억의 의미가 있다. 뉴욕 메트로박물관.  ⓒ 박지욱

사이렌을 물리치는 뮤즈로 장식된 석관. 뮤즈는 기억의 의미가 있다. 뉴욕 메트로 박물관. ⓒ 박지욱

제우스는 태어나면서부터 절대 권력을 물려받지는 못했다. 오히려 자식들이 태어나는 족족 잡아먹는 아버지 크로누스(새턴)을 피해 숨어 살아야 했고, 자신의 권력에 도전하는 티탄과 기간테스를 물리쳐야 했다.

티탄 전쟁(티타노마키)와 기간테스 전쟁(기간토마키)에서 힘겨운 승리를 얻고 명실 상부한 천하무적 무소불위의 권력을 쥐고 안정기를 맞이하자 제우스는 한 가지 아쉬움을 느꼈다. 자신의 찬란한 승리와 투쟁사가 시간의 신 앞에서는 무용지물이기 때문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세월이 지나가면 그의 위대한 승리도 모두 까맣게 잊힐 것이기 때문이다. 위대한 신들이라 해도 기억력 쇠퇴는 인간과 같은 처지였던 것이다.

신들은 영원히 죽지 않는 존재이므로 영구한 세월을 살아간다. 하지만 아무리 중요한 일이라고 해도 영겁의 시간이 지나면 기억이 가물가물해지는 모양이다. 공교롭게도 ‘시간의 신’은 자신이 내쫓은 아버지, 크로누스이기도 했다.

만약 다른 신들이 제우스의 위대한 승리를, 강력함을 잊는다면, 누가 언제 자신에게 도전해올 수도 있지 않을까? 제우스는 걱정이 되기 시작했을 것이다. 신들의 건망증을 해결해줄 약이라도 있다면 신들의 음료수인 넥타르(nectar)나 암브로시아(ambrosia에 타 먹일 텐데, 그런 것도 없었다.

그래서 하는 수없이 기억의 여신 므네모시네(Mnemosyne)에게 달려간다. 그리고 하루에 한 명씩 아흐레 동안 아홉 명의 딸을 수태하게 한다. 이렇게 뮤즈가 탄생했다.

이런 출생의 비밀을 지닌 뮤즈들이니 당연히 아버지의 업적을 찬양하는 일을 했다. 다시 말하면 올림푸스판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를 반복 재연하는 것이 뮤즈의 일이었던 셈이다.

그런데 이 이야기에서 우리가 짚고 넘어갈 사실이 하나 있다. 아무리 중요한 이야기라도 팩트만 전달하는 것은 오래 기억에 남지 못한다는 것이다. 사람들 혹은 신들은 이야기를 들려주면 좋아하고 더 잘 기억한다는 것이다.

부모에 대한 효도나 형제간의 우애가 중요하다는 팩트만 전달하는 도덕 수업은 지루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효녀 심청’이나 ‘흥부전’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면 누구나 들으려 하고 기억하려 한다. 더 나아가 그 이야기를 기억해두었다가 다른 사람에게도 퍼뜨리기까지 한다.

이때 이야기의 진실은 중요하지 않다. 심봉사의 안과 질환의 정체나 제비가 온 강남의 위치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진실이던 거짓이던 잘 만들어진 이야기는 사람을 귀를 솔깃하게 하고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뮤즈들 중에는 소설의 여신은 없다. 다만 서사시와 서정시의 여신만이 있을 뿐이다. 소설은 훨씬 나중에 등장한 장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호머의 ‘일리아드’나 ‘오디세이’는 모두 소설이 아닌 서사시다. 운문체인 서사시를 산문체로 풀면 소설이 될 정도로 서사시는 풍부한 내용을 품고 있다.

같은 이야기를 두고 시의 형식을 빌린 이유는 바로 암기가 쉬웠기 때문이다. 눈먼 시인으로 알려진 호머가 그렇게 긴 이야기를 읊을 수 있었던 것도 이야기가 운율과 각운이 있는 시였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노래도 마찬가지다. 시를 외우기는 힘들어도 시를 노랫말로 쓴 가곡을 외우기는 쉽다.

결국 뮤즈들이 열렬히 읊조리고 노래하고 보여준 것들은 인간이나 신의 부실한 기억력에 대한 제우스의 처방이었던 셈이다. 뮤즈의 퍼포먼스에서 태어난 음악, 미술, 문학, 연극 등의 예술도 결국은 시간 앞에 유한하고, 공간의 제약을 받는 인간의 암기력을 확장하려는 시도였던 것이다.

이렇게 알게 모르게 인간은 기억을 늘이기 위한 대책을 개발해서 오랜 세월 지녀왔다. 이렇게 기억을 강하게 만드는 기술을 기억력 증진술이라 부른다. 영어로는 ‘mnemonic’ 이다. 이 어려운 단어는 기억의 여신 므네모시네(Mnemosyne)에서 따왔다.

므네모시네(Mnemosyne)는 다른 곳에도 이름을 남겼다. 건망증 혹은 기억상실을 뜻하는 아므네지아(amnesia, 암네지어)가 그것이다. 없다는 뜻의 ‘a’에 기억의 여신 이름의 앞 글자 ‘mne’가 합쳐져 만들어진 단어다.

마지막으로 개인적인 차원이 아닌, 공동체나 국가적 차원에서 기억해야 할 것들을 모아둔 박물관 즉, 뮤지엄(Museum)도 여기에서 따온 이름이다. 뮤지엄은 ‘뮤즈의 집’이란 뜻이지만 예술 공연장은 아니고 예술을 포함해 기억하고 후세에 남겨줄 모든 것들을 보관하고 전시하는 곳이다. 뮤즈들의 고단한 일들을 이제는 뮤지엄이 대신하고 있는 셈이다.

21세기의 뮤즈들을 보려면 TV나 공연장을 찾아가는 것이 더 빠르겠지만 그래도 뮤즈의 집인 뮤지엄에서는 뮤즈들을 종종 볼 수 있다. 서양에서 박물관 정면 입구 위쪽(팀파눔)의 조각에서, 혹은 전시물에서도 보인다. 만약 아홉 명의 여인이 한 줄로 늘어선 그림이나 조각을 만난다면 뮤즈가 아닌지 의심해볼 만하다.

뮤즈. 바이에른 주립 극장. 뮌헨.  ⓒ 박지욱

뮤즈. 바이에른 주립 극장. 뮌헨. ⓒ 박지욱

그중에서 하프나 나팔, 책이나 가면을 들고 있는 여인이 있다면 십중팔구 뮤즈를 만난 것이다. 이렇게 사연을  알고 뮤즈를 알아보거나 이름이 쉽게 다가온다면 이 또한 하나의 므네모닉(mnemonic)적 기술이라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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