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칼럼

동이족의 적자는 한국인

이종호의 과학이 만드는 세상-붉은악마와 치우천황(4)

<동이족의 순장(殉葬)과 사각형 제단>



양저문화와 한 계통인 상해의 복천산(福泉山) 145호 묘는 양저문화가 동이족임을 알려주는 결정적인 자료를 갖고 있다. 그것은 순장 제도인데 동양에서 이 제도는 중국인과는 달리 동이족의 풍습으로 인식한다.



현대인들에게 가장 금기시되는 행동은 살인이다. 어떠한 경우라도 살인은 정당화되지 않는다는 것은 자살을 엄밀한 의미에서 살인으로 간주하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그만큼 일단 태어난 생명은 어느 누구라도 함부로 빼앗을 수 없다는 인식을 기반으로 한다.



그러나 이러한 현대인들의 상식적인 생각이 과거에도 통용된 것은 아니다. 가장 잘 알려진 것이 살아있는 사람을 죽여서 무덤에 묻었는데도 불구하고 이러한 순장 풍습을 지역에 따라 아름다운 미풍 양식으로 여기기도 했다. 앞에서 설명한 결초보은이나 미망인이란 말은 사람을 죽여 무덤에 묻는 것을 당연시하는 순장의 풍습을 다소 미화시킨 에피소드라고 볼 수 있다.



죽은 사람을 위해 산사람을 함께 매장한다는 것은 죽은 뒤에도 피장자(被葬者)의 평상시 생활이 재현된다는 믿음에서 나온 것으로 고대 세계에서는 매우 익숙한 풍습이다.



순장의 원래 발상지는 고대 오리엔트로 추정한다. 신석기시대인 기원전 7000년경의 예리코(Jericho) 유적에서 발견된 남자 시체가 순장된 것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대체로 기원전 3000년경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본격적으로 시행되었다고 추정한다. 예를 들어 유프라테스강 하류의 우르(Ur) 유적의 왕묘에서는 59인의 순장자가 발견되었는데 그 중 6인은 완전무장한 병사, 9인은 화려한 장신구를 가진 여자였다. 또한 이집트에서는 기원전 2500년경의 조세르 왕묘 주변에서 궁녀 273인, 신하 43인을 순장한 묘가 발견되었다.



오리엔트의 고대문명은 다른 지역으로도 파급되었는데 유럽에서는 고대 갈리아(현 프랑스)·아일랜드인·불가리아인·슬라브인들에게서도 순장 또는 순사(자원하여 묻히는 것) 풍습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고대 중국에서는 순장제도가 지도자에 따라 생겼다가 없어지는 일이 반복됐다.



순장이 성행한 시기는 동이족이 건설한 것으로 인식하는 은나라로 보통 한 무덤에 100명 가까운 사람들이 순장됐는데 순장자의 수만큼이나 묻힌 방법이 다양하다. 두개골만 매장된 구덩이가 있는가 하면 꿇어앉은 채 살해된 순장자들도 있다. 한 구덩이 안에서 수십 명씩 포개져 매장된 순장자도 발견된다.



순장 풍습은 은나라를 대치한 화하족의 서주(西周) 이후 급격히 감소하는데 사마천의 『사기』에 기록된 진(秦)나라 무공 20년(기원전 698∼678) 66명을 순장했다는 기록이 나타난다. 학자들에 따라 이 기록을 순장 기록의 시초라고 간주하지만 중국의 하건민(何健民) 박사는 서주 선왕(宣王, 기원전 827∼781) 대에도 순장의 기록이 있다고 적었다.



진나라 목공이 사망한 기원전 621년에도 177명이 순장됐는데 그 가운데는 엄식, 중항, 침호 등 충신들이 포함돼 있었다. 순장제도는 진 헌공 원년인 기원전 385년에 폐지됐는데 진시황이 죽고 난 뒤 즉위한 2세 황제 호해 때 다시 등장했다.



그 후 한나라부터 원나라까지는 순장제가 사라졌는데 명대에 부활한다. 명나라 태조 때 많은 궁인들이 순사했고 성조ㆍ인종ㆍ선종 때도 순장했고 청나라 때도 세조가 사망하자 후궁 30명이 순장되었고 성조(聖祖) 때도 40명의 궁녀를 순장하려다 성조가 심히 싫어하여 금지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일본의 경우도 순장이 성행했다. 『고사기』에 죽은 사람이 능묘 주위에 담 구실을 한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이며 『일본서기』에는 순사자들을 생매장하였는데 이를 고풍(古風)이라고 적었다. 순장이 일본에 매우 성행했다는 뜻이다.



