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ctober 21,2019

통제구역의 도로시(1)

김초엽 작가의 SF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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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註] 사이언스타임즈는 우수 과학문화를 국민들에게 소개하고 다채로운 콘텐츠 제공을 통한 대중의 과학 흥미 및 관심을 제고하기 위해 과학문학 분야의 유망 신예 작가 '김초엽' SF 작가의 소설을 기획·연재하고자 합니다. 약 4개월에 걸쳐 연재될 '통제구역의 도로시'는 인류가 우주 여러 행성으로 진출한 시기, 우주선 불법 정비소를 운영하는 할머니를 주인공으로 다루고 있으며, 약 4개월간 격주(월, 화 2편씩)로 연재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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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unsplash.com/photos/W8KTS-mhFUE   https://unsplash.com/photos/W8KTS-mhF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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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발 그 기억만은 안 돼요.”

남자는 간절해 보였다. 문을 잠가두지 않았다면 유리벽이라도 부수고 방으로 들어올 기세였다. 다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칩을 입력 장치에 집어넣었다. 남자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급기야 남자는 다나와 그 사이에 있는 유리벽에 붙어 동정을 호소하기 시작했는데 깨끗했던 유리에 손자국을 잔뜩 남겨가며 애원하는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럴 거면 처음부터 무리한 요구를 하지 말던지. 저 무례한 놈은 본인 우주선의 유리창 한번 직접 닦아본 적 없는 게 분명하다.

“그거, 가기 전에 깨끗이 해놔.”

다나가 퉁명스레 말하자 남자는 화들짝 놀라며 유리벽에서 떨어졌다. 기억 복제 기구의 초록색 램프가 깜빡였다. 준비가 완료되었다는 의미다. 버튼 하나면 스캔이 시작될 것이다. 다나는 입력 장치에 꽂힌 낡은 기억 칩을 내려다보았다. 제대로 관리하지 않았고 여기저기 복제 기억을 팔아댔는지 수명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았다. 남자에게 어떤 사적인 기억이 있는 지 다나도 사실 별로 알고 싶지 않다. 하지만 남자의 요구대로 기억의 일부만을 받는 것은 다나의 입장에서 너무 손해인 장사다. 그럴 거면 거래가 아니라 기부라고 불러야 할 수준이니까.

아직도 울상을 짓고 있는 남자를 향해 다나가 어깨를 으쓱했다.

“A 구역 전체. 그것보다 적게는 못 받아.”

“구역 전체는 정말 안 됩니다. 그 낡은 칩이 안 보이세요? 전체를 복제했다간 분명 부서질 거예요. 기억조차 없는 머저리가 되어 우주선을 몰고 다녀야 한다고요. 제대로 집을 찾아갈 수도 있을지 의문인데다가, 행성에서 아이들이 기다리고 있는데 그 애들 이름조차 잊어버리면….”

“내가 하면 괜찮아. 복제는 수천 번도 더 해봤어. 그 정도도 못 걸겠으면 저 고철 우주선은 폐기처분하든지. 결국 여기가 아니면 봐줄 곳도 없어서 찾아온 것 아닌가?”

남자는 입을 다물었다. 마지막 말은 그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굳이 저런 다 무너져가는 우주선에 집착하는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곳은 워낙 비상식적인 사람들이 몰려드는 장소니까. 남자가 울적한 표정으로 발만 내려다보고 있는 모습이 풀 죽은 개 꼴이었다. 그러나 덩치가 크고 험악한 인상의 남자는 개와 달리 전혀 귀엽지 않았고, 그가 한 시간 전 초면에 보인 무례한 태도를 생각하면 일말의 동정심도 사라졌다. 노친네가 무슨 정비를 하겠냐며 시비를 걸어대는 멍청한 젊은이들을 종종 만나지만 여전히 다나는 적응되지 않았다. 그들에게 약간의 호의라도 갖게 될 날은 백 년이 지나도 오지 않을 것이다. 가능한 최대로 비싼 값을 받을 뿐.

“결정했어?”

남자는 결국 체념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줄 알았지. 다나는 버튼을 눌렀다. 스캔 버튼을 누르고 나서야 칩이 정말로 부서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알 바는 아니다. 오랜만에 꽤 그럴싸한 정보를 건질 수 있을 테니까.

네 시간 뒤, 다나는 복제가 완료된 칩을 남자에게 내밀었다. 소파에서 퀭한 눈빛으로 눈을 뜬 남자는 허겁지겁 칩을 목뒤에 끼워 넣었다. 그러고는 다나의 지시에 따라 우주선의 엔진이 작동하는지 확인해보더니 곧장 짐을 챙겨 떠났다. 아주 다급해 보였다. 대체 기억 속에 어떤 징그러운 것들이 있기에 저러나.

남자가 매뉴얼대로 도킹을 천천히 해제하지 않고 성급하게 출발한 나머지 스테이션이 굉음을 내며 크게 흔들렸다. 바로 옆 건물을 쓰는 식당 주인 이브가 뛰쳐나와 이미 우주선은 떠나고 없는 허공을 향해 욕을 퍼부었다. 이브는 최근 스테이션의 인공 중력장이 자주 뒤집히는 일 때문에 사소한 진동에도 예민하게 굴었다.

“이놈의 정비소, 쫓아내던가 해야지. 바닥이 울렁거려서 잠을 못 자겠어.”

“그게 내 탓인가? 내가 아니라 관리국에 따질 일이야.”

“버려진 스테이션에 관리국이 어디 있어? 그리고 네 정비소에 한심한 녀석들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찾아오잖아.”

“엄연히 영업시간이 있는데 그놈들이 무턱대고 오는 걸 나더러 어쩌라고.”

다나는 상냥한 태도로 설명했지만 이브는 투덜거리며 항의를 이어갔다. 슬슬 친절하게 대꾸하기 귀찮아질 무렵 진동이 잦아들었다. 이브는 가게 문을 쾅 닫았다.

사실 오늘 다나는 무슨 불평을 들어도 기분이 좋았다. 오랜만에 괜찮은 기억 지도를 얻었으니까. 다시 정비소 안으로 들어와 보니 복제실의 유리벽에 손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 보여서 약간 기분이 나빠졌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용서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남자의 우주선 수리도 간단했다. 적당히 공수해 온 표준 부품을 끼우는 것으로 끝이 났다. 우주선 상태를 보니 터미널을 한 번 통과하고 나면 도저히 쓸 수 없을 것 같은 상태였고 다나는 그 사실을 분명히 경고했지만, 남자는 이번에야말로 행성에 정착할 것이라고 확신하며 말했다. 그간의 떠돌이 범죄자 생활을 청산하고 가족들이 살고 있는 구역에서 일을 구하겠다는 것이었다.

물론 다나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자극에 익숙해진 이들은 평생 우주를 떠돈다. 오래전 인류가 행성 하나를 벗어나지 못하던 시절에도 사람들은 어떻게든 뇌를 도파민으로 절여 놓을 일들을 찾아내곤 했다. 어떤 사람들은 우주 곳곳을 다니며 어디서도 겪어보지 못한 일을 찾아 헤매고, 또 어떤 사람들은 터미널을 통과하는 행위 자체에 중독되곤 한다. 한번 항해를 하고 나면 한 달은 쉬어야 할 만큼 후유증을 심하게 겪는 다나로서는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이들이지만, 굳이 이해할 필요는 없다. 우주는 넓고, 이상한 사람들은 계속 이 스테이션에 몰려들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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