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cember 11,2019

화학상을 받은 핵물리학의 아버지

노벨상 오디세이 (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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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까지만 해도 과학자들은 원자 및 원소가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궁극적 한계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구리와 같은 값싼 금속을 금과 같이 비싼 금속으로 바꾸려고 시도한 연금술사들도 화학 반응으로 원자의 배열 상태를 바꾸려 했을 뿐 원자 자체의 변화는 꿈도 꾸지 않았다.

그런데 한 과학자가 등장해 기존의 모든 이론과 달리 한 원소가 다른 원소로 전환될 수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그는 원자의 종류를 바꿀 수 있는 열쇠를 알아냈다. 원자 속에는 그 원자의 종류를 결정하는 원자핵이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발견한 것이다.

이처럼 놀라운 과학 업적을 일궈낸 주인공은 바로 뉴질랜드에서 감자를 캐며 일생을 보낼 뻔했던 어니스트 러더퍼드다. 1871년 8월 30일 뉴질랜드의 브라이트 워터에서 출생한 그는 크라이스트처치에 있는 캔터베리 대학에 진학해 물리학을 공부했다.

원소의 분열과 방사능 물질의 화학에 관한 연구 업적을 인정받아 1908년 노벨 화학상을 수상한 어니스트 러더퍼드. ⓒ 위키미디어 public domain

원소의 분열과 방사능 물질의 화학에 관한 연구 업적을 인정받아 1908년 노벨 화학상을 수상한 어니스트 러더퍼드. ⓒ 위키미디어

뛰어난 수학 실력과 탁월한 연구 능력으로 인정받았으나, 장학금을 받지 못하면 학업을 더 이상 이어갈 수 없는 형편이었다. 그 같은 상황을 타파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영국 유학을 갈 수 있는 장학제도에서 1등을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2등이 되는 바람에 유학을 포기해야 했다. 그런데 절망적인 상황에서 기적이 일어났다. 1등으로 선정된 학생이 의대 진학을 위해 장학금을 포기함으로써 러더퍼드가 다시 기회를 잡게 된 것이다.

이 소식이 전해졌을 때 러더퍼드는 감자밭에서 감자를 캐고 있었다. 그는 곧바로 감자를 캐던 삽을 내던지고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곳에서 그는 캐번디시 연구소 소장인 J. J. 톰슨의 지도 아래 전자기파 검출에 관한 연구를 하며 기체의 전기전도 현상을 해명했다.

러더퍼드는 그 연구를 계기로 방사선에도 알파선과 베타선이라는 명백히 다른 두 종류가 있음을 증명했다. 1898년에는 톰슨의 추천으로 캐나다 맥길대학의 물리학 연구소장으로 부임했다. 그는 여기서 토륨의 에머네이션을 발견하고 그것이 방사성 비활성기체임을 밝혔다.

원자핵 존재 밝힌 원자모형 제시

이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그는 F. 소디 박사와 함께 1902년에 원자분열이론을 발표했다. 방사능의 발생과 소멸은 분자들의 변화 때문이 아니라 원자 자체의 변화에 기인하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 이론은 원소의 안정성에 관한 기존의 물질관에 커다란 변화를 일으키는 혁신적인 것이었다.

이후 영국으로 다시 돌아온 러더퍼드는 맨체스터 대학 근처에서 실험 장비 점포를 운영하는 유리 제작자를 찾아갔다. 두께가 수백 분의 1㎜밖에 되지 않는 유리 모세관을 주문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기술로는 좀처럼 만들기 힘들었던 이 유리관으로 그는 알파입자를 방전시켜 알파선이 헬륨 원자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러더퍼드는 원소의 분열과 방사능 물질의 화학에 관한 연구 업적을 인정받아 1908년 노벨 화학상을 수상했다. 물리학자가 물리적인 방법으로 이룬 연구인데 화학상을 받은 것이다. 또한 방사선 현상에서 일어나는 변화는 화학 반응에서의 변화와 완전히 다르다.

러더퍼드 역시 자신의 노벨 화학상 수상에 대해 ‘원소의 변화보다 신비롭다’고 말하며 의아해했다. 이에 대해 노벨위원회는 그의 연구가 화학 분야에서 그 중요성이 매우 지대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노벨상을 수상한 다음해인 1909년 러더퍼드는 새로운 실험에 착수했다. 자신을 유명하게 만든 알파입자를 이용해 원자를 공격하기로 한 것이다. 금을 펴서 아주 얇은 금박을 만든 다음 방사성 원소에서 나오는 알파입자를 그곳으로 발사시켰다.

그런데 초속 약 1만6000㎞의 속력으로 금박에 부딪친 알파입자들의 거의 대부분은 금박을 통과하지 못했다. 이는 처음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결과였다. 알파입자를 금박에서 튕겨나가게 한 물질의 정체를 추적하던 러더퍼드는 기존의 설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원자 모형을 제시했다.

즉, 원자들이 원자핵을 가지고 있고 그 주위를 전자들이 빠른 속도로 돌고 있는 모습이었다. 비록 중성자가 빠져 있긴 했지만, 그의 원자 모형은 원자핵의 존재를 정확히 알아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제자 잃은 후 이공계 대체복무제도 제안

그가 사용한 실험 방법은 오늘날 LHC와 같은 입자가속기의 기본원리가 되었으며, 그가 발견한 원자핵은 30여 년 후 원자력 발전과 핵무기를 탄생시켰다. 즉, 이때부터 핵물리학이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으며, 이후에도 러더퍼드는 중성자 및 중수소의 존재를 예상하는 등 핵물리학의 발전에 지도적 역할을 했다.

한편, 그는 이공계 대체복무제도의 최초 제안자로 기록되는 등 많은 일화를 남긴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의 제자였던 헨리 모즐리는 러더퍼드가 제시한 원자 모형을 과학적으로 입증하고 원자핵 속의 양성자 수와 원자번호의 관계를 밝혀내 유력한 노벨상 후보자로 꼽혔다.

하지만 모즐리는 제1차 세계대전 때 자원입대해 1915년에 전사했다. 훌륭한 제자를 전쟁으로 잃은 러더퍼드는 영국 의회에 편지를 보내 과학 인재들을 군대에 보내는 대신 대학이나 연구소 등에서 계속 연구를 시키는 게 국가에 더 이익이 된다고 주장했다. 영국 의회는 그의 의견을 받아들여 이공계 대체복무제도를 만들었고, 이후 이 제도는 다른 국가에도 확산됐다.

1919년에 그는 캐번디시연구소의 제4대 소장으로 부임했는데, 이후 이 연구소는 그의 별명인 악어를 상징물로 사용하고 있다. 악어처럼 오직 앞으로 나아가면서 모든 것을 삼키듯이 연구해야 한다는 그의 발언에서 유래한 별명이다. 그가 소장이었던 시절에 캐번디시연구소는 전성기를 맞이하며 노벨상 사관학교라는 명성을 얻게 됐다.

러더퍼드는 1937년 10월 19일 사망해 웨스트민스터사원의 아이작 뉴턴 옆에 안치되었다. 현재 뉴질랜드 지폐 중 고액권인 100달러에는 그의 초상이 새겨져 있으며, 출생지인 브라이트워터에는 그의 어린 시절 동상이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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