한국의 순장에 대한 기록은 많지 않지만 순장에 대한 증거는 매우 많다. 가야지역인 양산군 양산읍 북정리 부부총, 1982년 우연하게 발견된 경상북도 경산시 임당동 고분군, 금관가야의 대성동 고분군, 의성 탑리, 창녕 계성리, 순흥 읍내리 등에서 순장의 증거가 발견된다.



유명한 경주의 황남대총의 경우 고분의 구조상 적석목곽분은 추가장이 불가능한데 15세 전후의 여성 이빨 16개와 150센티미터 미만의 키를 가진 여성의 뼈가 관 밖에서 수습되었다. 반면에 60세 전후의 남성 머리뼈와 이빨 12개가 관 안에서 수습되었다. 그것은 분명 ‘순장(殉葬)의 흔적’이다.



여하튼 동이족의 풍습으로 알려진 순장이 양저문화에서 발견되는데 더욱 놀라운 것은 배장제도도 유사하다는 점이다. 절강성 여항현 요산(瑤山)에서 서로 다른 흙을 사용하여 둘레를 자갈과 잘게 자른 돌을 두른 3층의 제단 유적이 발견됐다. 길이는 약 20미터, 면적 400제곱미터로 하늘과 땅에 제사지내는 유적으로 보이는데 부장품을 고려할 때 순장의 흔적도 보인다. 즉 사각형 제단이 있고 그 제단 주위에 순장이 행해졌다는 것이다.



이동식은 중국에서 피라미드식으로 된 4각형의 제단이나 무덤은 모두 중국민족의 것이 아니라는 데 주목했다. 그는 절강성의 요산을 포함하여 4각형으로 된 구조물은 산동성 곡부에 있는 소호김천씨의 능과 만주 길림성 집안현의 장군총, 서하왕국(당항족이 세운 유목국가)의 왕릉, 북방식 신석기문화유적인 요령성 건평현에 있는 우하량(牛河梁) 유적 등에서 발견된다고 적었다.


소호김천씨는 가야의 김수로와 신라 김알지의 선조로 알려져 있으며 그의 무덤이 있는 산동성 곡부는 공자의 고향이지만 공자 이전에는 산동성 동이족의 중심지이다.



장군총은 큰 돌을 잘라서 4각형 피라미드 형식으로 쌓은 것으로 동이족 문화의 큰 특징으로 분류되는 고분형식이다. 그 무덤이 백제를 따라 한강까지 내려와 석촌동에 고분군을 만들기도 했다.



우하량 제단 유적은 만주지방의 신석기시대에 나타나는 대표적인 제단양식으로 ‘홍산문화’로 불리는 문화 중 하나이다. 홍산문화는 빗살무늬토기 등을 사용한 대표적인 북방인들의 문화이다.



결론적으로 사각형 피라미드식의 유적은 모두 중화민족의 것이 아닌데 절강성에서 발견되었다는 것은 중국인인 화화족(염황족)이 만들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로 절강성에 살았던 사람이 동이족이라는 뜻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나라에 존재하는 문화와 같거나 비슷한 문화 요소들이 외부에서 발견되면 그 문화가 한국으로 유입되었다고 일방적으로 생각한다. 가장 비근한 예가 절강성에서 발견되는 고인돌과 벼농사이다. 벼농사가 남방에 적합하며 동이 지역에서 발견되는 고인돌이 절강성에서 발견되는 것을 볼 때 이들이 남방으로부터 전래되었다고 추정한다.



그러나 근래 학자들은 고고학적 증거를 토대로, 우리나라에 존재하는 문화와 같거나 비슷한 문화 요소들이 외부에서 발견된다고 그 문화가 한국으로 유입되었다고 일방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나라에서 외부지역으로 영향을 미쳤을 수도 있다고 추정하기도 한다.



절강성의 고인돌 같은 경우 약 3천여 년 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하는데 동이 지역의 고인돌은 5∼6천 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므로 윤내현 박사는 오히려 동이 지역에서 고인돌 풍습이 중국 남쪽으로 내려갈 수 있다고 설명한다. 특히 기원전 3천여 년 전에 동이족이 주나라의 공격에 패배한 후 분지되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동이족의 대이동>



근래 중국학자들이 동이족에 대해 설명하는 요지는 분명하다. 고대 중원지방에 살던 동이족이 치우천황 때는 물론 주나라와 보다 후대인 진시황에 밀려 남ㆍ북으로 갈라지게 되었는데 북쪽으로 간 부류는 부여인 등 고대 한국인의 선조가 되었고 남쪽으로 내려간 사람들은 운남성이나 귀주로 가서 오늘날 묘족(苗族) 또는 요족(瑤族)이 되었다는 것이다.



위의 설명으로 절강성의 월족들이 이루어 놓은 양저문화와 하모도문화가 동이문화와 유사한 문신 등의 풍습들을 갖고 있는 이유가 충분하게 설명된다. 이동식은 월족 즉 절강성의 고대인들이 산동성의 동이족과 본질적으로 같은 계통의 문화를 갖고 있는데 송편과 월병도 한 예로 들었다.



