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칼럼

근대 지질학의 탄생신화가 보여주는 과학의 성격

[과학명저 읽기] 과학명저 읽기 40

그리 차분한 편이 못 되는 내가 어떻게 그렇게 깨끗이 정리된 노트를 만들었을까 두고두고 신기해했던 대상이 중학교 1학년 시절 지리 시간에 만든 노트였다. 그 노트의 맨 앞쪽에 지질연구의 다섯 원칙 이야기가 있었는데, 그 첫 번째가 ‘동일과정의 법칙’이었고 두 번째가 ‘지층 누중의 법칙’이었다.

대학생 시절 배웠던 지질학 과목에서는 그 동일과정의 법칙이 ‘균일론’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어 있었다. 균일론은 지층이 형성되던 과거를 현재 관찰할 수 있는 자연현상들의 점진적인 누적의 결과로, 즉 경험론적인 시각으로 연구해야 한다는 명제이며, 사변적인 전근대적 지구이론을 대체하면서 올바른 과학으로서의 근대 지질학을 탄생시킨 결정적인 과학관이라고 소개 되고 있었다.

외견상, 지층은 매우 급격한 지구환경의 변화를 보여주는 듯 보인다. 따라서 지구가 매우 오랜 기간을 두고 형성되었음을 이해하지 못했던 근대 이전의 학자들은 지층의 급격한 변화를 현대에는 관찰하거나 짐작하기 힘든 격렬한 과거 환경의 변화 결과로 돌렸다. 특히 대홍수와 같은 격변설화는 성서의 창세신화와 맞물려서 지질학적 과거가 얼마나 심원한지를 헤아리는데 큰 장애가 되었다는 내용이었다.

종교설화와 관찰되지 않는 자연현상인 격변을 동원하여 수천 년 정도의 짧은 시간에 형성되는 지층을 그리려는 시도를 버리고 근대 지질학을 확립한 두 사람, 허튼과 라이엘이 그 지질학 교과서에서 언급되고 있었다.

 

자연철학자 제임스 허튼은 18세기 말에 지층의 관찰을 통하여 지구의 역사가 언제 시작되었는지 흔적을 찾을 수 없으며 또 언제 끝날지를 가늠해 볼 도리도 없이 영겁에 가깝다는 사실을 깨닫고 또 글로 소개한 인물이었다. 1830년 경 찰스 라이엘은 <지질학 원론>을 통하여 허튼의 깨달음을 바탕으로 하여 균일론과 지층 누중의 법칙 등을 구체적인 지질학 연구의 도구로 제시하면서 근대적 지질학의 초석을 다지게 되었다.

이들 근대적 지질학의 선구자들 이전의 지구 이론이란 대체 어떤 것이었을까? 수많은 지질학 역사서들에서 가장 눈에 띄는 인물은 아이작 뉴튼의 동료였던 토머스 버넷이다. 버넷은 <신성한 지구이론>이라는 책을 통하여 신께서 창조하신 지구의 역사와 미래의 모습을 그려 보였다. 신께서는 무에서 에덴동산을 포함하는 완벽한 구형의 지구를 창조하셨다. 거품처럼 물 위에 떠 있던 지각이 무너지면서 대홍수가 있었고, 홍수가 물러가면서 노아의 방주에 남아 있던 생명체의 후손들이 현재의 지구를 뒤덮게 되었으며, 성서의 예언대로 지구는 다시 불길에 휩싸여 정화되면서 별이 될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버넷의 지구이론은 종교 설화에 갇힌 사변적 지구이론의 대표적인 사례로 19세기 후반부터 기키등의 지질학자들에 의해 되풀이 거론되었다.

하지만 과연 버넷은 종교설화의 틀 안에서 지구의 역사를 그려내려 했던 사변적인 전(前)근대인이며, 허튼이나 라이엘은 경험과학으로서의 지질학의 선구자라 불릴 만한 근대적 과학자였을까.

