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ptember 20,2019

다양한 이름을 지닌 ‘수은’

이름들의 오디세이(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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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든 다치면 ‘빨간약’을 발랐던 시절이 있었다. 필자의 고향에서는 ‘아까징끼’라는 일본식 이름으로 불렀다. 일본어로 ‘붉다‘는 형용사 ‘아까(赤)’와 팅크/정기 (tincture,알코올에 녹인 약물)의 일본식 발음인 ‘징끼(丁幾)’의 합성어였다. 나중에 빨간약의 라벨을 자세히 보니 ‘머큐로크롬(mercurochrome)’이었다. ‘머큐롬’으로도 불렸다.

 제주 '선녀와 나무꾼 박물관'에 전시된 머큐로크롬.

제주 ‘선녀와 나무꾼 박물관’에 전시된 머큐로크롬. ⓒ 박지욱

머큐로크롬이란 이름은 ‘머큐리+크롬’의 형태이니 중금속의 대명사인 수은과 크롬의 혼합약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아니다. 피부에 바르면 수은(mercury)이 빨갛게 착색된다(chrom)고 해서 머큐로크롬(mercurochrome)이라 불렸던 것이다. 다행히 여기의 크롬은 중금속 크롬(chromium)은 아니다. 하지만 수은은 2% 정도 차지하고 나머지는 물과 알코올로 채웠다. 지금으로 100년 전인 1919년에 미국 존스홉킨스병원의 영(Hugh H Young)이 살균 효과를 발견하여 널리 사용했었다.

직접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은 알겠지만 수은은 특이한 물질이다. 녹은 은, 굴러다니는 은처럼 보인다. 수은이 상온에서 액체 상태로 존재하는 금속이기 때문이다.

수은은 액체 상태에서 부피 팽창이 일정해서 온도계나 혈압계에 널리 쓰였다. 과거에는 뉴스를 전달하는 아나운서들이 기온의 오르내림을 ‘수은주(水銀柱)’가 올랐다/내렸다’로 표현했다.

또한 수은과 은을 섞어 만든 아말감(amalgam)은 치과에서 충치를 때우는 데에 사용했다. 수은에 주석을 섞어 만든 것은 우리가 매일 보는 거울이다. 수은은 흑연과 함께 수은 전지의 재료가 되고, 수은으로 만든 가로등은 얼마 전까지도 우리나라 거리에서 창백한 푸른빛으로 빛났다.

수은 혈압계.  ⓒ 박지욱

수은 혈압계. ⓒ 박지욱

하지만 그전부터 수은은 아주 중요한 약물로 널리 사용돼 왔다. 진시황(BC 259~210)은 피부 주름을 없애려고 수은을 먹었다. 말년에 코가 문드러지고 폭군이 된 것은 수은 중독 때문인지도 모른다. 오늘날에는 수은을 먹는다는 일을 상상조차 할 수 없지만 수은은 아주 오래된 의약(醫藥)이다.

154세기 인도에서는 무려 5000여 종의 수은제제가 있었다. 아랍 의학에서도 수은연고는 중요한 피부병 치료제였다. 심지어 얼마 전까지도 수은이 든 미백(美白) 화장품이 국내에서 유통되기도 했다.

서양 의학사에서 중요한 인물인 파라켈수스(Paracelsus, 1493~1541)는 수은을 피부병과 매독 치료제로 썼다. 이후 수은은 매독에 특효약으로 사용됐고, 20세기 초가 되어서 ‘비소 살바라르산(arsenical salvarsan)’이 나오자 그 자리를 내주었다. 비소 살바르산은 20세기 중반에 페니실린으로 대체되었다.

다양한 용도로 널리 쓰이던 수은이었지만 지금은 일상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수은이 유독성 물질이라는 사실이 알려졌기 때문이다. 유구한 수은 사용의 역사를 보면 독성의 문제로 사용이 제한된 것은 극히 최근의 일이다. 그 출발점은 일본이었다.

1952년, 일본 규슈의 미나마타에 있는 질소 비료공장에서 내뿜은 유기(메틸) 수은 폐수가 주변 하천과 바다를 오염시켜 어패류, 조류, 가축들이 순차적으로 폐사했다. 이런 사실을 알 리가 없는 주민들은 수생 동물을 먹었고 1년 정도 지나면서 손발이 뒤틀리고 혀가 마비되는 현상이 생겼다. 30명이 이 병에 걸렸고 1명이 사망했다. 이렇게 유명한 공해병 ‘미나마타 병’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이후로도 미나마타 병으로 확인된 사람은 약 1만 명이나 더 있었고, 그중 47명이 사망했다.

미나마타의 비극이 알려지면서, 가정용 수은 체온계가 사라지고, 치과에서는 아말감이 자취를 감추었다. 수은 건전지도 없어지고, 병원에서 쓰던 수은 혈압계도 옛 추억이 되었다.

그리고 1988년에 FDA에서 수은 성분의 약물 시판을 금지하자 오랜 세월 가정과 양호실의 상비약이었던 ‘빨간약’도 어느새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 자리를 대신한 것은 ‘빨간약’ 보다는 조금 덜 빨간 ‘요오드팅크(iodine tincture, 옥도정기)’였다.

영어의 quicksilver, mercury, hydrargyrum는 모두 수은을 뜻한다.  mercury의 어원인 머큐리(Mercury)는 그리스 신화에서는 헤르메스(Hermes)이고 로마신화에서는 메르쿠리우스(Mercurius)에 해당하는 올림푸스 신으로, 천문학에서는 태양계 행성 수성(水星)을 뜻한다.

헤르메스/메르쿠리우스는 제우스/주피터의 아들이자 제우스의 메신저(使者)다. 그는 날개 달린 모자, 날게 달린 지팡이, 날개 달린 신발을 지니고 있으며, 빠른 속도로 제우스의 명령을 전달한다. 수성은 태양에 가장 가까운 행성으로 공전 주기는 88일에 불과하다. 그러니 가장 빠른 행성의 이름에 머큐리는 잘 어울린다.

헤르메스/메르쿠리우스.  ⓒ 박지욱

캐나타 밴쿠버 ‘부차트 가든’에 전시된 헤르메스/메르쿠리우스. ⓒ 박지욱

헤르메스/메르쿠리우스는 연금술사의 수호신이기도 했다. 연금술사들은 수은으로 금을 만들려는 노력을 많이 했고 그러다 보니 ‘수은 도사’가 되었다. 그래서인지 자신들의 직업적 심벌을 헤르메스/메르쿠리우스의 날개 달린 지팡이를 썼다. 헤르메스 자체가 이런 손재주가 많은 신이어서 연금술사의 수호신이 된 것일 수도 있다.

Hydrargyrum 은 수은을 뜻하는 라틴어로 ‘hydr(水)+argyrum(銀)’으로 이루어져 이름 그대로 수은이다. 물처럼 이리저리 흐르는 은이라는 의미로 상온에서 액체 상태인 수은을 의미한다. 여기서 수은을 뜻하는 원자 기호 Hg 가 나왔다.

남미의 아르헨티나(Argentina)는 나라 이름이 아예 은을 뜻한다. 아르헨티나의 원래 이름은 ‘라 플라타(la Plata)’로 스페인어로 ‘은’이었다. 나중에 아르헨티나가 독립하면서 나라 이름을 같은 뜻의 라틴어에서 가져와 ‘아르헨티나’로 바꾸었다. 하지만 이 나라를 흐르는 큰 강의 이름은 여전히 ‘라 플라타 강(Rio de la Plata)’으로 남아있다. ‘은나라’에 흐르는 ‘은하(銀河)’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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