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칼럼

뇌신경 환자를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

[과학명저 읽기] 과학명저 읽기 42

“의사는 자연학자와 달리……단 하나의 생명체, 역경 속에서 자신의 주체성을 지키려고 애쓰는 하나의 객체, 즉 주체성을 지닌 한 인간에 마음을 둔다.” 의사의 정체성에 대한 이 멋진 규정은 이번 주에 소개할 책, 올리버 색스의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를 시작하는 인용구이다. 이 인용구는 신경과 전문의인 올리버 색스가 자신의 환자를 바라보는 시선의 핵심을 정확하게 포착하고 있다. 색스는 환자를 보편화될 수 있는 질병이 발생한 임의의 개인으로 보지 않는 것이다.

근대 임상의학의 탄생 이전에 질병은 사람마다 독특한 개인사와 생활 습관, 교우관계 등 수많은 요인의 영향을 받는 복합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당연히 여러 개인 사이에 증상이 비슷하더라도 질병은 개인마다 고유한 것으로 여겨졌고 자연스럽게 그 치유법도 각기 다르게 구성되어야했다. 의사는 일단 환자의 개인적 성향이나 기호 등을 파악하고 마음과 신체의 균형이 어디에서 어긋났는지를 판단하여 종합적인 해결책을 제시해야 했다.

 

질병의 세균설이 등장하면서 질병은 훨씬 더 단순한 것으로 치부되었다. 의사는 일단 질병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진단해야 한다. 치료는 특정 원인(예를 들어, 병을 일으킨 주범인 특정 종류의 세균)을 병의 원인으로 지목하는 것에서 곧바로 이 원인에 대한 일반적 대책(예를 들어, 항생제)로 진행했다. 이런 조치는 이 특정 질병에 걸린 모든 환자를 원칙적으로 동등하게 취급함을 의미한다. 특정 환자는 단지 이제는 확고한 실체를 갖게 된 질병이 발생한 ‘장소’로 여겨졌다. 그 ‘장소’가 어떤 특징을 갖는지는 기껏해야 부차적인 문제였다. 어떤 의미에서는 의학적 탐구와 실행의 중심이 환자에게서 질병 그 자체로 옮겨갔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근대 질병관의 등장은 의학적 진단과 치료의 측면에서 상당한 진보를 가져왔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환자 자체에 대한 의사의 관심이 줄어들고 환자를 인격을 가진 하나의 사람으로 간주하는 것이 아니라 몸 어딘가에 문제가 생긴 기계 장치처럼 분석하려는 태도가 더 널리 퍼지게 되었다. 이는 의사가 특별히 비인간적이 되어서가 아니라, 지나치게 환자의 개인적인 특징에 주목하다 보면 서로 매우 다른 환자를 가로질러 나타나는 질병의 보편적 특징을 잡아내기 어려울 수 있기 때문이다. 냉정하게 환자를 진단하고 적절한 대응책을 제시하는 ‘과학자로서의 의사’의 이미지가 궁극적으로 훨씬 더 환자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여겨지는 것이다.

하지만 만약 당신이 올리버 색스와 같은 처지에 있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색스가 다루는 환자 중에는 분명 정확하고 빠른 진단과 적절한 처치를 통해 즉각적 효과를 볼 수 있는 사람들도 있다. 뇌 어딘가에 종양이 생겨나 일시적 시각 장애를 일으키는 환자라면 이를 빨리 진단하여 수술 등을 통해 종양을 제거하면 환자를 원래의 상태에 가깝게 돌려놓는 것이 가능하다. 하지만 많은 신경퇴행성 질환의 경우 그 진행 속도를 늦추는 것은 가능하지만 원래 상태로 완전히 되돌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는 담배를 천천히 혹은 빨리 피움으로써 연기의 양을 조절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흩어진 연기를 모두 다시 모아서 담배를 만드는 일이 불가능한 것과 같다. 혹은 코르사코프 환자처럼 단기 기억을 형성하는 능력이 영구히 손상된 경우라면 증상 자체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의사는 환자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색스는 인류학자와 인문학자의 따뜻한 시선으로 환자의 질병만이 아니라 그와 연관된 내면세계를 이해하여 그를 도울 수 있는 방안을 찾아내기 위해 노력한다. 질병이 어떤 방식으로 환자의 인격과 생에 대한 전망 그리고 생활 방식 전반에 영향을 끼치는지. 삶에서 소중한 어떤 것을 잃게 되고, ‘큐피드 병’처럼 드문 경우에는 얻게 되었는지 등을 환자와의 공감어린 대화를 통해 알아내고 이를 통해 환자의 삶을 더욱 풍요롭고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 방안을 환자와 함께 모색한다.

