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une 19,2019

1990년대: 번역과 창작에서의 본격적인 도약기 (3)

과학소설 출판기획자 및 번역자들의 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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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고 건즈백(Hugo Gernsback)의 성을 음차한 강수백이라는 필명으로도 알려진 김상훈은 해외 유학에서 돌아온 뒤 과학소설 번역에 뛰어들었다. 그는 순문학계의 문인들과 전문번역가들이 예술적 소명의식 없이 아르바이트 일거리 삼아 과학소설을 날림 번역하던 관행을 바로잡고 원전이 지닌 문학적인 맛을 최대한 되살리려 애쓴 우수한 번역자이자 출판기획자다. 김상훈은 어려서부터 과학소설을 숙독해온 독자답게 해당 장르에 대한 식견이 풍부할 뿐 아니라 장르팬으로서의 소속의식이 투철하다는 점에서 이제까지의 대다수 번역자들과 궤를 달리한다. 이러한 애정과 맞물린 뛰어난 번역 솜씨는 그가 우리말로 옮긴 작품이라면 원작자가 누구냐를 불문하고 일단 안심하고 읽어도 되겠다는 독자들의 찬사를 낳았다. 김상훈은 여러 출판사들과의 산발적인 작품 출간보다는 한두 군데와 총서 형태로 책을 내는 시스템 어프로우치를 선호한다는 점에서도 후배 SF출판 기획자들과 번역자들에게 모범적인 사례를 남겼다.

▲ 과학소설 번역의 질을 끌어올린 김상훈

이 시기에 김상훈과 상호작용하여 뛰어난 성과를 낸 총서가 시공사에서 그리폰북스라는 타이틀로 내놓은 과학소설 전집이다. 이 총서는 국내에 최초로 소개되는 해외 걸작 장편이 대부분이라 독자들의 큰 호응을 얻었다. 오늘날 이 총서의 일환으로 나온 단행본들이 귀한 골동품 취급을 받을 정도로 이 목록에는 과학소설 역사상 주요한 의의를 지닌 작품들이 수두룩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하야가와 SF문고처럼 장수하지 못하고 결국 단종 되었는데, 이에 대해 훗날 홍인기는 세 가지 이유를 꼽았다. 첫째로 이렇다 할 일관성이 없이 좋은 작품이라면 무조건 한데 묶어버리는 바람에 총서로서의 특색 있는 칼라가 부족했고, 둘째 상품성(시장성)보다 출판기획자 개인의 선호도가 짙게 반영되었으며, 셋째 출판사 내부 사정으로 총서의 신작 출간 속도가 느리고 불연속적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특히 세 번째 요인이 가장 결정적으로 해를 끼쳤다고 보았다.

▲ 홍인기가 기획 번역한 <세계 휴먼 SF 걸작선>

대학시절부터 번역소모임 ‘멋진 신세계’에서 활동했던 홍인기는 <세계휴먼SF걸작선; 1994년>과 고려원미디어에서 펴낸 일부 과학소설 걸작선의 출판기획과 번역을 주도했다. 그 또한 박상준과 김상훈 못지않게 과학소설 장르에 대한 남다른 애정과 깊이 있는 식견을 지녔으며 다른 누구보다 해당 장르의 속성과 정의를 팬덤 내에 널리 전파하는데 주력했다. [월간 SF웹진]의 주요 필자였으며 웹진이 폐간된 후에는 시공사의 온라인 저널 [이매진]에 SF 컬럼을 정기적으로 기고했다. 직장을 그만두고 미국 유학길에 오른 뒤에도 온라인을 통해 과학소설 팬덤을 계몽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특히 홍인기는 과학소설에 대한 독자대중의 올바른 관(觀) 확립에 관심이 많다. 그가 규정하는 과학소설 개념이 얼마나 타당성이 있느냐와 별개로, 과학소설에 대한 홍인기의 다분히 엄격한 잣대는 필자를 포함하여 같은 논제에 관심을 표명하는 다양한 이들과 건강한 토론의 장을 열게 했다. 아래의 주장이 한 예다.

