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vember 14,2019

감정대립으로 치달은 백신 개발 경쟁

노벨상 오디세이 (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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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대 무렵 미국의 중산층 가정 중 일부는 아이들을 산이나 사막으로 서둘러 대피시켰다. 지능이나 청력 및 시력을 비롯해 근육 기능 장애 등을 일으키는 무서운 전염병이 돌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 병은 기존의 전염병과는 달리 더러운 빈민촌보다 깨끗한 환경에서 자라는 중산층 어린이들이 더 잘 걸린다는 이상한 특징까지 지니고 있었다. 그 전염병의 정체는 폴리오라는 바이러스가 뇌 또는 척수신경에 침입해 신경기능에 이상을 초래하는 소아마비였다.

미국 역사상 유일무이한 4선 대통령인 프랭클린 루스벨트도 소아마비의 피해자 중 한 명이었다. 대통령이 되기 12년 전인 39세 때 소아마비 합병증으로 하반신이 마비된 그는 재임 중인 1938년에 소아마비 퇴치 자선 재단을 발족시켰다.

포름알데히드를 이용해 불활성화한 소아마비 백신을 만든 조너스 소크.  © public domain

포름알데히드를 이용해 불활성화한 소아마비 백신을 만든 조너스 소크. © public domain

이 재단은 10센트 은화의 모금 운동으로 연구비를 모아 소아마비 연구를 추진했는데, 그 연구비의 혜택을 집중적으로 받은 이가 피츠버그대학의 젊은 의학자 조너스 소크였다. 하루 16시간씩 연구를 이어가던 소크는 1952년에 마침내 소아마비 백신을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원숭이의 신장세포에서 세 종류의 폴리오바이러스를 배양한 다음 포름알데히드로 죽여서 불활성화한 사균백신을 만든 것이다. 그는 백신을 자신과 아내, 그리고 자식들에게 먼저 투여하는 것을 보여주면서 환자들에게 실험 참여를 설득했다.

1954년 소크가 개발한 백신에 대해 대대적인 임상시험이 진행됐다. 6~9세 아이들 100만 명에게는 소아마비 백신을 투여하고 동년배의 또 다른 100만 명에게는 위약을 투여한 것. 그 결과 백신은 안전하고 효과적임이 밝혀졌다.

백신 보급 이후 환자 1/10 이하로 급감 

당시 미국에서만 5만 7000여 건의 소아마비 사례가 보고됐는데, 소크의 사균백신이 보급된 뒤에는 그 수가 1/10 이하로 급감했다. 우리나라도 1950년대까지 매년 약 2000명 정도의 소아마비 환자가 발생했으나, 1962년 소아마비 백신 접종이 시작되면서 그 수가 꾸준히 감소해 2000년에는 세계보건기구에 의해 박멸이 선언됐다.

소크는 1993년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에 의해 20세기 100대 인물로 선정됐으며, 탄생 100주년이었던 2014년에는 그의 업적을 기념해 매년 10월 24일이 ‘세계 소아마비의 날’로 지정되기도 했다. 또한 캘리포니아주는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건축가 루이스 칸에게 의뢰해 샌디에이고에 ‘소크생물학연구소’를 세웠다.

폴리오 바이러스의 독성을 감소시켜 소아마비 생백신을 개발한 앨버트 세이빈. © public domain

폴리오바이러스의 독성을 감소시켜 소아마비 생백신을 개발한 앨버트 세이빈. © public domain

그런데 소크가 개발한 사균백신에 대해 의문의 눈길을 보내는 이들이 있었다. 당시에는 살아 있는 바이러스만이 면역반응을 일으킨다고 생각하는 의학자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 대표적인 인물 중 한 명이 앨버트 세이빈이었는데, 그는 소크의 백신 접종이 시작되던 1955년 새로운 소아마비 백신 개발에 성공했다.

세이빈은 독성이 강한 야생의 폴리오바이러스를 원숭이의 신장세포에서 여러 대에 걸쳐 배양해 그 독성을 감소시켰다. 이처럼 병원성이 약해진 폴리오바이러스는 장관 내에서 바이러스를 증식시켜 소아마비에 대한 저항성을 지니게 된다.

세이빈이 개발한 생백신은 소크의 백신에 비해 여러 가지 장점을 지니고 있었다. 우선 주사로 접종해야 하는 사균백신과 달리 시럽이나 과자 모양의 경구용 백신이어서 편리하다. 따라서 주삿바늘에 의한 감염도 염려할 필요가 없을뿐더러 의사가 없는 개도국의 오지에서도 사용이 가능하다. 또한 사균백신은 3번이나 접종해야 하지만 생백신은 한 번 먹는 것만으로 충분해 비용 면에서도 경제적이었다.

1954년에 이미 노벨 생리의학상 수여

1961년까지 약 1억 명 이상의 사람들에게 접종해 효능과 안전성을 검증한 세이빈의 생백신은 1962년부터 소크의 백신을 대신해 국제적으로 사용됐다. 하지만 소크와 세이빈 모두 노벨상을 받지 못했다. 사람들이 추정하는 가장 유력한 이유는 1954년 이미 소아마비에 대해 노벨 생리의학상이 수상되었다는 점이다.

아무 조건에서나 잘 성장하는 박테리아와 달리 바이러스는 살아 있는 조직에서만 성장해 배양하기가 쉽지 않다. 특히 소아마비 바이러스는 사람 배아의 뇌 조직, 즉 신경세포에 의해서만 배양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이에 백신 개발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런데 1949년 보스턴어린이병원의 엔더스, 웰러, 로빈스는 뇌 조직뿐 아니라 피부, 근육, 장에서 얻은 세포에서 소아마비 바이러스를 배양하는 데 성공했다.

소크와 세이빈이 소아마비 백신 개발에 성공한 것 역시 이 세 사람이 발견한 신 배양 기술을 사용한 덕분이었다. 즉, 노벨위원회는 소크와 세이빈의 공로가 이들의 연구보다 더 새로운 게 없었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한편, 소크와 세이빈 간에 일어난 끊임없는 불화 때문에 노벨위원회에서 두 사람 모두 수상에서 제외했을 것이라고 보는 이들도 있다. 소크가 연구비 지원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소아마비 퇴치 자선 재단의 이사장 역시 사균백신의 지지자였기 때문이다.

소크보다 나이가 여덟 살이나 많고 훨씬 더 오랫동안 폴리오바이러스를 연구해온 세이빈은 그에 대한 반감이 매우 컸다. 더구나 재단이 백신 기금을 모으기 위해 소크를 기적의 과학자로 홍보하는 광경을 지켜보는 것 역시 세이빈에게는 참기 어려운 모욕이었다.

때문에 세이빈은 직접적으로 소크를 비난하는 말을 서슴지 않았다. “소크가 한 일은 누구나 할 수 있다”든지, “소크가 하나의 백신을 개발했다면 나는 백신 그 자체를 개발했다”는 발언들이 그것이다. 처음엔 백신 개발에 대한 견해의 차이에 불과했던 감정이 나중에는 심각한 이념 갈등으로까지 치닫게 된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고대 이집트 미라에서 그 흔적이 발견될 만큼 오랫동안 인류를 괴롭혀온 소아마비는 두 사람에 의해 마침내 위력을 잃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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