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군 이래 최대 과학 시설, 첫 빛을 쏘다

[사타가 간다] 한국형 중이온가속기 ‘라온’, 저에너지 가속구간서 첫 번째 빔 인출

“드디어 라온에서 첫 빔(beam)이 나왔다고 합니다!”

지난 7일 대전 기초과학연구원(IBS) 과학문화센터에서 열린 ‘EMIS 2022(2022년 국제동위원소분리장치콘퍼런스)’ 국제학회 현장. 학회 폐회를 앞둔 IBS 중이온가속기연구소 연구진에게 놀라운 소식이 전달됐다. 이날 오후 3시 4분, 한국형 중이온가속기 ‘라온(RAON)’에서 첫 번째 빔(Beam)이 인출됐다는 소식이었다.

IBS 연구진은 폐회사와 함께 이 소식을 알렸고, 학회에 참석한 각국의 물리학자들 사이에서 박수와 환호가 터져 나왔다. 2010년 개념 설계를 시작한 ‘단군 이래 최대 과학 시설’이 12년 만에 첫 빛을 세상에 내뿜었다. 순전히 우리 기술로 설계‧제작한 대형 연구시설이 목표한 성능대로 잘 작동한다는 것을 증명한 셈이다.

▲ 7일 한국형 중이온가속기 ‘라온(RAON)’에서 첫 빔을 인출한 이후 관계자들이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기초과학연구원(IBS)

 

축구장 130개 크기, 국내 최대 규모 단일 연구시설

“국제학회 마지막 날 공교롭게도 첫 빔이 인출됐고, 유관 분야 세계 연구자들에게 소식을 실시간으로 전할 수 있었습니다. 학회에 참석한 연구자들은 한국이 구축한 중이온가속기를 곧 활용할 수 있겠다는 기대감에 라온 현장을 둘러보고 가기도 했습니다. 첫 단추를 잘 끼운 만큼, 조만간 세계 연구자들이 이곳에 모여 인류의 ‘빅 퀘스천(Big Question)’에 대한 해답을 찾아가게 될 것입니다.”

▲ 지난 13일 방문한 대전 IBS 중이온가속기연구소 본관동의 모습. ⓒ사이언스타임즈 권예슬

지난 13일 대전 IBS 중이온가속기연구소에서 만난 홍승우 소장은 “우리 기술로 설계하고 제작한 거대한 과학 인프라가 설계대로 잘 작동한다는 의미”라며 첫 빔 인출의 의미를 설명했다.

라온은 정부가 2011년부터 현재까지 1조5,184억 원을 투자하여 순수 우리기술로 설계‧제작한 중이온가속기다. 가속기는 입자를 빠른 속도로 가속시키는 장치다. 가속하는 재료에 따라 이름과 목적이 달라지는데 중이온가속기는 문자 그대로 중(重)이온, 즉 무거운 이온을 가속시킨다. 라온은 중이온을 가속하는 직선 형태의 선형가속기 중 세계 최대 규모를 목표로 삼았다. 부지의 면적만 95만 2066㎡로 축구장 130여 개의 면적과 같다.

 

원자핵을 들여다보는 초거대 현미경

라온은 중이온을 재료로 펨토미터(fm‧1fm는 1,000조 분의 1m)의 세계를 들여다본다. 분자를 관찰하는 나노과학을 넘어 펨토과학은 원자의 중심부에 있는 원자핵과 원자핵을 구성하는 양성자, 중성자를 탐구한다.

원자핵을 보기 위해서는 최소 100만eV(전자볼트)의 에너지가 필요하다. 원통에 1V의 전압을 가하고, 전자가 한쪽 끝에 도달할 때의 운동에너지가 1eV다. 100만eV를 구현하려면 1V의 건전지 100만 개를 직렬로 연결해도 된다. 건전지 1개의 길이가 1cm, 가격이 1,000원이라 가정하면, 10억 원어치의 건전지를 10km 길이로 연결해야 원자핵 속을 들여다볼 수 있다. 이보다 간단하게 높은 전압을 얻기 위해 개발된 장치가 가속기다.