“…(중략) 우리는 과학소설이 단지 세상을 바라보는 또 다른 방식이 결코 아님을 살펴보았다. 과학소설은 과학과 기술의 발전이 사회, 인류, 지구, 우주 전체에 걸쳐 거시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치며, 그 영향 속에서 인간이 어떤 변화를 겪는가를 다룬다. 그러한 소재를 다루는 양식은 과학소설의 보다 중요한 특질이다. 과학소설은 일반문학 작품에서 거둘 수 없는 다양한 해석의 공간을 남겨놓는다. 또한 그 공간을 채워나가는 해석의 행위 (독서행위) 역시 교조주의적인 “정합성”을 찾으려는 노력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그러므로 과학소설은 세상을 바라보는 또 다른 방식이 아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무한히 많은 경우의 수를 포함한 방식이다.” <홍인기>

위의 주장은 과학소설이 인간과 세상을 담아내는 다양한 문학형식 가운데 하나라는 필자의 견해에 대해 홍인기가 순문학 대비 과학소설 우월론자의 입장에서 반박했던 논지의 요점이다. 그는 과학소설과 다른 문학장르 간의 등가원리에 입각한 필자의 주장이 언뜻 보아 개방적인 듯 보이나 진실이나 본질에 접근하지 못하기에 한계를 지닌다고 비판한 바 있다. 필자의 논지대로라면 과학소설이란 그저 다루는 소재가 약간 특이하고 그렇다보니 순문학에 비해 다소 색다른 유형의 기쁨을 안겨주긴 하나 큰 틀에서 보건대 기존의 순문학과 별반 다를 것 없다는 식으로 결론이 유도된다는 것이 홍인기의 주장이다. 한 마디로 그는 “다양성의 인정”이란 어정쩡한 모토로는 핵심에 다가가기 어렵다고 잘라 말한다. 과학소설이 그저 색다른 장르라는 이유만으로 다양성이란 명분 아래 도덕적인 존중을 요구하는 것은 논리적이지 못하며 자칫 오히려 더 구차해질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대신 홍인기는 순문학을 읽는 방식과 과학소설을 읽는 방식의 차이를 구체적으로 비교함으로서 후자가 전자보다 훨씬 우월한 문학형식임을 증명하는 편이 보다 설득력 있고 실용적이라는 입장이다.

▲ 홍인기의 과학소설 우월론에 대한 필자의 반박이 담긴 에세이 “과학소설 문학의 가치와 미래”가 실린 [어린이책이야기]

이에 대해 필자는 계간 [어린이책이야기] 2010년 겨울호에 기고한 에세이 “과학소설 문학의 가치와 미래”을 통해 나름 반론을 편 바 있다. 이 글에서 필자는 과학소설이 순문학을 뛰어넘는 우월한 문학양식이라는 견해는 무리가 있는 일방통행 논리라는 논지를 폈다.

“과학기술 그리고 나아가서 거대담론을 바탕에 둔 과학소설적 문학양식이 아니면 인류와 사회 그리고 개인의 비전을 제대로 담을 수 없다는 주장이야말로 과학소설의 본질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비아냥거리는 순문학측의 오류와 무엇이 다를까? 아이작 아시모프의 단편소설 <전설의 밤>에서처럼 천년마다 그 동안 쌓아올린 문명이 붕괴하고 다시 암흑시대가 도래 한다 쳐보자. 그럼 과학기술의 복구와 재발달을 통해 문명이 회복되고 그 와중에 과학소설이 다시 문학계로 돌아오기 전까지는 과학소설이 아닌 문학은 우주와 인간에 대한 성찰을 제대로 못해낸 채 계속 변죽만 울리다 말까? 36년간 일제 치하에서 말과 글을 잃었던 우리민족의 아픔을 <비명을 찾아서> 같은 과학소설 형식으로 담아내야만 일반 순문학 작품들을 제치고 단연 독보적인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일까?” <고장원>

이처럼 상반된 논의에서 정답을 찾는다는 것은 무의미할 수 있다. 기본적으로 과학소설 문학과 그것을 둘러싼 세상을 연관짓는 양자의 시각차가 명확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학소설이 다른 어떤 문학보다 월등히 우월하다는 견지에서 그 잠재력과 가능성을 열어 놓은 홍인기의 입장은 폴란드 작가 스타니스와프 렘의 이상적 과학소설관에 견줄만하다는 점에서 국내의 과학소설 작가들이 질적 도약을 위해 한번 곱씹어 볼만한 목소리라고 생각된다.

  • 고장원 SF 평론가·작가, <세계과학소설사> 저자 다른 기사 보기
  • 저작권자 2011.07.25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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