이 책 <시간의 화살, 시간의 순환>에서 저자 굴드는 지질학이라는 학문 분야가 정립되기 이전에 버넷이 종교적 신화에 기대어 지구의 역사를 그리면서도 가능한 한 자연현상을 통해 그 신화를 설명하려 시도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수십 일의 강우로는 지구를 덮는 대홍수를 일으킬 양의 물을 만들어 낼 수 없다는 계산을 해 본 후, 고심 끝에 버넷은 지각 아래 고여 있던 물이 지각이 무너지며 홍수가 일어나는 상황을 상정했다.

당시 성서 연대의 계산에 관심이 있던 뉴튼은 대홍수가 신께서 관여하여 일으키는 설명될 수 없는 기적으로 그리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느냐는 이견을 제시했지만, 버넷은 자연현상으로 설명할 수 있는 데까지는 기적을 동원하지 말아야한다는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사실 17세기에 버넷은 사변과 종교 설화를 가능한 한 동원하지 않으려는 태도로 인해 비판을 받았던 자연철학자였다. 그리고 지구의 시작과 종말을 그리는 그의 시간관은 근대 이전의 많은 문명권에서 볼 수 있었던 시간의 순환보다는 시간의 화살이라는 은유에 기대한 현대의 시간관에 매우 가까운 것이었다.

반면 아마도 허튼의 글을 한 줄 한 줄 실제로 읽어 본 유일한 독자일 저자 굴드는 허튼이 심원한 시간의 깊이를 보았다는 해석이 터무니없다는 인상을 받았다. 허튼은 인상적인 지층의 삽화를 남겼지만, 그가 실제로 지층들 사이의 변화 자체에 관심을 보이는 듯한 문구를 굴드는 발견할 수 없었던 것이다.

허튼의 관심은 토양이 어떻게 식물을 키울 수 있는 재생력을 유지하는가를 보여 주려는 데 있었다. 그리고 그 답을 화산활동으로 끊임없이 새로이 만들어지는 암석과 그 풍화를 통해 형성되는 새로운 토양의 등장에서 찾고 있었다. 허튼은 토양이 끊임없이 순환하며 새로이 만들어지는 모습을 시간의 순환이라는 은유 속에서 그려 내고 있었던 것이다. 깊이가 보이지 않는 시원으로부터 가없는 미래를 상상하는 시간의 화살을 상정하는 현대 지질학의 그림자는 허튼의 글에서 볼 수 없었다.

굴드는 근대 지질학의 아버지로 그려지는 라이엘이 자신 이전의 사변적인 지구 이론가들 중 한 사람으로 버넷을 선택하여 희화화하고, 그리고 자신의 선구자로 허튼을 선택하여 영웅시하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버넷은 실제로 자연을 탐구하기 보다는 성서의 내용에 대홍수와 같은 사변을 더한 지구이론가로 그려졌다. 그리고 허튼은 실제로 지층을 살피면서 심원한 시간을 볼 수 있었던 경험과학자로 그려졌다.

그런데 라이엘 자신 역시 삽과 해머를 들고 산과 들을 누비던 야외 지질학자는 아니었다. 사실이지, 실제로 지층을 파헤치며 표지화석을 연구하는 고생물학자에게 균일론이야말로 경험적 자료를 무시하는 신화적 교리가 아닐까. 라이엘이 자신의 지질관에 대한 전폭적인 수용을 거부하는 듯한 상대방을 격변론자라 부를 때, 그의 동료 휴월은 라이엘의 관점에 uniformitarianism이라는 이름을 만들어 주었다. 유니포미테어리아니즘이라는 혀가 꼬이는 용어가 바로 동일과정설 또는 균일론으로 번역될 용어였다.

과학을 연구하는 사람에게 ‘사이언티스트’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으며, 보편중력의 법칙 같이 여러 자연현상을 설명해 줄 수 있는 좋은 과학이론이 지닌 특징에 ‘컨실리언스’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던 그 휴월이었다. 휴월은 균일론적 방법으로 지질학을 연구해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인정했으며, 균일론이라는 용어는 라이엘을 조롱하기 위해 붙인 이름은 아니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 휴월은 지질의 변화가 점진적으로 일어난다는 지질학적 사실로서의 균일론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균일론자들과 격변론자들이 이분법적으로 깨끗이 구분되지는 않았으며, 퀴비에와 같은 ‘격변론자’들도 대체로 방법론적인 균일론을 당연히 인정하고 있었다. 이들이 지질의 역사에서 급격한 변화를 읽었다면, 그 급격한 변화야말로 실제 지층 관찰의 결과에 대한 기술이었다.

