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cember 15,2019

우리 몸의 주인이 호르몬이었다?

2019 우수과학도서 / 크레이지 호르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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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2월 세계적인 육상선수인 캐스터 세메냐가 ‘여성인지 남성인지’를 판단하는 재판이 열렸다. 세메냐는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 여성 육상선수로 활약했지만, 남성호르몬이 다른 여성에 비해 약 세 배가량 높은 것으로 밝혀져 큰 논란을 일으켰다. 국제육상경기연맹은 세메냐 사태를 겪은 후 새로운 규정을 발표했다.

염색체를 통해 성별을 구분하던 기존 방식을 폐지하고, 남성호르몬 수치에 따라 여성 선수의 출전 자격을 결정하겠다고 발표한 것이다. 하지만 세메냐는 자신이 여성으로 태어나고 자랐으며, 호르몬 수치로 여자가 아니라고 판단하는 것은 ‘여성 차별’이라고 비판했다.

이 논란은 인권 문제와 함께 복잡하게 얽혀 애초 3월로 예정됐던 판결이 4월로 연기됐다. 정말 호르몬 수치로 성별을 구분할 수 있는 걸까? 그렇다면 호르몬은 성별 결정에 얼마나 영향을 미치는 걸까?

‘크레이지 호르몬‘ / 랜디 허터 엡스타인 지음, 양병찬 옮김  ⓒ동녘사이언스

‘크레이지 호르몬‘ / 랜디 허터 엡스타인 지음, 양병찬 옮김 ⓒ동녘사이언스

‘크레이지 호르몬’은 호르몬이 성 분화(sex differentiation)에 어떤 영향을 얼마나 미치는지 알려주며 이 물음에 관한 답을 제시한다. 또한, 남성도 여성도 아닌 간성인(intersex)들의 삶을 보여줌으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남성과 여성’이라는 이분법적인 성별 시스템을 고찰하게 한다.

성별뿐만이 아니다. 이 책에서는 호르몬이 키, 질병, 증오나 사랑과 같은 감정, 포만감, 성욕 등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과학적으로 탐구한다.

기존에 출간된 호르몬 관련 도서들이 대부분 ‘어떻게 건강해질 수 있을지’, ‘어떻게 질병을 극복할 수 있을지’에 초점을 맞춰 호르몬을 이야기했다면, 이 책은 호르몬이라는 존재 자체에 초점을 맞춘다. 인간을 구성하는 다양한 요소를 호르몬의 관점에서 돌아보는 과학서라고 할 수 있다.

지금의 내분비학계를 만든 원더 우먼들

호르몬이 돌팔이 의학에서 가장 중요한 전문 의학이 되기까지, 수많은 과학자들의 끈기가 필요했다.

놀라운 발견을 이뤄낸 과학자들을 한 명씩 발견하는 것도 이 책을 읽는 묘미 중 하나다. 특히, 저자는 자신 또한 여성 의학도이자 과학도로서, 성차별을 딛고 내분비학계에서 큰 업적을 세운 여성 과학도들을 소개한다.

‘크레이지 호르몬’에서는 여성 과학자들의 업적을 소개하고 있다.

‘크레이지 호르몬’에서는 여성 과학자들의 업적을 소개하고 있다.  ⓒ 게티이미지

그 중 한 명이 바로 호르몬 측정법을 발명한 로절린 얠로다. 오랜 기간 호르몬은 너무나 미량이기에 ‘측정할 수 없다’는 상식이 지배했다. 그러나 얠로는 방사면역측정법(RIA)이라는 호르몬 측정법을 고안해, 호르몬을 혈액 1밀리리터당 ‘10억 분의 1그램’ 수준까지 측정할 수 있도록 했다. 이 방법은 치료법도 아니고 단지 무언가를 측정하는 방법일 뿐이지만, 이 측정법 덕에 수많은 바이러스를 탐지할 수 있었으며, 수많은 치료법이 개발될 수 있었다.

임신호르몬인 사람융모성생식샘자극호르몬(hCG)를 발견하고 이름 붙인 것도 조지아나 시거 존스라는 여성 과학자다. ‘무엇이 임신호르몬을 분비하는가’는 의학의 가장 큰 미스터리 중 하나였으며, 뇌하수체가 임신호르몬을 분비한다는 잘못된 상식이 지배했다. 그런데 존스가 임신호르몬을 분비하는 것은 뇌하수체가 아니라 태반임을 증명해냈다.

저자는 한 인터뷰에서 여성 과학도가 더욱 당당히 설 수 있는 과학계가 되기를 바란다고 힘주어 말하며 앞으로도 의학의 역사 속에 숨어 있는 여성 과학자들의 업적을 밝힐 나갈 예정이다.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호르몬

저자는 호르몬을 ‘가장 광범위한 과학’이자, ‘가장 인간다운 과학’이라고 말한다. 과연 호르몬은 어떤 존재이기에 인간답다는 걸까?

인체 내에는 호르몬을 분비하는 분비샘이 아홉 개가 있으며, 지금까지 밝혀진 호르몬의 종류만 수십 가지다. 이러한 호르몬은 사춘기, 신진대사, 행동, 수면, 기분 변화, 면역, 수유, 모성애, 성(gender) 등을 통제한다. 그야말로 우리의 모든 것을 통제한다고 할 수 있다.

식욕을 억제하는 호르몬인 렙틴을 발견한 제프리 프리드먼은 “우리는 뭔가를 마음대로 조절하며 살고 싶다는 헛된 욕망을 품고 있다”라고 말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식사량을 줄이면 체중을 줄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 행동의 밑바탕에는 식욕, 성욕, 수면욕 등을 충족하고자 하는 기본적 충동이 도사리고 있으며, 이 충동의 밑바탕에는 호르몬이 깔려 있다.

호르몬은 행동, 수면, 기분 변화 등 우리의 모든 것과 연계되어 있다.  ⓒ 게티이미지

호르몬은 행동, 수면, 기분 변화 등 우리의 모든 것과 연계되어 있다. ⓒ 게티이미지

즉, 인간의 행동과 충동을 조절하는 것이 호르몬이기에, 우리가 무엇인가를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신체뿐만 아니라 기분과 감정마저 호르몬에 의해 통제되고 있다니, 호르몬은 우리와 함께 살아가고 호흡하는 동반자와 같은 존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는 ‘인간을 진정 인간답게 만드는 것’이 흔히 사랑이나 자비로움, 혹은 생각이라고 말하곤 한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의 뒤에 호르몬이 존재한다면, 진정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은 호르몬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가 호르몬을 더욱 자세히 들여다봐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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