한국의 추석을 대표하는 음식이 송편으로 일반적으로 달의 모양을 흉내 낸 것이라고 설명된다. 반면에 중국의 추석을 대표하는 음식은 월병으로 달 모양을 흉내 내어 만든 일종의 떡이자 과자이다. 한국의 송편은 상현달을 본뜬 것이며 중국의 월병은 보름달을 본뜬 것이다. 그런데 중국의 월병은 고대 월국의 중심지인 항주이다. 강남에 살고 있던 월족은 과거부터 떡을 만들어 일가친척이 한데 모여 나눠먹는 습속이 있었는데 그 기원이 은나라까지 올라간다.



월(越)은 월(月)과 발음이 같다. 한국의 한자 독음과도 같다. 이것은 월병(月餠, 달떡)은 원래 월병(越餠, 월나라 떡)이었는데 달을 숭상하는 풍속과 결합이 되어 월병이 중국 전체로 퍼져나갔다는 것이다.



물론 월병에는 또 다른 유래가 있다. 원나라 말에 관가의 부패가 극에 달하자 태주(천태산이 있는 곳)의 장사성(張士誠)이 ‘몽고족을 죽여 원나라를 멸망시키려니 8월 15일에 거사하자’라고 쓴 종이쪽지를 둥근 떡 속에 넣어 전했다. 8월 보름 예상대로 의거가 시작되어 결국 원나라는 멸망했다. 이것을 기념하기 위해 매년 8월 15일 월병을 먹으며 장사성의 공훈을 기린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사건의 무대도 월나라의 근거지인 항주 일대이다.



추석날 한국도 달떡을 만들어 먹는다. 물론 달떡의 모양은 다르다. 중국 것은 보름달처럼 둥글고 한국에서는 상현달 같은 반달이다. 이 차이는 지역과 시대를 내려오면서 달라질 수 있다고 이동식은 설명했다.



월 지방에는 우리의 무당과 같은 무속인들이 후대까지 전해진다는 것도 제시됐다. 명나라의 방효유는 월무(越巫)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었다.



‘월의 무당은 스스로 귀신을 부릴 수 있다고 궤변을 늘어놓는다. 사람이 병이 나면 단을 세우고 호각을 불고 방울을 흔들며 뛰고 소리를 지른다. 둥글둥글 호무를 추며 귀신을 쫓는다. 요행스럽게 병이 나으면 술과 음식을 먹은 뒤 상 위에 놓인 돌을 가지고 가고 혹 환자가 죽게 되면 귀신이 요망을 부렸다며 자신의 기술이야말로 요망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동식 기자는 월무라는 무당이 우리나라의 무당과 큰 차이가 없다고 지적했다. 무당은 북방민족의 대표적인 민속 중에 하나인데 월지방에도 있었고 그 무당의 형태가 오늘날 한국의 무당과 차이가 없다는 설명이다.



최근 중국 역사학계의 가장 큰 변화는 중국의 역사가 삼황오제로부터 ‘하-은-주’로 일직선으로 내려왔다는 전통적인 중화우월주의를 버리고 다원성을 택하고 있다는 점이다.



중국학자 서북문(徐北文)은 신석기시대 말기 이후 중국대륙에는 서부지역의 화하문화와 동부지역의 동이문화가 함께 병존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화하문화는 하나라의 창시자로 일컬어지는 우임금으로부터 시작해 주나라로 이어지고 동이문화는 치우천황을 거쳐 요순시대 이후 은나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두 개의 큰 문화의 흐름 즉 이질적인 민족의 문화를 인정하는 것이다.



물론 이런 중국 측의 변화는 중국의 동북공정(東北工程) 등 일련의 사건을 볼 때 진의를 의심하는 학자들도 있다. 현재의 중국 영토가 자신과는 다른 이민족이 살고 있던 지역도 포함하게 되자 그들 역사도 자신들의 것이라고 주장하기 위한 방편이라는 설명이다. 고구려를 자신들의 역사라고 주장하는 근거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를 역으로 생각하면 중국과 뚜렷이 구별되는 동이문화의 뿌리가 산동성뿐만 아니라 양자강 일대까지 확산돼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설명도 된다.



이러한 사실은 그동안 한국 학자들에게 큰 고민을 안겨 주었던 신라 말 최치원의 글에 대한 실마리를 풀 수 있는 계기가 될지 모른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삼국사기』 <최치원전>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고구려와 백제의 전성시에는 강병 백만으로, 남으로는 오월(吳越)을 침해하고 북으로 연(燕)ㆍ제(齊)ㆍ노(魯)를 위협하여 중국의 거적(巨賊)이 되었다.’



