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ptember 16,2019

컴퓨터와 닮은 기억의 메커니즘

과학 서평 / 영원한 현재 H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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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MIT 대학의 뇌 과학자인 수잰 코킨(Suzanne Corkin)은 헨리 몰레이슨과 마이크를 켜고 마주 앉았다. 헨리는 단기 기억을 상실한 채 39년을 살아왔다. 수잰은 헨리에게 물었다.

“기억에 문제가 생긴 지 얼마나 되셨습니까?”
“그거야 알 수가 없지요. 기억을 못 하는데 알 수가 있겠습니까?”
“며칠 전이나 몇 주 전이라고 보면 될까요? 아니면 몇 달 전인가요?”
“정확히 알 수가 없어요.”
“이 문제가 생긴 지 1년 이상은 되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 정도인 것 같습니다.”

헨리는 27세 때 뇌 수술을 하면서 뇌의 일부를 절제한 이후 단기기억이 상실된 상태로 살고 있다. 65세 된 헨리의 단기기억 상실의 실상은 이렇게 묘사된다.

“어제 뭘 했는지 아십니까?”
“아니요”
“오늘 오전에는요?”
“그것도 기억 못 합니다.”
“점심때 뭘 드셨는지 말씀해주시겠어요?”
“솔직히 말해서 모릅니다.”

헨리 몰레이슨(Henry Molaison 1926.2.26.~2008.12.2.)은  H.M.이라는 이니셜로만 알려지다가 사망한 다음에야 본명이 공개됐다. 헨리 몰레이슨은 청소년 시절에 시작된 간질 증세가 너무 심해져서 일상생활을 하기 어려울 정도가 되자, 27세인 1953년 9월 1일 뇌 일부를 절제했다.

간질 증세는 크게 호전됐지만, 수술 이후 단기기억이 상실되는 부작용을 겪는다. 수술 이전에 경험한 사건이나, 인물 등은 보통 사람들처럼 기억해낸다.

수잰 코킨 지음, 이민아 옮김 / (주)알마, 값 24,800원

수잰 코킨 지음, 이민아 옮김 / (주)알마

단기기억 없이 무려 55년을 살았던 헨리 몰레이슨은 뇌과학 연구 발전에 크게 기여하고 82세로 사망했다. 지금까지 알려졌던 기억에 관한 모든 내용보다, 헨리를 통해서 밝힌 연구 내용이 더 많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이다.

수잰 코킨은 대학원생 시절부터 헨리 몰레이슨을 무려 46년 동안 연구한 MIT 뇌인지과학과 행동신경과학 명예교수이다. 그녀의 연구는 HM과 함께 성장했으며, 인생은 HM과 함께 늙어갔다.

인공지능과 함께 발전한 뇌과학

코킨이 쓴 ‘영원한 현재 HM(원제 Permanent Present Tense)’은 인간의 기억형성 메커니즘에 대한 흥미로운 실험 내용과 경험으로 가득하다. 간단히 요약하면 기억은 컴퓨터가 작동하는 원리와 매우 비슷하다. 모두 3단계 과정을 거친다.

1단계는 정보를 부호로 만드는 작업이다. 가공되지 않은 상태의 경험 데이터를 뇌와 호환되는 포맷으로 변환한다.  2단계는 나중에 사용하기 위해 정보를 저장하는 처리 과정이다.  3단계는 저장소에서 필요한 정보를 인출하는 처리 과정이다.

헨리 몰레이슨의 뇌는 이 중 1단계 과정을 담당하는 기능이 사라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인공지능과 뇌과학은 서로 영향을 주면서 발전했다. 인간의 뇌가 정보처리하는 방법을 본 딴 알고리즘으로 방향을 바꾼 인공지능은 지금 우리가 목격하듯이 엄청난 성공을 거두고 있다. 컴퓨터 사이언스 역시 뇌과학 연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학자들은 ‘정보처리’라는 개념을 도입해서 인간의 ‘학습’과 ‘기억’을 설명하고 연구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과학기술은 주로 인간의 ‘육체노동’을 해방시켰다. 지금 엄청난 속도로 발전하는 인공지능은 인간의 ‘지식 노동’을 해방시키고 있다. 인간의 독특한 능력이라고 생각했던 지적 활동 중 상당 부분은 컴퓨터가 훨씬 빠르고 정확하게 잘 한다.

인간의 기억에 큰 관심이 쏠리는 또 다른 이유는 ‘과연 인간이 무엇인가?’ 하는 정체성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기억하지 못하는 인간이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을까? 상상이 잘 안되는 질문이다. 정체성이란 자신의 개인사를 토대로 구성하는 이야기를 통해 만들어진다. 그런데 자기가 경험한 일을 엮어 이야기로 구성할 수 있을 만큼 머릿속에 오래 남겨둘 능력이 없어진다면 어떨까?

헨리 몰레이슨은 ‘단기기억’이 사라진 채로 살았다. 여기에서 말하는 ‘단기’는 불과 수십 초를 말한다.

강렬한 감정이 기억력을 높인다 

그러나 수잰 코킨이 쓴 기록을 보면, 그렇게 간단한 것 만은 아니다. 헨리 몰레이슨은 뇌 수술을 받기 전 청소년 시절에 겪었던 일 중 두 가지 일들은 매우 선명하게 기억했다. 그중 하나는 담배를 피웠던 것이다. 다른 하나는 소형 비행기를 처음 타보고 하늘을 날았던 기억이다. 교관이 하던 말, 비행기의 색깔, 시간, 장소, 느낌 등을 정확히 기억해냈다.

저자는 ‘감정적으로 매우 흥분된 상태’의 경험이기 때문에 특별히 선명하게 기억에 남아있다고 본다.

단기기억이 사라졌지만, 예외적인 사례가 여럿이다. 1970년 임상연구센터에 입원하기 위해 차를 타고 가던 헨리는 자동차 사고를 목격한다. 비 오는 날, 앞서가던 승용차가 빙글 돌더니 도로 오른쪽 경사벽을 들이받고 왼쪽으로 기울다가 간신히 섰다. 헨리와 함께 가던 운전자 토이버는 즉시 내려서 사고 차량에 갇혀 울고 있는 젊은 여성과 어머니를 안심시키고 사고 난 승용차를 갓길에 세우도록 도와줬다.

비에 젖은 토이버가 돌아와서 헨리와 함께 다시 차를 몰고 지나갔다. 사고 발생 15분쯤 지났을 때도 헨리는 사고 내용을 비교적 잘 기억했다. 감정적으로 매우 격렬한 체험이기 때문이다. 보행기를 모는 것 같이 ‘몸으로 기억하는’ 기능도 그대로 유지된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수십 년 간 살았던 자택의 공간구조도 정확히 그려냈다. 집안을 수없이 옮겨가면서 몸으로 체득된 공간지각이 정확히 장기기억 속으로 입력됐기 때문이리라.

헨리가 2008년 12월 2일에 사망했을 때, 코킨과 연구팀은 헨리의 뇌를 9시간 동안 MRI로 스캔했다. 뇌를 적출해서 방부처리한 뒤에 젤라틴을 입혀 냉동처리했다. 이 스캔 자료는 누구든지 웹사이트를 통해 열람할 수 있다. (http://thebrainobservatory.org ‘project HM’ 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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