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vember 14,2019

군장의 적이 가수분해라고?

산을 촉매로 수분이 폴리우레탄 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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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 차 예비군 A 씨는 예비군 훈련 중에 황당한 일을 겪었다. 분명히 집에서 신고 나왔을 때는 이상이 없던 전투화 밑창이 훈련 중에 조금씩 부스러져 나가다가 그날 하루를 버티지 못하고 완전히 떨어져 나가 버린 것이다. 이런 사람들이 어쩌다 한둘이면 모르겠는데, 유감스럽게도 꽤 많았다. 인터넷에 검색해 봐도 이런 사고를 겪었다는 증언을 꽤 흔하게 볼 수 있다.

핑계 없는 무덤 없다고, 모든 일에는 원인이 있다. 이 황당한 사고의 원인은 대체 무엇인가?

일단, 이런 사고를 일으킨 전투화는 거의 모두가 사출화(射出靴)라고 불리는 전투화였다. 그리고 거의 모두가 생산된 지 5년이 넘은 전투화였다. 여기서 사출화, 그리고 경년 변화에 연관된 뭔가가 이런 희한한 사고의 원인임을 짐작할 수 있다.

지난 1999~2009년에 걸쳐 보급되었던 해병대용 사출화. 육해공군용 사출화도 갑피가 유광 가죽으로 되어 있다는 점을 제외하면 같다. 폴리우레탄제 밑창을 사용, 착용감이 뛰어난 반면 가수분해에 취약했다. Ⓒ이동훈

지난 1999~2009년에 걸쳐 보급되었던 해병대용 사출화. 육해공군용 사출화도 갑피가 유광 가죽으로 되어 있다는 점을 제외하면 같다. 폴리우레탄제 밑창을 사용, 착용감이 뛰어난 반면 가수분해에 취약했다. Ⓒ이동훈

그렇다면 사출화란 어떤 신발인가? 2011년부터 현재까지는 우리 군에 기능성 전투화가 보급되고 있다. 그러나 1999년부터 2011년까지 군의 전투화는 합성고무 밑창을 제봉과 못질로 고정하는 방식인 봉합화(縫合靴), 그리고 폴리우레탄 고무 밑창을 사출성형으로 통짜로 뽑아낸 문제의 사출화, 두 가지가 보급되었다.

2009년부터 2011년까지 밑창을 접착제로 고정한 접착화(接着靴)도 잠시 보급되었지만 기능성 전투화가 나온 이후에는 세 종류 모두 더 이상 군용으로 생산 및 보급되지 않는다.

등장 초기 사출화의 인기는 대단했다. 일단 봉합화와는 달리 사출화는 뒷굽 고정용 못을 박지 않았다. 봉합화는 못 구멍으로 잔돌이 들어간다. 그리고 오래 신어서 전투화 굽이 닳아 잔돌이 위로 밀리면 못이 신발 속으로 필요 이상으로 깊이 박혀 착용자의 발을 찌르는 문제가 있었다. 그러나 뒷굽 고정용 못이 아예 없는 사출화는 그런 문제가 원천봉쇄되었다.

게다가 딱딱하기가 마치 철판 같았던 봉합화의 합성고무제 밑창과는 달리, 사출화의 폴리우레탄제 밑창은 훨씬 부드러웠다. 이는 운동량이 일반인보다 훨씬 많은 군인들에게 결코 무시 못 할 이점이었다.

군인들처럼 운동량이 많은 운동선수들은 훈련 때와 경기 때 신는 신발이 다르다. 운동선수들도 실전(?)을 하는 시간보다는 훈련을 하는 시간이 훨씬 더 많다. 때문에 훈련 때 신는 훈련화는 가급적 밑창이 부드러운 것을 선호한다. 충격 흡수력이 뛰어나 운동 시간이 길어지거나 강도가 높아져도 관절에 무리를 적게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기 때 신는 경기화로는 반대로 밑창이 단단한 것을 선호한다. 충격 흡수력은 떨어지는 대신 급가속과 신속한 동작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군인들은 운동선수들과는 달리 묵직한 군장까지 메고 움직여야 한다. 때문에 밑창이 부드러워 관절에 무리를 덜 주는 사출화를 더 선호할 수밖에 없었다.

