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gust 22,2019

‘합리적’인 과학에 ‘고정관념’이 웬 말?

과학 분야의 성역할 고정관념 깨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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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오드화칼륨과 과산화수소가 만나면 어떻게 될까. 과산화수소가 분해되면서 다량의 산소가 발생하는데, 그 과정에서 어마어마한 거품이 발생한다. 일명 ‘뱀거품 만들기’라 불리는 유명한 과학실험이다.

최근 이 과학실험이 전 세계에 신선한 충격을 선사하고 있다. 지난 6월 22일 미국 리버티 대학교에서 진행된 ‘미스 버지니아 2019’ 장기자랑 무대에서 그 화려한 모습을 선보였기 때문이다.

‘I love science’라는 대사와 함께 기상천외한 퍼포먼스를 보여준 주인공은 버지니아 공대에서 생화학 및 시스템생물학을 전공한 카밀 슈리어(Camille Schrier)다. 반면 장기자랑에 참가한 다른 이들은 반짝거리는 의상을 입고 춤을 추거나 노래를 부르는 등 일반적인 퍼포먼스를 보여주는 데 급급했다.

자신의 전공을 살려 ‘과학 실험’ 퍼포먼스를 진행하는 슈리어의 모습.  ⓒ courtesy of Miss Virginia Organization

자신의 전공을 살려 ‘과학실험’ 퍼포먼스를 진행하는 슈리어의 모습. ⓒ courtesy of Miss Virginia Organization

결국 자신의 전공을 살려 ‘지적인’ 매력을 발산한 슈리어는 2019년도 버지니아주를 대표하는 미인으로 선발될 수 있었다. 미인대회의 원래 취지가 ‘지덕체(智德體),’ 즉 인품과 지혜와 건강한 몸이라는 세 가지 미덕을 갖춘 이의 선발임을 감안한다면, 이번 슈리어의 선전은 비정상적인 ‘고정관념’에 대한 ‘과학’의 승리라 볼 수 있다. (관련 동영상)

수학은 남자의 학문? 편견이 격차 만든다

이는 과학기술계에 만연한 성별에 대한 ‘고정관념’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 대표적인 것 중 하나가 ‘남학생이 여학생보다 수학을 더 잘한다’는 속설이다.

물론 남학생의 수학 점수가 여학생보다 높은 것은 사실이다. 문제는 관찰 행위 자체가 결과에 영향을 미친다는 ‘슈뢰딩거의 고양이’ 사고실험처럼, ‘수학은 남자의 학문’이라는 고정관념이 그 격차를 벌리는 데 이바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특정 과목에 대한 ‘자신감’이 실제 남녀 수학 점수 차이에 영향을 끼쳤다는 연구가 있다. 옥스퍼드대-캠브리지대 공동 연구진은 지난 2012년 “여학생이 가지고 있는 ‘수학 불안(mathematics anxiety)’이 실제 시험에도 영향을 미쳐 성적을 떨어뜨린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그에 따르면 대부분의 여학생들은 남학생에 비해 훨씬 많이 수학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관련 링크)

수학에 대한 선입견과 고정관념이 실제 여학생의 성적에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나타났다. ⓒ Pixabay

수학에 대한 선입견과 고정관념이 실제 여학생의 성적에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나타났다. ⓒ Pixabay

지난 2015년 워싱턴 주립대학에서 진행한 연구도 비슷한 결과를 보여준다. 연구진은 대학생 122명을 대상으로 수학 시험을 치르게 한 뒤, 자신의 시험 점수를 예상케 했다.

그러자 성별에 따른 차이가 확연히 드러났다. 여학생들은 대부분 자신의 수학 점수를 정확하게 예측한 반면, 남학생들은 자신의 수학 점수를 과대평가했다. 또한 남학생들은 이러한 자신감을 바탕으로 향후 STEM(Science, Technology, Engineering and Mathematics) 분야에 진출하고자 하는 경향을 드러냈다.

연구진은 이에 대해 “STEM 분야에서의 성 격차는 남학생들이 자신의 능력을 과대평가한 결과일 수 있음을 시사한다”고 밝혔다. 수학 점수가 낮아도 남학생은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반면, 여학생은 심리적으로 위축돼 수학에의 흥미를 잃어버린다는 해석도 가능하다.(관련 링크)

결과적으로 사회, 문화적인 인식과 고정관념이 여성의 과학기술 진출에 큰 벽이 되고 있다는 분석이다. 실제로 미국 위스콘신대, 유럽대학연구소(EUI), 미국 버클리 캘리포니아대 등 다수의 연구기관에서 “성 평등 문화가 정립된 국가일수록 여성의 수학 성적이 높아진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하기도 했다.

고정관념 깨고 ‘빛’이 된 여인

그런 의미에서, 전통적인 남성 중심 영역인 전자공학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리사 수(Lisa su) AMD 사장 겸 최고경영자(CEO)는 이러한 고정관념 타파의 상징적 인물이라 할 수 있다. 국내 네티즌에게 갓사수(신을 의미하는 ‘갓’과 리사 수의 합성어), 빛사수(눈부신 업적을 의미하는 ‘빛’과 리사 수의 합성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그는 투자 부적격기업이던 반도체 기업 AMD를 화려하게 부활시킨 장본인이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매사추세츠 공과대학(MIT)에서 전기공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40개 이상의 반도체 관련 논문을 발표하며 관련 연구의 선구자로 인정받았지만 대만계 이민자, 여성이라는 비주류 상황은 그에게 결코 호의적이지 않았다. 2014년 그가 위기에 빠진 AMD을 구원하기 위한 총책임자로 등판했을 때, “Lisa Who?”라는 비아냥이 실리콘밸리에 퍼질 정도였다.

리사 수는 언론과 회사 내부에서 최고경영자(CEO) 대신 박사(Ph.D)라고 불린다. 이는 천재적인 반도체 공학자이자 뛰어난 경영자인 그에 대한 존경을 담은 표현이다. ⓒ Flickr / AMD Global

리사 수는 언론과 회사 내부에서 최고경영자(CEO) 대신 박사(Ph.D)라는 명칭으로 주로 불린다. 이는 천재적인 반도체 공학자이자 뛰어난 경영자인 그에 대한 존경을 담은 표현이다. ⓒ Flickr / AMD Global

리사 수는 고정관념을 깬 과감한 전략으로 이에 맞섰다. 기존의 모든 R&D 역량을 정리하고 집중시켜 신제품 개발에 나선 것. 20달러에 달하던 주가가 1~2달러 수준으로 떨어지는 급박한 상황에서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결국 2017년 ‘라이젠(RYZEN)’이라는 초대박 CPU 시리즈를 내놓은 AMD는 현재 부동의 업계 1위였던 인텔을 턱밑까지 추격하고 있다.

물론 모든 사람이 그처럼 뛰어날 수는 없기에, 오늘도 편견과 맞서는 평범한 여성 이공계인들에게 고정관념은 거대한 장애가 되고 있다. 노스웨스턴대-UC 버클리 공동 연구진은 66개국 약 35만 명의 과학기술인을 대상으로 진행한 연구에서 “성 관련 고정관념이 적은 사회일수록 여성들의 과학 분야 진출 경향이 두드러진다”는 결과를 얻기도 했다.(관련 링크)

그렇기에 각 개인의 자아실현을 위해서라도, 과학 분야에 만연한 성 역할 고정관념은 타파돼야 한다는 것이 많은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모든 인간은 성별 고정관념에 구속됨이 없이 자유롭게 자신의 능력을 개발하고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미스 버지니아 2019의 파격과 리사 수의 선전은 오래된 고정관념을 깨는 청신호가 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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