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야 문명의 미스터리 밝혀지나?

전쟁으로 멸망했을 가능성 낮아

중남미에 존재했던 아즈텍, 마야, 잉카 문명 중에서 마야의 멸망 원인은 지금도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아즈텍과 잉카 제국은 스페인 정복자들에 의해 멸망해서 인과 관계가 명확하다. 반면에 마야 문명은 신대륙 발견 이전에 거의 붕괴한 상태였고, 남아있던 소수의 부족도 정복자들과 전염병에 희생되어 역사에서 사라졌다.

연구자들은 고고학적 발굴과 유적에 남아있는 마야 문자의 해독을 통해서 잊힌 역사를 복원 중이다. 그간의 연구에 따르면 마야 문명은 BC 2000년경에 시작되었다. 서기 100년에는 10만 인구의 도시가 건설되었고, 250~900년 사이에 거대 도시국가들을 중심으로 절정기를 맞이했다. 그러나 전성기가 끝날 무렵에 기후 변화와 가뭄으로 농업이 붕괴하면서 부족한 자원을 놓고 전쟁이 격화되어 인구가 크게 감소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마야 문명에서는 도시 간 전쟁이 의례적으로 벌어졌다. 초기에는 상대방의 지배층을 포로로 잡거나 공물을 획득하기 위한 것이었지, 도시를 파괴할 정도는 아니어서 경제와 인구에 큰 영향을 끼치진 않았다. 약 800년경부터 도시를 완전히 파괴하여 문명의 몰락을 가져온 대규모 전쟁이 있었던 것으로 여겨졌다.

‘보남팍(Bonampak)’ 유적지에서 발견된 벽화에 그려진 마야인들의 전투 장면 복원도. © El Comandante / Wikimedia Commons

‘보남팍(Bonampak)’ 유적지에서 발견된 벽화에 그려진 마야인들의 전투 장면 복원도. © El Comandante / Wikimedia Commons

총력전 발발 시기 앞당겨져

최근 ‘네이처 인간행동 학회지(Nature Human Behaviour)’에 게재된 논문에서 마야의 농업 붕괴 이전에 군인뿐만 아니라 일반인도 말려든 치열한 전쟁이 발발했다는 증거가 제시되었다. ‘총력전(total warfare)’에 휩쓸려 4개의 주요 도시국가가 초토화되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파괴된 도시를 복구할 수 있었다. 기존의 통설보다 100년 이상 앞선 시기에 대규모 전쟁이 이어졌음을 뜻한다.

2013년부터 미국 연구팀은 과테말라 북부의 고대 마야 도시 유적지인 ‘위츠나(Witzna)’ 인근 호수에서 마야 후기(800~900년)에 발생한 가뭄의 증거를 찾으려 했다. 연구원들은 시추 장비를 이용해서 지난 1700년 동안 위츠나 지역에 어떤 물질이 퇴적되었는지 확인한 결과, 최대 7.5cm 크기의 탄화물을 포함하는 5cm 두께의 탄소층을 발견했다.

과학 전문매체 ‘Phys.org’에 따르면 UC 버클리의 데이비드 왈(David Wahl) 교수는 시추한 퇴적물 샘플을 살펴보다가 위츠나 주민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게 됐다면서 “샘플은 7세기 말에 이 지역에서 큰 화재가 발생한 증거다. 마야 붕괴의 주요 이론과 대치되는 결과를 보여준다”라고 밝혔다.

발굴이 진행되면서 의도적으로 파괴된 건물과 화재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툴레인대학의 프란시스코 에스트라다 벨리(Francisco Estrada-Belli) 교수는 “극단적인 전쟁으로 귀족 포로들만 희생된 것이 아니라, 평민에게도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라고 덧붙였다.

UC 버클리, 툴레인대학, 미국 지질조사국(USGS) 합동 연구팀이 위츠나 유적지 인근의 ‘에크납(Ek'Naab)’ 호수에서 퇴적물을 채취하고 있다. © Francisco Estrada-Belli, Tulane Univ.

UC 버클리, 툴레인대학, 미국 지질조사국(USGS) 합동 연구팀이 위츠나 유적지 인근의 ‘에크납(Ek’Naab)’ 호수에서 퇴적물을 채취하고 있다. © Francisco Estrada-Belli, Tulane Univ.

기후 변화가 멸망의 주원인일 가능성 높아져

연구팀은 지질학적 조사 이외에 고대 비문에서도 증거를 찾았다. 위츠나에서 남쪽으로 32km 떨어진 인접 도시국가인 ‘나란조(Naranjo)’의 기념비에 새겨진 전쟁 기념문을 발견했다. 비문에는 “697년 5월 21일 ‘바람 졸(Bahlam Jol, 위츠나의 다른 명칭)’을 두 번째로 불태웠다”라고 적혀있다. 위츠나에서 대규모 화재가 발생한 시기와 일치한다.

나란조 비문에는 파괴된 다른 3개의 도시 이름도 명시되어 있다. 이번 연구를 바탕으로 고고학자들은 마야 역사의 일부를 재구성했다. 당시 나란조의 여왕은 7살 아들을 왕좌에 앉힌 뒤, 반기를 든 경쟁 도시들을 제압하기 위해 군사 작전을 펼쳤다는 것이다.

왈 교수는 “대규모 전쟁은 인구 규모에 큰 타격을 입혔다는 것을 암시한다. 모두 죽었는지, 단순히 이주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 사건 직후에 주변 지역에서 인간의 활동이 급격히 감소했다”라고 언급했다. 그러나 위츠나는 어느 정도 인구가 감소한 채 부활했고, 한동안 번성하다가 1000년경에 버려졌다.

에스트라다 벨리 교수는 “카르타고나 트로이처럼 마야의 여러 도시는 파괴된 뒤에 다시 사람들이 정착한 것으로 보인다”면서 “마야 문명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총력전이 이미 흔했다면 문명의 붕괴 원인은 아닐 가능성이 높다”라고 말했다.

현재 연구팀은 마야의 멸망 원인으로 기후 변화에 초점을 맞춰 조사하고 있다. 마야 사회의 주식은 옥수수였다. 대화재 이후 옥수수 생산량이 감소했지만, 완전히 재배가 중단된 것은 1000년경이 되어서다. 그 무렵 가뭄이 지역 전체를 휩쓸었을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다른 연구에서 밝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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