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ptember 23,2019

조국 위해 농부를 자처했던 과학자

노벨상 오디세이 (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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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위 60~70°에 자리 잡은 핀란드는 국토 전체가 세계에서 가장 북쪽에 위치한 국가다. 맞닿아 있는 발트해의 경우 남해안에서는 4개월, 서해안에서는 6개월 동안이나 얼어붙는다. 따라서 겨울이면 따뜻한 나라에서 젖소와 같은 가축들의 사료를 수입해야 했다.

가을에 수확해서 말린 건초의 경우 단백질과 비타민이 손실돼 가축들을 건강하게 키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재 핀란드의 젖소들은 1년 내내 품질이 우수한 우유를 생산하며, 그 우유로 만든 버터와 치즈는 유럽에서도 최고의 가치를 인정받는다.

그 같은 혁신의 뒤에는 핀란드 생화학의 아버지로 여겨지는 한 과학자의 헌신적인 애국심이 있었다. 목초의 신선 보존법을 개발해 1년 내내 최고 품질의 사료를 가축에게 공급할 수 있게 하고, 버터의 보존법을 개선한 아르투리 비르타넨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산처리에 의한 가축 사료 및 영양물의 보존법을 개량해 인류의 영양 향상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1945년 노벨 화학상을 수상한 핀란드의 아르투리 비르타넨. © Public Domain

산처리에 의한 가축 사료 및 영양물의 보존법을 개량해 인류의 영양 향상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1945년 노벨 화학상을 수상한 핀란드의 아르투리 비르타넨. © Public Domain

1895년 1월 15일 핀란드 헬싱키에서 철도 기사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헬싱키대학에서 화학, 생물학, 물리학 등을 공부하고 1916년에 석사 학위를 받았다. 그 후 중앙산업연구소에서 1년 동안 근무하다가 대학으로 돌아와 1919년에 유기화학 분야의 연구를 통해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듬해인 1920년 핀란드 유제품협회의 실험실에서 일하게 된 비르타넨은 그때부터 버터와 치즈의 제조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 이후 스톡홀름대학에서 세균학과 효소학을 공부한 그는 1925년부터 조국의 가축 사료 공급을 개선하기 위한 연구에 착수했다.

가축 사료로 사용되는 신선한 목초를 사일로에 저장하면 발효가 일어나 상해버린다. 그렇게 되면 사료의 단백질 함량이 줄어들어 영양가가 떨어질 수밖에 없다. 비르타넨은 목초의 발효 과정을 연구하던 중 산성이 억제제로 작용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동물의 건강 상태도 향상시킨 AIV 사료

그는 광범위한 실험 끝에 황산이 첨가된 염산을 이용해 pH 4 이하로 만들어 목초의 발효를 억제시켰다. 이렇게 처리된 사료는 비타민 A와 카로틴의 함량은 물론 비타민 B와 비타민 C 또한 잘 보존되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 공정은 그의 이름 첫 글자를 따서 ‘AIV 방법’으로 알려졌는데, 그는 추가 실험을 통해 영양가나 사료의 식용 여부, 사료를 먹은 동물에게서 얻어지는 제품의 식용 여부 등에 대해 전혀 문제가 없음을 밝혀냈다.

이 사료 덕분에 핀란드에서도 젖소들로부터 1년 내내 여름의 신선한 목초를 먹은 것과 같은 우유를 생산할 수 있게 됐다. 또한 AIV 사료는 동물의 건강 상태 및 번식력, 질병에 대한 저항력을 향상시키는 데도 도움을 주었다.

사실 신선한 목초에 무기산이나 유기산을 첨가해 발효 과정을 방해하는 법은 오래전부터 경험적으로 행해져온 방식이다. 하지만 사료의 영양가를 보존해 가축 사료로 이용하기 위한 구체적인 연구는 없었는데, 비르타넨은 체계적이고 완벽한 연구로 이 문제를 최초로 해결했다.

1932년 특허를 취득한 AIV 방법은 덴마크와 네덜란드, 영국, 노르웨이 등 점차 주변국으로 전파되기 시작했다. 이후 핀란드 남부 지역에 있는 거의 모든 농장들은 AIV 사료를 저장하기 위해 구덩이를 팠는데, 그 구덩이의 흔적들이 비행기에서도 보일 정도였다.

비르타넨은 녹색 사료로서 비타민과 단백질이 풍부한 콩과식물의 질소 고정법에도 관심을 가졌다. 그는 콩과식물이 덩이줄기에 있는 박테리아를 이용해 대기의 질소를 고정하는 과정을 연구해 뿌리에 풍부한 붉은 색소인 뿌리혹 헤모글로빈의 중요성을 증명했다. 또한 콩과식물은 1년에 1번 수확하는 것보다 3번 수확하는 것이 가장 영양가가 높다는 사실도 알아냈다.

연구실보다 현장을 중시한 과학자

그는 버터의 자연발생 화합물인 레시틴의 산화 작용이 버터의 장기 저장 시 나쁜 맛을 초래한다는 것을 발견하고 버터의 보존 방법도 개선했다. 버터에 소금을 첨가해 pH를 6 이상으로 늘린 결과 산화 작용이 멈춘 것이다. 버터의 이 같은 보존 방법은 핀란드에서 수십년 동안 사용됐다.

비르타넨은 뿌리혹박테리아를 이용해 식물의 질소 고정 메커니즘을 연구하고, 산처리에 의한 가축 사료 및 영양물의 보존법을 개량해 인류의 영양 향상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1945년 노벨 화학상을 수상했다.

그는 연구실보다 현장을 중시하는 과학자로도 유명했다. 즉, 자신이 직접 농부가 되어 현장에서 목초 저장 방법을 연구했던 것. 실제로 그는 헬싱키 근교에 있는 농장을 구입해 과학적인 결과를 시험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이 같은 열정은 개인적 이익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순수한 애국심에서 비롯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많은 연구 업적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자동차를 소유하지 않았으며, 술과 담배도 전혀 하지 않았다.

핀란드 최대 유제품 기업인 ‘발리오(Valio)’ 사의 연구소를 약 50년간 이끌었던 비르타넨은 죽기 직전까지 자신이 설립한 생화학연구소에서 근무했다. 그러다 1973년 11월 11일에 78세의 나이로 고관절 골절과 그에 따른 합병증으로 사망했다.

핀란드의 천문학자 이르주 비이스엘라는 자신이 발견한 소행성 1449에 비르타넨의 이름을 따서 명명했으며, 달의 분화구 중에도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된 것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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