색스의 글을 읽고 있으면 여러 가지 감정이 몰려온다. 시각적 정보를 적절하게 처리하여 사물을 분간하는 능력을 잃어버린 남자가 벽시계와 악수를 하려다가 실패하고 예의 없다고 벽시계에게 화를 내는 장면은 저절로 웃음을 자아내게 한다. 하지만 그 사람이 색스와의 면담을 끝내고 일어서면서 옆에 앉은 자신의 아내를 모자로 착각해 자꾸 자신의 머리 위에 쓰려고 하는 장면에서는 단순히 웃을 수 없다.

특히 그 남자의 아내가 무표정한 얼굴로, 즉 이런 일이 처음이 아니라는 점을 시사하는 얼굴로 이 모든 상황을 받아들이는 장면과 남자가 당혹스러워하면서도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모습에서는 사회적 상황에서 예기치 못한 실수를 범해 허둥대는 우리 모두의 모습이 투영되어 마음이 아파온다.

이 책에는 이처럼 병에 걸린 사람들이 어떻게 자신의 주체성을 지키면서 변화된 자신으로 모습을 다양한 방식으로 수용하려 노력하는지에 대한 생생한 이야기가 담겨있다. 책은 4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1부는 일반인이 당연시하는 인지능력이나 신체통제능력을 잃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소개하고, 2부는 이런 통제능력이 특정 방향으로 과잉되어 나타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3부와 4부는 이런 정상/비정상 구별과 잘 맞지 않는 사례들이 나온다. 특히 4부에 등장하는, 일부 자폐증 환자가 보여 주는 천부적인 음악적 재능이나 계산능력은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머리가 좋다/나쁘다’는 판단이 얼마나 특정 지표나 맥락에 한정하여 이루어진 것인지를 잘 보여준다.

이 책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목은 색스의 표현을 빌면 ‘인간을 인간으로 바라보고 기록한 병력’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독자는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에서 기존 신경학 연구경향에 대한 색스의 비판적 시각 역시 엿볼 수 있다. 색스는 인간의 고유한 임상체험을 글로 남기는 전통이 19세기 이후 신경학이라는 객관적 과학이 등장하면서 사라진 점을 아쉬워한다. 그렇기에 색스는 자신이 존경하는 루리아의 <산산이 부서진 세계의 남자>를 본받아 이 책에서 현대 신경학에서 사라진 위대한 ‘이야기’의 전통을 되살려내려 시도하고 있다.

색스가 생각하기에 자신이 환자로부터 들은 이야기가 가치있는 이유는 이 이야기가 객관적인 과학이 도달하기 거의 불가능한 환자의 주관적 경험의 세밀한 부분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소수(prime number)가 심상에서 마치 풍경처럼 떠오른다는 두 쌍둥이 형제의 이야기는 객관화되기 어려운 신비로운 일화로 치부될 수도 있지만 우리 마음이 작동하는 방식에 대한 귀중한 ‘여행기’로도 여겨질 수 있는 것이다. 철학자라면 이런 이야기를 우리 마음의 질적 특징(qualia)에 대한 탐색이라 부를 것이다.

잘 쓴 소설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방식 중 하나는 설득력 있는 인물을 제시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색스의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는 잘 쓴 소설만큼이나 흥미로운 인물을 여럿 제시하고 있다. 다만 그 인물들은 일상적이지 않은 병을 가진 채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이들의 삶에 공감하며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하며 이 책을 읽는다면 통상적인 과학책에서는 얻기 어려운 특별한 독서체험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소개도서: 올리버 색스 지음, 조석현 옮김,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이마고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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