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념을 과학화하는 시대로

융합의 시대, 인지과학이 떠오르는 이유 (하)

1970년대 들어서면서 인공지능의 실현 가능성 등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커지면서 이에 대한 많은 사람들의 환상이 깨지기 시작했다. 문제는 인공지능과 관련된 연구 자체도 움츠러들었다는 점이다.

이후 오랜 시간 과학계 수면 아래서 잠행하던 인지과학은 2003년이 되어서야 다시 집중 관심을 받게 되는데, ‘NBIC(나노-생명-정보-인지) 융합 미래 테크놀로지’라는 결과물 때문이었다.

미국과학재단(NSF)이 2년여에 걸쳐 미국 최상위급 과학기술자들로 구성된 위원회의 연구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이 연구결과는 전 세계적으로 융합 과학, 융합 테크놀로지, 학문간 융합 등의 논의를 촉발시켰다. 뿐만 아니라 융합에 있어서 인지과학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게 해준 연구물이었다.

새로운 과학개념의 패러다임, ‘NBIC’

‘NBIC’는 개념부터 기존 과학기술과 달랐다. 전통적으로 물질 및 기계 중심의 하드웨어적 과학기술 개념과 연구가 아닌 인간의 뇌, 심리적 특성, 문화사회적인 특성 등이 고려된 융합 개념이었다.

’인간의 퍼포먼스 증진을 위한 융합과학기술(Converging Technologies for Improving Human Performance)‘이라는 NSF의 융합과학기술 개발의 지향 목표를 봐도 잘 알 수 있다. 과학 개념 자체의 패러다임 변화가 시작된 셈이었다.

▲ 사이버네틱스 연구자들은 기본 인간의 마음을 하나의 상징조작체계로 개념화할 수 있다고 봤다. ⓒScienceTimes


이 변화의 핵심 중심에는 ‘사람과 개념’이 놓여있다. 사이버네틱스 연구자들은 기본 인간의 마음을 하나의 상징조작체계로 개념화할 수 있다고 봤다. 이는 정보처리 관점을 결합시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마치 컴퓨터가 데이터를 처리하는 것과 비슷하게 여겼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외부의 사물을 어떤 상징을 받아들이는지에 대한 개념 정의가 중요해졌다.

그런데 인간의 생각들이 어떤 상징으로 저장되고 표현되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인문학의 도움이 필요하다. 미래 테크놀로지에 중요한 발상 전환의 힘 원천 역시 인문학에서 나온다. 하지만 인문학과 과학 혹은 공학은 학문간 간극이 크다. 인지과학은 두 학문의 간극을 메울 수 있는 분야이다.

성균관대 인터랙션사이언스학과 조광수 교수는 “인지과학 자체가 ‘시’를 쓰는 인간의 마음을 과학적으로 연구하는 학문”이라며 “그러기 때문에 인지과학은 이런 인문학적 성과를 테크놀로지와 연결하는 다리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애플, 기업에서 최초로 UX를 도입

인지과학은 아직 폭넓게 확산된 것은 아니지만 이미 여러 분야에서 쓰이고 있다. 허브 사이먼의 의사결정론은 인간의 행동을 연구한 이런 인지과학의 대표적 결과물이다. 다니엘 캐너만의 행동경제학은 인간의 소비행위에 인지과학적 연구 결과이다.

가장 피부로 느낄 수 있는 인지과학의 예는 애플의 UX이다. 애플의 전기전자를 연구해온 단노만은 애플의 부사장이 되고 난 후, 사용자 경험을 말하는 UX(User Experience) 분야를 기업에 처음으로 도입했다. 그는 인간의 ‘주의’와 ‘메모리’를 연구하는 사람으로 세계 10대 디자이너이다.

비록 인간의 학습이나 추론, 창의적 능력에는 크게 부족하지만 인공지능이나 기계학습 분야에서도 비약적 성장을 하고 있다. 기계학습은 초기 인지과학과 인공지능의 맥을 같이했다. 1950년대 뇌의 학습 기능을 모델화한 퍼셉트론기반 기술을 바탕으로 1980년대 신경망기반 기술, 확률통계 기반 기술로 발전했다.

최근에는 인터넷과 웹 덕분에 검색 같은 데이터마이닝 산업으로도 발전했다. 잘 알려진 애플 시리(Siri), 아이비엠 왓슨(IBM Watson) 등의 핵심 원천기술 역시 기계학습이다.

▲ 인지과학은 산업의 형태도 변화시키고 있다. 과거 제조업이 산업을 이끌어나갔다면 지금은 인지과학 연구를 하는 IT 회사들이 최첨단 산업으로 전통 제조업을 이끌어내고 있다. ⓒScienceTimes


인지과학은 산업의 형태도 변화시키고 있다. 과거 제조업이 산업을 이끌어나갔다면 지금은 인지과학 연구를 하는 IT 회사들이 최첨단 산업으로 전통 제조업을 이끌어내고 있다. 구글이 자동차와 안경을 생산하고 애플이 TV를 만들어내는 것들이 대표적이다. 

인지분야 빼놓고 ‘NBIC’ 논의 시작

그렇다면 우리나라 상황은 어떨까. 우리나라도 미국에서 ‘NBIC’ 개념이 나오면서 이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문제는 C(인지)가 빠진 상태로 진행되고 있었다는 점이다.

조 교수는 “인지과학이 빠졌다는 것은 개념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와 사람에 대한 생각을 갖고 있지 않았다는 뜻”이라며 “이는 융합된 과학기술이 나아갈 방향성을 잃어버린 것으로 이제까지 NT, BT, IT만 거론되어 왔던 것도 이 때문”이라고 언급했다.

인지분야 없이 진행된 우리 과학기술은 아이폰의 등장으로 충격을 받게 된다. 인간에 대한 생각 그리고 그 생각을 개념화한 제품이어서였다. ‘융합’, ‘통섭’이란 말이 세간에 유행처럼 확산된 데에도 아이폰의 영향이 컸다.

구글의 서비스나 상품을 보면 인지과학 분야를 등한시 해왔다는 사실이 더 뼈아프게 느껴진다. 우리보다 한글과 관련된 높은 수준의 서비스와 기술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구글에서 우리의 생각 방법에 대한 과학적 연구가 더 많이 진척되고 있다는 뜻이라고 할 수 있다. 다행히 근래 융합에 대한 논의가 활발히 이루어지면서 인지과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조 교수는 “우리나라 언어를 연구하면 인문학이고 프로그래밍하면 공학이라는 인식이 강해 두 분야가 함께 연구하는 분위기 조성 자체가 어려워 인지 분야와 융합에 대한 연구가 더뎌지게 된 것”이라고 언급하며 “인지과학과 융·복합 연구를 좀 더 독립적 분야로 인정해 활성화한다면 발전 속도가 훨씬 빨라질 수 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4827)

뉴스레터 구독신청
태그(Tag)

전체 댓글 (0)

과학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