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cember 11,2019

문고판 과학소설 번역물의 빛과 어둠

청소년 과학소설 시장의 외형적 성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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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의 가장 두드러진 양상은 청소년용 과학소설 시장의 외형적인 본격 성장이다. 특히 출판시장이 양적으로 확대되며 청소년 출판시장 역시 급물살을 탔다.

후자에 편입되어 있던 청소년용 과학소설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광음사, 계림출판사, 서문당, 교학사, 양문사, 장원사, 동서추리문고, 아이디어 회관 등에서 청소년을 대상으로 다수의 번역소설과 일부 창작소설을 문고판으로 펴냈다.

그러나 이러한 양적 풍요는 지나친 중복출판과 날림번역 그리고 원작의 무단훼손이란 본질적인 문제를 안고 있었다. 예를 들어, 1970년대에 ‘해저 2만 리그’는 17군데에서, ‘80일 간의 세계일주’는 15군데에서 중복 출판되었다1.

우리나라가 저작권협약에 가입하지 않은 시기라고는 하나 일본어 중역판을 본문은 물론이거니와 번안제목과 시리즈의 출판기획 컨셉까지 고스란히 옮기는 행태는 이후 우리나라 청소년 과학소설 번역시장의 고질적 병폐로 자리 잡았다.


토씨 하나 바꾸지 않고 무단복제

장원사의 ‘어린이왕국 SF문고(1977년)’는 이러한 예의 극단을 보여준다. 이 문고는 일본의 ‘SF공포 시리즈 전6권(1974년)’을 표절하는 과정에서 중역본의 제목과 삽화까지 있는 그대로 가져다 썼다. 특히 일본 출판사가 영미권 원작들 제목을 임의로 바꾼 것까지 토씨 하나 바꾸지 않고 그대로 우리말로 옮겨 실소를 자아낸다.

예컨대 H. G. 웰즈의 ‘두 세계 간 전쟁(The War of the Worlds; 1898년)’은 우리나라에서는 ‘우주전쟁’이란 이름으로 의역되는 사례가 많지만, 장원사의 SF문고에서는 일본어 번역판 제목을 그대로 옮겨왔다. 그 결과 후쿠시마 마사미(福島正実)가 일역한 ‘화성인간 우주대전쟁(火星人間 宇宙大戦争)’은 박홍근이 번역한 ‘화성인간’이 되었고 시리즈의 다른 작품들도 같은 선례를 따랐으니 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줄어드는 남자(The Incredible Shrinking man; 1956년)’는 가가미 사부로(各務三郎)의 일역을 이원수가, ‘트리피드의 날(The Day Of The Triffids; 1951년)’은 아오끼 히데오(青木日出夫)의 일역을 이인석이, ‘도노반의 뇌(Donovan’s Brain; 1942년)’는 오토모 마사시(大伴昌司)의 일역을 박홍근이, ‘펠루시다(Pellucidar)’ 시리즈 첫 권 ‘지구 중심에서(At the Earth’s Core; 1914년)’ 는 히로시 난잔(南山宏)의 일역을 이인석이, ‘거대인간 악마의 작전’은 야스시 류(安竜二郎)의 일역을 이원수가 중역하였다.

이 문고판의 편집위원이자 번역자들 가운데 이원수와 박홍근 그리고 이인석 등은 당시 한국아동문학협회 회장과 부회장 그리고 이사 직함을 갖고 있었다는 점에서 저작권에 대한 최소한의 이해조차 부족했던 현실을 보여준다.

과학소설 성인독자층 일구는 데 기여

그러나 번역소개 과정에서의 불법과 탈법이 마구잡이로 저질러진 시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때의 번역물이 1990년대 이후의 과학소설 성인 독자층을 일구는데 기여한 공을 간과할 수 없다는 점은 아이러니다. 오늘날 삼사십 대의 과학소설 독자들 및 작가들, 출판기획자 그리고 번역자들 가운데 1970년대에 유소년기를 거치며 청소년용 과학소설에 심취했던 이들이 적지 않은 까닭이다.

비록 십중팔구 일본어 중역판인 데다 번안에 가까울 만치 원작을 훼손한 작품들이 부지기수였지만 이 무렵 대한민국의 유소년들은 과학소설이란 새로운 문학형식과 문화양식에 매료됨으로써 또 다른 해외 작품의 소개를 기대하거나 혹은 자진해서 개척하는 길을 밟게 되었던 것이다.





1. 대중문학연구회 편, <과학소설이란 무엇인가>, 국학자료원, 2000년, 78쪽)

  • 고장원 SF 평론가·작가, <세계과학소설사> 저자다른 기사 보기
  • 저작권자 2011.05.23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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