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칼럼

과학으로 둘러보는 장대한 인간 문명의 진보

[과학명저 읽기] 과학명저 읽기 43

얼마 전 국내 한 방송사에서 방송한, 케임브리지 대학의 과학철학자 장하석 교수의 과학철학 강연을 흥미롭게 보았다. 장하석 교수는 중학교 시절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를 읽으며 과학도의 꿈을 키웠다고 하는데, 지금 이 순간 어딘가에서도 장하석 교수의 TV 강연을 보며 과학자나 혹은 과학철학자의 꿈을 키우는 학생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미소가 지어졌다. 장하석 교수를 지적으로 자극한 <코스모스>는 세이건이 제작에 참여한 미국 PBS의 동명의 다큐멘터리에 바탕을 두고 만들어진 책으로 다큐멘터리만큼이나 인기를 누렸다.

제이콥 브로노우스키의 <인간 등정의 발자취>는 여러 면에서 세이건의 <코스모스>와 닮았다. 아니, 세이건의 책이 브로노우스키의 책을 벤치마킹했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브로노우스키는 1973년 BBC에서 방영한 동명의 13부작 다큐멘터리의 내용을 책으로 옮겨 다큐멘터리와 책 모두 큰 반향을 일으켰는데, BBC에서 다큐멘터리를 만든 팀이 미국에 건너가 만든 작품이 바로 <코스모스>였던 것이다.

 

<인간 등정의 발자취>는 원시 인류부터 현재까지 인간 문명의 장엄한 발달사를 그려낸 거대한 스케일의 책이다. 원시 인류의 등장에서부터 유목문화, 농경문화로의 발달, 석기시대와 청동기, 철기시대로의 진입까지 인류 문명의 발달사를 거시적으로 들여다보는 책의 전반부는 마치 세계사 책이나 문명사 책을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하지만 이 책에는 흔히 보던 세계사 책이나 문명사 책과 구별되는 신선한 지점이 있다. 인류 문명의 발달사를 현대 과학기술의 용어로 설명하고 있는 부분들이 그렇다.

청동에 대한 설명을 보자. 청동기가 인류 문명의 발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라는 것은 잘 알고 있겠지만, 청동이 왜 중요한가에 대해서는 그다지 알고 있는 바가 많지 않을 것이다. 브로노우스키에 따르면 구리는 제련이 비교적 쉽지만 박판처럼 생긴 결정층으로 이루어져 있어 결정층끼리의 미끄러짐 현상으로 인해 쉽게 끊어지고 무르다.

청동은 구리에 주석을 첨가한 합금으로, 잘 미끄러지는 구리의 결정층 곳곳에 주석 원자들을 박아 넣어 마치 평평한 바닥에 돌을 박아 넣은 것처럼 미끄러지는 것을 방지하게 된다. 그 결과 구리의 무른 성질을 극복한 더 단단한 합금이 만들어져 그것으로 진일보된 문명을 발전시켜 나갈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현대 과학기술로 인류의 문명 발달의 모습을 상세히 설명해 주는 것은 여느 문명사 책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모습이다. 브로노우스키의 핵심적이면서도 쉬운 설명 덕에 이 책은 각 문명의 과학기술 수준 및 과학기술 발달의 의미에 대해 이해할 수 있게 해주며, 여느 문명사에서 과학기술을 문명 발달의 배경이나 부산물 정도로 분리시켜 다루었던 것에 비해 이 책에서는 과학기술을 인류 문명의 중요한 요소의 하나로 결합시켜 놓고 있다.

또한 과학기술적 측면에 초점을 맞춰 인류 문명을 살펴보는 덕에 이 책은 단순한 연대기적 구성을 벗어나 비교적 자유로운 구성을 선보이고 있다. ‘숨겨진 구조’라는 제목의 4장을 보면 청동기, 철기에서 황금에 관한 이야기로 갔다가 연금술로, 그런 뒤에 프리스틀리와 라부아지에의 화학에서 돌턴의 원소론으로 옮겨간다.

책의 전반부가 과학기술의 용어로 인류 문명의 발달을 그려냈다면, 책의 후반부는 과학기술 자체가 주인공으로 전면에 부각되는 느낌이다. 갈릴레오, 뉴턴, 아인슈타인, 다윈, 멘델, 보어 등 과학에 혁명을 가져온 과학자들과 과학의 이야기가 중심이 되어 산업, 정치, 문화, 예술을 엮어 낸다. 이를 통해 브로노우스키는 바로 이 과학기술이 환경이라는 덫에 걸려 사는 다른 동물들과 그것을 초월한 인간을 구별하게 만들어주는 인류 문명의 가장 중요한 성과이자 문명 진화의 동력이라고 말하고 싶어하는 것 같다.

이 책이 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문명의 진보와 과학기술에 초점을 맞추다 보니 그 방향에 발맞춰 나가지 못한 사람들, 예를 들면 현재에도 유목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마치 살아있는 문명의 화석인 것처럼 다루고 있어 불편한 감이 없지 않다. 책의 후반부로 갈수록 ‘인간 등정의 발자취’를 돌아보는 범위가 문명에서 과학기술로 좁아져서 다시 과학기술을 인류 문명에서 분리시켜 내는 것 같은 인상을 주고 있다는 점도 아쉬움으로 남는다. 어쩌면 현대로 올수록 문명은 곧 과학기술이라고 브로노우스키가 말하고 싶어했을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몇 년 전 EBS에서 ‘문명과 수학’이라는 다큐멘터리를 만들어 호평을 받은 적이 있다. 브루노우스키의 <인간 등정의 발자취>처럼 세계 곳곳을 다니며 여러 문명 속에 녹아 든 수학의 역사를 다룬 작품인데, 한국에서는 드물게 이런 주제로 다큐멘터리를, 그것도 수준 높은 작품을 만들어 반가워했던 기억이 난다. 과학기술이나 수학과 같은 주제를 다루는 다큐멘터리 수작들이 더 많이 나오기를 기대하며, 그런 작품과 함께 우리에게도 브로노우스키나 세이건처럼 과학대중화를 훌륭하게 해 내는 과학자가 등장하기를 고대한다.





소개도서: 제이콥 브로노우스키, 김은국, 김현숙 옮김, <인간 등정의 발자취>, 바다출판사,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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