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cember 13,2019

원생생물학 창시자가 발견한 기생충

노벨상 오디세이 (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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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는 흔히 거북하거나 어려운 일로 진땀을 뺄 때 ‘학을 떼다’라고 표현한다. 여기서 ‘학’은 학질(瘧疾), 즉 말라리아를 가리킨다. 말라리아원충을 지닌 학질모기에 물리면 모기 침샘에 있던 원충이 간으로 들어가 증식한다.

이처럼 간에서 잠복기를 보내며 일정 수준으로 그 수를 늘린 원충은 적혈구로 침입해 더욱 번식하게 된다. 이후 원충은 적혈구를 깨고 나오는데, 이때 말라리아의 주증상인 발열이나 오한이 발생하게 된다.

말라리아가 기생원충에 의한 질환이라는 사실을 처음 밝힌 이는 바로 원생생물학의 창시자인 샤를 루이 알퐁스 라브랑이다. 그는 1845년 6월 18일 프랑스 파리의 의사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모두 의료인이었으며, 고위 군사령관의 딸이었던 어머니는 대학 교수였다.

원생생물학의 창시자인 샤를 루이 알퐁스 라브랑은 말라리아가 기생원충에 의한 질환이라는 사실을 처음으로 밝혔다. © public domain

원생생물학의 창시자인 샤를 루이 알퐁스 라브랑은 말라리아가 기생원충에 의한 질환이라는 사실을 처음으로 밝혔다. © public domain

파리에서 교육을 받은 라브랑은 아버지의 직업을 따르기 위해 1863년 스트라스부르의 국립보건대학에 입학해 4년간 교육과정을 밝은 후 시립병원에서 레지던트로 일했다. 1870년 프랑스와 독일 간의 전쟁이 발발했을 때 군의관 소령이었던 그는 응급실로 파병되었다.

1874년에 육군 군의학교 교관이 된 그는 1878년 유년 시절에 잠깐 살았던 알제리로 파견되어 1883년까지 근무하게 된다. 그가 말라리아원충을 발견한 것은 바로 이곳에서였다. 알제리로 간 이듬해인 1879년 육군병원에 입원한 말라리아 환자의 혈액에서 검은 입자를 발견한 것.

예리한 관찰력으로 말라리아 원충 발견해

멜라닌이라고 불리던 그 입자를 연구하던 중 기생충이 관련된 것으로 추정되는 개체를 찾아냈다. 1880년 11월에 라브랑은 그 내용을 프랑스 의학학회에 보고서로 제출했다. 하지만 라브랑의 보고서를 믿는 과학자들은 거의 없었다.

그는 보다 심층적인 연구를 위해 1882년 이탈리아로 향했다. 그리고 로마의 한 병원에서 알제리 환자와 동일한 개체를 지닌 환자를 찾아내는 데 성공한 것. 이후 연구를 통해 그는 자신이 혈액 속에서 발견한 기생충이 말라리아의 원인이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기생충은 적혈구에서 성장하면서 적혈구를 파괴하는데, 그 과정에서 혈구 안의 적색 색소가 검은 입자로 변한다는 사실을 알아낸 것이다. 그는 480명의 말라리아 환자를 조사하며 그 기생충의 형태 및 특징 등을 정리한 책을 1884년에 출간했다.

라브랑은 그 기생충이 환자의 몸 밖에서 살다가 모기의 체내로 들어가 1차 성장한 다음 모기가 사람을 물 때 사람에게 감염된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자신이 발견한 기생충을 원생동물과로 분류했다.

그가 말라리아원충을 발견할 당시 사용한 현미경의 배율은 매우 낮았다. 또한 그때에는 염색법도 없던 시절이어서 혈액에서 말라리아 기생충의 존재를 확인하기란 매우 어려웠다. 즉, 예리한 관찰력을 가지지 않고서는 도저히 이룩할 수 없었던 연구 성과였던 셈이다.

그런데 1898년에 영국의 열대병학자 로널드 로스는 모기가 말라리아 전파와 관계있다는 라브랑의 가설이 사실임을 입증했다. 로널드 로스는 이 공로로 1902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했으며, 알퐁스 라브랑 역시 그보다 늦은 1907년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약 30가지의 트리파노소마 연구해

라브랑의 노벨상 수상 업적은 ‘질병이 일어날 때의 원생동물의 역할에 관한 연구’로 명시됐다. 그가 발견한 말라리아원충의 연구 업적이 뒤늦게 인정받은 데도 그 원인이 있지만, 말라리아 외에도 원생생물과 관련된 질병에 대한 그의 연구 성과가 엄청나기 때문이다.

라브랑은 1897년 군에서 제대한 후 파스퇴르연구소에 들어가 다른 원생동물에 의해서 발생되는 질환에 대해 집중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했다. 원생생물과 관련된 질병 중 대표적인 것이 트리파노소마병이다.

트리파노소마라고 불리는 나선 모양의 작은 기생충으로 인해 발병하는 이 병은 파리가 동물을 무는 과정에서 전염돼 영양, 사슴, 말, 낙타, 당나귀 등의 동물을 황폐화시킬 만큼 위력을 떨쳤다. 체체파리의 흡혈로 인체에 침입하여 발병하는 수면병도 트리파노소마의 대표적 질환 중 하나다.

라브랑은 토끼, 말, 소, 쥐를 비롯해 조류 및 어류, 파충류, 그리고 수면병의 원인이 되는 트리파노소마를 연구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약 30가지의 트리파노소마를 연구했는데, 다른 연구원들과의 협력을 통해 수많은 논문을 발표하는 등 그 어떤 연구자보다 새로운 종을 많이 발표했다.

이 같은 업적들은 라브랑에게 원생생물 병리학의 창시자라는 타이틀을 안겨주기에 충분하다. 그는 노벨상 상금의 절반을 파스퇴르연구소에 기부해 열대병연구소를 세웠으며, 1908년에는 희귀병병리학회를 설립해 12년간 이끌었다.

무려 27년 동안 원생생물에 관한 연구를 이어간 그는 몇 개월간 지속된 질병으로 인해 1922년 5월 18일에 7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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