굴드의 글은 사실상 라이엘의 상태의 균일론, 즉 변화를 거부하며 과거나 현재 그리고 미래가 결국은 같을 수밖에 없다는 관점이야말로 전혀 실증적이지 않은 신념이었음을 보여준다. 라이엘은 현대인으로서는 이해하기 힘들만큼 순환적 시간관에 갇혀 있었다. 라이엘은 고생대나 중생대에도 현생 동물들이 살고 있었으리라 생각했다. <지질학 원론>에서는 미래 언젠가 중생대 석탄기와 같은 시대가 도래하여 인간이 공중을 나는 익수룡을 목도할 수도 있으리라 전망하기도 한다. 방법론으로서의 균일론 뿐 아니라, 지구의 상태가 변하지 않으며 균일하리라는 경험적으로 근거가 없는 신화 또는 믿음에 갇혀 있었던 것이다. 그

렇다고 이 책에서 굴드가 라이엘의 오류를 지적하고 나서는 것은 아니다. 라이엘은 그렇게 시간의 순환이라는 믿음에 사로 잡혀 자연의 규칙성과 일양성을 표현해 내는 과학으로서의 지질학을 그려 보일 수 있었다. 현재 부정되고 있는 과학은 물론, 인정되고 있는 과학의 내용이나 활동이 흔히 종교적 또는 철학적 믿음이나 시간의 화살 또는 시간의 순환이라는 은유를 통해 만들어지고 행해진다는 점을 굴드는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이렇게 과거의 과학을 분석하는 과학사 또는 과학철학이 과학의 이해 또는 자연에 이해에 도움이 될까? 최근 번역 출판된 <온도계의 과학>에서 과학철학자 장하석은 과학의 역사나 철학적 탐구가 현대과학이 잃어버린 또는 현대과학이 주목하지 않는 영역의 이해를 더해 줄 수 있는 일종의 ‘상보적 과학’ 또는 확장된 형태의 과학행위일 수 있음을 극적으로 보여주었다.

반면 과학자로서의 굴드는 과학의 역사나 과학자들의 사상, 믿음에 관한 연구가 없이는 우리가 제대로 과학을 이해 할 수 없다고 본다. 과학의 역사나 철학은 과학행위 그 자체라는 매우 강한 주장이다. 과학의 역사나 과학의 철학이 효율적인 과학 활동과는 양립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든 적이 있다면 장하석이나 굴드의 글을 읽어 볼 것을 권한다. 쉽게 읽히지는 않지만, 그런데도 불구하고 갑자기 여러 개의 눈이 새로이 생겨나는 듯한 개명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소개도서: 스티븐 제이 굴드 지음, 이철우 옮김, <시간의 화살, 시간의 순환: 지질학적 시간의 <시간의 화살, 시간의 순환: 지질학적 시간의 <시간의 화살, 시간의 순환: 지질학적 시간의 <시간의 화살, 시간의 순환: 지질학적 시간의 <시간의 화살, 시간의 순환: 지질학적 시간의 <시간의 화살, 시간의 순환: 지질학적 시간의 <시간의 화살, 시간의 순환: 지질학적 시간의 <시간의 화살, 시간의 순환: 지질학적 시간의 <시간의 화살, 시간의 순환: 지질학적 시간의 <시간의 화살, 시간의 순환: 지질학적 시간의 <시간의 화살, 시간의 순환: 지질학적 시간의 <시간의 화살, 시간의 순환: 지질학적 시간의 <시간의 화살, 시간의 순환: 지질학적 시간의 <시간의 화살, 시간의 순환: 지질학적 시간의 <시간의 화살, 시간의 순환: 지질학적 시간의 <시간의 화살, 시간의 순환: 지질학적 시간의 <시간의 화살, 시간의 순환: 지질학적 시간의 <시간의 화살, 시간의 순환: 지질학적 시간의 <시간의 화살, 시간의 순환: 지질학적 시간의 <시간의 화살, 시간의 순환: 지질학적 시간의
            발견에서 신화와 은유>, 아카넷, 2012/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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