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과 종교의 공통점은 ‘영감과 믿음’

과학자에게 종교란?(하)

과학과 종교의 관계를 들여다보면 과학자들의 태도가 갈려짐을 알 수 있다. 사회적 문제가 주요 원인이라고는 하지만 어쨌든 과학의 이름으로 종교를 비판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신의 뜻을 알기 위해 혹은 신의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연구를 하는 과학자들이 있다. 왜 종교라는 하나의 대상을 가지고 이렇게 나눠지는 것일까.

현우식 호서대 교수는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한 파인만은 과학과 만나는 종교의 세 가지 측면을 설명했는데, 그의 분석은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고 말했다.

과학 발전의 원동력, ‘믿음’

파인만의 분류를 살펴보자. 첫 번째는 형이상학적 측면이다. 과학자들과의 갈등을 일으키는 부분이다. ‘지구는 우주의 중심인가?, 인간의 조상은 동물인가?’ 등과 같은 실재론적 문제를 과학으로 끌고 가기 때문에 싸움이 생길 수밖에 없다. 대표적으로  ‘이기적인 유전자’의 저자 도킨즈가 있다.

두 번째는 윤리적 측면이다.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부분이다. ‘자기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을 부정할 과학자가 그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파인만은 윤리적 측면에서 종교와 과학의 영역은 서로 독립적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중요한 부분은 세 번째이다.  영적 측면은 종교와 과학이 통할 수 있는 부분이자 종교의 진정한 가치를 유지할 수 부분이서 그렇다. 보통 수많은 과학자들이 발견을 할 때 ‘인스피리에이션(inspiration)’이라는 표현을 종종 하는 것을 생각해보면 이해가 된다.

오펜하이머(오른쪽)와 대화하는 파인만 (가운데) ⓒwikipedia

오펜하이머(오른쪽)와 대화하는 파인만 (가운데) ⓒwikipedia

현 교수는 “예술에서 ‘영감’을 받았다는 부분과 과학에서 말하는 ‘영감’을 받았다고 표현하는 것은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며 “이는 곧 종교에서 말하는 ‘영감’과도 다르지 않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이런 차원에서 종교와 과학은 서로 도울 수도 있다”고 덧붙여 언급하기도 했다.

 ‘영감’은 ‘믿음’과 관련 있다. “이렇게 행동하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에 대한 질문에 “이렇게 되어야 한다”라는 예상이 곧 ‘믿음’에 해당된다. 일반인들은 무심코 지나치지만 쉽게 인지되는 분야가 수학이다. 수학이 바로 ‘믿음’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먼저 증명을 하기 위해서 우리는 정의를 내려야 한다. 그런데 이 정의를 만들기 위해서 공리가 존재해야 한다. 공리가 바로 ‘믿음’이라고 할 수 있다. 공리라는 것이 증명된 것이 아니라 ‘이렇다’라고 믿고 시작하는 출발점이어서 그렇다.

과학적 실험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실험이라는 것은 증명되지 않은 것을 밝히기 위한 과정이다. 자신이 세운 가설이 맞는지 확인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예상된 결과가 나올 것이라는 ‘믿음’ 때문에 실험을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현 교수는 “실험이 실패를 해도 계속 실험을 하는 것은 바로 ‘믿음’ 때문”이라며 “이 ‘믿음’이 새로운 실험을 하게 하는 원동력이자 과학을 발전시키는 또 다른 힘”이라고 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물론 종교적 ‘믿음’과 과학적 ‘믿음’은 다르다. 과학자의 믿음은 자연의 법칙이나 우주의 원리를 알아내겠다는 ‘믿음’이다. 종교인들의 믿음은 신이라는 존재에 대한 ‘믿음’이다. 대상이 다르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믿음’이라는 말 외에는 그 어떤 단어로도 대체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아인슈타인이 종교성을 말한 것도 이런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  과학자들이 말하는 ‘우주에 대한 이해 가능성’은 증명되고 실험된 것은 아니다. 단지 이해 가능할 것이라는 ‘믿음’과 ‘영감’ 때문에 연구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아인슈타인은 “과학은 종교에 의존하여 우주를 이해할 수 있는 ‘믿음’을 소유하고 종교는 과학에 의존하여 경이로운 우주의 질서를 발견한다.”고 주장을 했다.

종교와 과학 협력 가능

여기서 또 다른 궁금증이 생긴다. 종교와 과학이 ‘믿음’과 ‘영감’을 공유한다면 ‘협력’도 할 수 있을까에 대해 의문이 든다. 현 교수는 이 질문에 “과학과 종교의 협력은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그 협력의 대상 중 하나를 ‘무한에 관한 문제’라고 짚어 설명했다.

유한한 존재인 인간이 무한을 다루는 것 자체가 모순이다. 그러나 알지 못하는 세계에 무한이 있고 거기에 중요한 진리가 있다고 보기 때문에 ‘무한’은 과학에서 중요한 부분이다. 실상 물리학에서 ‘무한’을 빼면 설명이 되지 않는 것이 다수이다. 종교에서 무한에 대하여 ‘신’이라는 이름을 쓰고 있다고 해도 두 영역은 서로 협력할 수 있다. 그리고 ‘시작과 끝’도 종교와 과학이 머리를 맞대고 얘기할 수 있는 문제이다. 우주의 시작과 끝을 얘기하려면 종교적 차원의 아이디어와 만나기 때문이다.

풀어 설명하자면 종교는 알 수 없는 세계를 말하지만 사람들은 알고 싶어 한다고 할 수 있다. 과학도 미지의 세계의 가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중요한 진리가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에 둘 다 그 모르는 세계를 향하여 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마디로 과학과 종교는 다른 접근을 할 수는 있지만 같은 길을 가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두 영역이 서로 상생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우선 편견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 중요하다. 편견에서 벗어나야만 종교인의 본연의 자세, 과학자의 본래의 마음으로 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현 교수는 “편견에서 자유로워지기 위해 과학자에게는 지성의 겸허함, 종교인에게는 영혼의 겸허함이 필요하고 문제를 해결하기까지의 인내도 있어야 한다”며 “이 두 가지만 있다면 우리가 지동설을 인정하는 것 같이 진화론의 문제도 해결될 것이고, 다른 기타의 것들도 원만하게 풀어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겸허함과 인내’를 가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서로가 서로의 영역을 인정해주려는 노력이 우선시 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함부로 서로 영역을 침범하면서 비난하는 일이 생겨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현 교수도 “시스템과 시스템끼리는 소통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종교를 시스템으로 봐주면 갈등이 생겨나지 않을 것”이라면서 “하나의 시스템으로 인정하고 동시에 어떤 시스템도 완전하지 않는다는 겸허한 마음을 종교인과 과학자들이 가진다면 과학과 종교는 서로 발전에 도움을 주는 관계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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