고구려와 백제가 남쪽으로 침범했다는 오·월은 절강성 일대인데 최치원의 짧은 이 말 한마디가 그동안 잊혀졌던 한국의 과거사를 다시 되돌아보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치우천황과 헌원이 탁록에서 전투하여 치우천황이 패배했다는 것을 사실로 인정한다면 전투 결과가 어떻게 되었을까를 상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치우천황이 패배했기 때문에 동이족 중에서 많은 사람들이 헌원의 포로가 되었고 다른 부류는 도망쳤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포로가 된 많은 동이족들이 중국의 화하족에 동화되었을 것은 이해가 되며 중국이 강조하는 것도 이 대목이다.



이 점을 기수연 박사는 분명히 했다. 한대(漢代) 이후 동북지역에서 나타나는 동이를 그 이전 시기 산동 일대에서 존재했던 동이와 같은 계보로 묶을 수는 없다는 설명이다. 동이족이 중국의 화하족과 대립하는 상대적인 개념의 민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치우천황이 헌원에게 패배한 이후 상당수의 동이족들이 화하족에게 흡수 동화되었기 때문이다.



반면에 포로가 되지 않고 탈출한 사람들은 중국에 동화되지 않고 동이족의 전통과 풍습을 계속 유지해 내려왔다고 추정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바로 이 대목이 한국민이 강조하는 것으로 한민족은 헌원에게 패배했음에도 불구하고 화하족에 동화되지 않고 계속 동이족으로 내려와 현재의 한민족이 되었다는 것이다.



윤명철 박사는 보다 구체적으로 동이가 한민족의 근간이 된 예맥족을 포함하고 있으며 중국의 한족과 대립하면서 문화전통을 유지 발전시켰다는 데 주목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이와 같은 설명은 치우천황을 바라보는 각도가 중국과 다를 수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려준다.



‘치우천황이 중국의 헌원에게 패배한 후 일부 부류는 중국에 동화되었지만 한민족은 동화되지 않은 채 그들의 문화를 계속 유지했으므로 치우천황의 맥을 현재까지 계승하고 있는 것은 한민족이다.’



동이족이 헌원에게 패배하면서 도망갈 때 반드시 중국의 동북방으로만 진로를 잡았다고 볼 수는 없다. 동이족인 은나라가 주나라에 패배할 때도 같은 정황을 그려볼 수 있다. 그러므로 앞에서 설명했지만 동북방의 동이족 후예인 한민족과 중국 남부의 월족이 같은 부류라는 것은 충분히 이해된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중국 실크로드의 관문인 난주(蘭州)에서 돈황까지 가는 유일한 통로가 ‘하서주랑(河西走廊)’이다. 남쪽으로는 기련산맥(祁連山脈)이 우뚝하고, 북쪽으로는 몽골고원과 사막이 펼쳐진 가운데, 좁은 곳은 10km, 넓은 곳은 100km에 이르는 회랑(回廊)이 1000km 정도 길게 뻗어 있다.



하서주랑은 옛 주인이었던 삼묘족(三苗族)과 흉노족(匈奴族) 때문에 우리 역사와 관련이 있는데 소여림(邵如林)은 『하서주랑(河西走廊)』에서 삼묘족을 구려족(九黎族)의 후예라고 설명하고 있다. 금속문명을 지녔던 치우(蚩尤)의 구려족이 황제족(黃帝族)과 탁록 전투에서 패한 후 이 고원지역으로 이주했다는 것이다. 구려족은 동이족의 한 갈래이므로 하서주랑의 삼묘족 또한 우리 역사의 한 부분이라는 설명이다.



여하튼 중국 길림성의 송호상 교수는 1990년을 기준으로 중국에 있는 동이족의 후예를 조선족 200만 명, 만족 1000만 명, 묘족 750만 명, 리족(黎族) 100여 만 명이며 묘족의 해외교포만 100만 명이 넘는다고 적었다. 물론 묘족을 포함하여 만족, 리족이 동이족의 후예라고 하더라도 한민족과 동일 선상으로 간주해야 한다는 것은 다소 무리하다는 설명도 있음을 첨언한다.



여하튼 10여 년 전 만해도 역사학자들이 치우천황과 한민족은 직결되어 있다는 것을 설명했지만 현재와 같이 한국인들이 치우천황의 이름을 잘 알게 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한국 고대사에 큰 화두를 던져주고 있는 치우천황이 스포츠를 통해 가까워진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일로 볼 수 있다. 우리의 과거를 찾아주는 고대사가 앞으로 스포츠를 비롯한 과학적 연구에 의해 계속 우리들에게 새로운 정보를 제공해 줄 것이기 때문이다. 끝.

(4648)

뉴스레터 구독신청
태그(Tag)

전체 댓글 (0)

과학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