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칼럼

매체 환경의 변화…스토리텔링 진화를 견인하다

[‘0’에 과학기술을 더하다] (1) 이야기에 과학기술을 더하다

[편집자주] 현재 우리의 삶을 둘러싸고 있는 산업, 과학, 기술, 콘텐츠 등 다양한 분야들은 무엇에서 시작되었을까. 이 칼럼의 시작이 된 질문이다. 사실 이 질문에 가장 근접한 답은 이미 학자들의 연구 결과와 학계의 합의로, 또 과학적 증명으로 도출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 분야의 '0(Zero Base)', 즉 처음 출발점을 바라보는 것은 현재에서의 퇴보가 아니라 현상의 중심을 보는 또 다른 시야를 갖기 위해서다.

‘옛날 옛날에’로 시작하는 이야기의 기억은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잘 기억이 나지 않는 옛날이야기가 아니더라도 핸드폰을 통해 송출되는 숏폼 콘텐츠, 스낵 컬처 등 어떤 형식으로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야기의 경험을 가지고 있다.

곱씹어 보면 누군가의 입을 통해 발화된 이야기, 그림·춤·음악으로 표현된 이야기, 영상을 통해 구현된 이야기 등 ‘언어적 전환’이 일어난 매체는 각각 다르지만, 인간은 평생 다양한 형태의 이야기를 경험한다.

‘언어적 전환’이 일어난 매체는 각각 다르지만, 인간은 평생 다양한 형태의 이야기를 경험한다. ⒸPixabay

인류의 역사는 이야기의 역사

인간은 한 개인의 일생에서, 세대에서, 역사에서 이야기와 공존해왔다. 누군가는 이야기를 생산했고, 누군가는 향유했으며, 또 누군가는 전달했다. 방법과 형태는 다르지만,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동굴 벽화에서부터 현재 창작·향유되고 있는 이야기까지 매우 긴 시간 동안 인류는 이야기와 함께 진화해왔고, 보편적으로 이야기에 매료되어 왔다.

영국의 영문학자인 브라이언 보이드(Brian Boyd)는 “문화와 예술의 진화론에서 이야기야말로 매우 중요한 ‘적응’이었다.”며 인류와 이야기의 불가분성을 주장한다. 하지만 굳이 심원한 이야기를 끌어들이지 않더라도 이야기에 매료되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며, 이야기를 만드는 것은 인간만이 할 수 있는 메타적 표현 능력이다.

이 논리를 이어보자면 인류의 역사는 이야기를 표현하고, 만들어내는 인간만의 유일한 능력이 진화하는 것과 맥을 같이 한다. 달리 말하면 역사는 계속되고, 이야기는 계속 만들어지고, 표현 방법은 점차 정교하고 매력적으로 발전한다는 것. 이 이야기 또한 매력적이지 않은가.

인간은 한 개인의 일생에서, 세대에서, 역사에서 이야기와 공존해왔다. Ⓒ게티이미지뱅크

이야기 표현 방법의 진화

많은 서사학자들은 이야기의 형태는 이야기를 주고받는 행위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주장한다. 말과 글, 그림, 그리고 영상과 디지털 매체를 통해 경험한 이야기 하나를 떠올려 보자. 각각의 매체 안에 담겨 있는 이야기들은 같은 내용이라도 다른 형태로 향유된다. 물론 이야기 생산 방법도 다르다. 이처럼 매체에 따라 이야기의 구조와 형식이 달라지는 패러다임을 두고 ‘이야기 표현 방법의 진화’, 소위 ‘스토리텔링’이라고 일컫는다.

먼저 인간이 생득적으로 가지고 있는 이야기 표현 방법은 ‘말’이다. 개인의 생각과 감정을 표현하든, 허구의 이야기를 전달하든 말은 이야기의 본질이며 이야기의 기본 매체인 셈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듯이 말은 일시적이고 휘발성이 강해서 발화하는 순간 사라져 버린다. 이 속성을 보완할 수 있는 방법이 바로 ‘글’이다.