경년변화로 인한 가수분해가 사출화를 분해

그러나 하나가 좋으면 하나가 나쁜 것이 세상의 이치라던가? 폴리우레탄 밑창에는 복병이 숨어 있었다. 그 복병의 이름은 가수분해(加水分解, hydrolysis)였다. 가수분해란 물 분자가 작용하여 일어나는 분해반응이다.

문제가 된 사출화의 경우에 한정해 좀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해 보자. 폴리우레탄, 특히 폴리에스테르를 주재료로 사용한 제품에 산(酸)이 존재하게 되면 수분이 이를 가수분해 촉매로 이용해 제품의 폴리에스테르 결합을 뚫고 들어가서 결국 그 결합을 깨뜨린다. 그 결과 앞서 말한 불쌍한 예비군의 사출화처럼 폴리우레탄 재질의 밑창이 부스러지고 마는 것이다.

그리고 유감스럽게도 사출화를 비롯한 군용 전투화는 산과 수분에 자주 접촉할 수밖에 없다. 일단 착용자의 발과 지면의 흙 속에 세균이 사는데, 전투화 내부는 이 세균이 증식하기에 최적의 조건이다. 그리고 세균은 산성 효소를 방출한다. 이 효소는 그대로 가수분해 촉매가 된다. 그리고 훈련을 하면 전투화를 신은 병사의 발에서는 수분인 땀이 나온다. 지면의 흙에도 수분이 있다.

또한 겨울이면 군에서는 기동로 개척을 위해 제설작업을 실시한다. 이 제설작업에 사용되는 염화칼슘은 수분을 빨아들이는 제습효과가 있다. 당연히 염화칼슘이 폴리우레탄제 밑창에 묻으면 빨아들인 수분으로 인해 가수분해는 가속화된다.

물론 제조사 측에서는 가수분해를 가급적 억제하는 품질 관리를 통해 생산된 지 5년까지는 수명 보장을 하고 있다. 또한 강도 높은 훈련을 하다 보면 대부분의 사출화는 심하면 1년 이내에 밑창 수명을 다한다. 때문에 사출화를 설계 제작하고 보급할 때는 가수분해로 인한 수명 단축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과학 원리는 일선의 장병들에게 전혀 전파되지 않았다. 그리고 이런 사실을 전혀 알 턱이 없던 장병들은 전역할 때 예비군 훈련에 쓸 목적으로 사출화를 가지고 집에 갔다. 예비군 훈련 기간은 무려 8년인데 말이다. 게다가 전투화 중 너무 크거나 작아서 수요가 크지 않은 사이즈는 생산된 이후 여러 해 동안 주인을 찾지 못하고 창고에서 묵다가 발이 맞는 신병에게 지급되기도 한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 사출화의 문제는 의외로 심각하다. 밑창이 부스러진 사출화를 고치는 데 드는 비용은 경우에 따라 신발 가격보다 더 비싸기도 하다.

다른 군용품도 가수분해의 위험 존재

물론 앞서도 말했듯이 현재는 더 이상 폴리우레탄제 사출화가 지급되지 않는다. 그러나 폴리우레탄이 들어간 군장 제품은 사출화 하나뿐이 아니다.

예를 들어 요즘은 전투배낭의 등판 부분에도 착용감을 높이고 내부의 물건이 등을 찌르지 않게 하기 위해 스펀지를 대는 설계가 많은데, 이 스펀지 역시 폴리우레탄인 경우가 많다.

그뿐이랴. 민간 의류나 신발, 침구 등에도 폴리우레탄은 많이 사용된다. 그리고 오래 사용하면 거의 100%가 가수분해로 인해 부서지고 기능을 잃는다.

민간 용품은 그래도 사용 조건이 좋고, 대체가 수월한 경우도 많기에 이게 큰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훨씬 열악한 조건에서 사용되는 군용품이 가수분해로 빨리 기능을 잃는 것은 분명한 문제다. 군용품의 규격과 설계를 정할 때, 가수분해에 강하면서도 기능성이 뛰어난 소재를 선택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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