▲ 라온의 저에너지 가속 구간(SCL3)의 모습. 이곳에서 중이온은 빛의 12%에 달하는 속도까지 가속된다. ⓒ사이언스타임즈 권예슬

사실 라온의 정확한 이름은 ‘희귀동위원소 가속기’다. 자연에 존재하지 않는 희귀동위원소를 만들고, 이를 원하는 에너지까지 가속하는 장비다. 원자핵은 양성자와 중성자로 이뤄지며, 그 조합에 따라 각기 다른 동위원소가 된다. 동위원소는 양성자 수(원자번호)는 같지만, 중성자 수가 달라 질량이 서로 다른 원소다. 가령, 양성자가 1개인 수소는 중성자가 0개, 1개, 2개일 때 각각 수소, 중수소, 삼중수소로 불린다. 이들이 모두 수소의 동위원소다.

양성자와 중성자의 조합에 따라 1만 개 이상의 동위원소가 존재할 수 있다. 하지만 현재까지 발견된 건 118개의 원소의 3,000여 개의 동위원소뿐이다. 7,000여 개의 동위원소는 자연에 존재하지 않고, 인공적으로 만들어도 순식간에 사라져 버린다. 이들이 희귀동위원소로 불리는 이유다. 중이온가속기는 희귀동위원소를 만들고 관찰할 수 있는 유일한 기술이다.

현재까지 밝혀진 중이온가속기를 이용한 희귀동위원소 생성방식은 두 가지다. 비유하자면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ISOL’ 방식과 바위로 계란을 치는 ‘IF’ 방식이다. 전자는 다량의 희귀동위원소를 생성한다는 점에서, 후자는 다양한 종류의 희귀동위원소를 생성할 수 있다는 점에서 각각 장점이 있다. 전 세계의 중이온가속기는 연구 목적에 따라 ISOL과 IF 중 한 가지 생성방식을 사용하는데, 라온은 세계 최초로 두 가지 방식을 동시에 사용하도록 설계됐다. 그만큼 더 새롭고 희귀한 동위원소를 발견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 중이온가속기를 이용해 희귀동위원소를 생성하는 두 가지 방식. ISOL은 가벼운 원소의 이온을 가속해 두꺼운 표적에 충돌시킨다. 표적이 두꺼운 만큼 여러 번의 핵 반응이 일어나기 때문에, 한 번의 충돌로 대량의 희귀동위원소가 생성된다. 반면, IF는 무거운 원소의 이온을 가속해 가벼운 원소로 된 표적에 충돌시키고, 이 과정에서 쪼개진 무거운 원소의 파편 중 희귀동위원소를 추출한다. 이온빔의 에너지가 높은 만큼 많은 종류의 희귀동위원소를 획득할 수 있다. ⓒ기초과학연구원(IBS)

정부는 당초 동위원소를 생성할 세 종류의 가속장치를 설계했다. 4차례에 걸친 계획 변경을 거쳐 2021년 12월 세 가속장치 중 하나인 저에너지 가속구간의 설치까지 마친 상태다. 길이가 약 95.5m인 저에너지 가속구간에서 중이온은 54기의 가속모듈을 거쳐 중이온의 에너지를 1,850만eV까지 높일 수 있다. 이때 중이온 빔은 빛의 속도의 12%까지 가속된다.

지난 7일 진행된 실험은 54기 중 전단부 5기 가속모듈을 활용해 시운전을 진행했고, 그 결과 중이온 빔의 에너지가 70만eV까지 도달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12일 배포한 보도자료를 통해 “자동차에 비유하면 제작을 완료하고 시동을 걸어 주요 장치들의 정상 작동 여부를 확인하고, 1단 기어로 저속 주행 시험을 성공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IBS 중이온가속기연구소는 내년 3월 저에너지 가속장치 전체 구간 시운전을 목표로 가속시험 구간을 단계적으로 늘려가며 빔 인출 시험을 진행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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