‘글’이 이야기 전달과 지속, 보존 방법을 보완해 주게 되는 데에는 인쇄술이라는 놀라운 신기술과 조우한다. 역사를 보더라도 인쇄술로 인해 지식의 질적·양적 변화가 시작됐고, 문자문화가 꽃을 피웠으며, 많은 이야기들이 창작되었다. 이러한 시기를 거쳐 이야기 표현 방법은 ‘스토리텔링’이라는 획기적인 패러다임의 전환을 맞았다.

각각의 매체 안에 담겨 있는 이야기들은 같은 내용이라도 다른 형태로 향유되고 생산 방법도 다르다. 이처럼 매체에 따라 이야기의 구조와 형식이 달라지는 패러다임을 두고 ‘이야기 표현 방법의 진화’, 소위 ‘스토리텔링’이라고 일컫는다. Ⓒ게티이미지뱅크

이야기 표현과 매체의 만남, 스토리텔링

1990년대 이후 인지과학과 컴퓨터 공학은 이야기를 창작하는 방법에 획기적인 아이디어를 내놓는다. ‘디지털 스토리텔링’이 대표적인 것.

디지털 스토리텔링은 1995년, 미국 콜로라도 주에서 열린 디지털 스토리텔링 페스티벌에서 처음 사용된 용어다. 이 페스티벌은 자신이 쓰고 싶은 이야기를 웹에 올려 작가가 될 수 있도록 웹 환경을 제공했고, 이후 이야기를 만들 수 있는 다양한 컴퓨터 프로그램들이 확산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전문 작가의 영역으로 인식되었던 ‘이야기 만들기’를 누구나 만들 수 있도록, 어디에서나 할 수 있도록,  작가와 독자 사이에서 소통될 수 있는, 즉 현재 콘텐츠의 뉴미디어 성격을 규정짓게 했다. 그리고 ‘스토리텔링’이라는 용어가 대중화, 보편화되는데 기여했다.

이로써 이야기는 말하고 듣는 구비 시대를 지나고, 문자를 보는 인쇄 시대를 지나고,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동영상 시대, 상호작용성이 구현된 인터랙티브 시대에 안착해 있다. 이 단계들이 이전 단계의 매체가 소멸하고 단절함으로써 발생한 것은 아니기에 계보학적, 관계적 맥락으로 보는 것이 더 맞을 수도 있겠다. 한혜원 교수가 “디지털 시대의 매력은 다양한 미디어가 상호작용적인 관계를 주고받으면서 동시다발적으로 공존한다는 점에 있다.”고 언급한 것처럼.

이 말인즉슨 음성언어와 표상 기호로만 존재했던 이야기가 종이책의 소설이 될 수도 있고, 브라운관의 드라마, 스크린 속 영화, 디바이스 속 게임으로 구현될 수 있고, 향유자 입장에서 보면 이 모든 형태의 이야기를 동시에 즐길 수 있다는 것이다.

이미 이 모든 매체를 누리는 세대들에게 어쩌면 지난한 과정들이 덤덤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인류 역사가 기억하는 매체 발전의 기적, 그리고 단순한 이야기(플롯)가 매체에 따라 정교하게 전이되고, 이야기가 독자·시청자·이용자에게 수용되고 변형되어 새로운 스토리가 만들어지는 과정. 이 과정은 소위 ‘콤보 세트(영화관에서 판매하는 팝콘+콜라 세트)’로 가볍게 소비해 버리기엔 너무 깊고도 놀라운 이야기를 품고 있다.

그래서 오늘의 이 이야기를 또 다른 이야기와 연결해 새로운 이야기로 이어가고자 한다. 현대의 스토리텔링은 꼬리에 꼬리를 무는 반복성과 다양한 영역의 컨버전스를 가능하게 하지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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