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ptember 20,2019

피아니스트를 꿈꾼 양자이론 개척자

노벨상 오디세이 (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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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7년 어느 날, 젊은 학생 한 명이 뮌헨대학의 물리학 교수 필립 폰 욜리의 방문을 두드렸다. 열역학 이론을 전공하는 그 학생은 박사 학위에 대한 상담을 위해 욜리 교수를 찾아온 것이었다. 지도 교수였던 욜리는 그 학생에게 전공을 바꿀 것을 권했다.

열역학의 기본 원리들이 이미 거의 모두 발견되었으니 앞으로 더 이상 연구할 만한 주제가 없다는 게 이유였다. 그러나 그 학생은 지도 교수의 충고를 무시했다. 심지어 그는 다음 해에 베를린대학으로 아예 옮겨 버렸다.

그곳에서 헬름홀츠와 키르히호프 교수의 가르침을 받은 그는 1879년 6월 열역학에 관한 논문으로 당당히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 학생이 바로 양자가설을 발표해 근대 물리학의 새로운 전기를 가져온 독일의 물리학자 막스 플랑크다.

양자이론을 제안하고 발전시킨 공로를 인정받아 1918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막스 플랑크. ⓒ German Federal Archive

양자이론을 제안하고 발전시킨 공로를 인정받아 1918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막스 플랑크. ⓒ German Federal Archive

막스 플랑크는 1858년 4월 23일 독일의 북부 지방인 키일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키일대학의 헌법학 교수로서, 독일의 민법을 만드는 데 참여한 적이 있다. 학창 시절 모든 과목을 골고루 잘했던 플랑크는 특히 음악을 매우 좋아했다.

유명한 물리학자가 된 후에도 그는 매일 피아노를 치며 휴식을 취했으며, 특히 슈베르트와 브람스의 작품을 즐겼다. 한때 피아니스트를 꿈꾸기도 했던 그는 김나지움을 졸업한 후 대학에 진학할 때 많은 고민 끝에 물리학을 선택했다. 물리학이야말로 자신의 독창성을 가장 잘 펼쳐 보일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기 때문이다.

자신의 고집대로 박사학위를 받은 플랑크는 교수자격시험을 통과한 뒤 뮌헨대학의 객원강사가 되었다. 1885년 키일대학의 수리물리학 부교수로 임명되었으며, 1888년에는 베를린대학으로 자리를 옮겼다. 스승이었던 키르히호프가 세상을 떠나자 후임으로 임명된 것이다.

포괄적 흑체복사 설명 위해 가설 발표

1894년에는 헬름홀츠마저 세상을 떠났는데, 이 무렵부터 그는 흑체 복사 연구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흑체란 빛을 접할 때 반사하지 않고 100%를 흡수하는 물체다. 어떤 물체도 완벽하게 흑체일 수는 없는데, 블랙홀이 그중 가장 완벽에 가까운 흑체로 여겨진다.

그런데 흑체를 이용해 연구하면 일정한 온도의 물체가 방출하는 복사열을 정밀하게 측정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당시 전기공업을 선도하고 있던 독일은 미국에서 에디슨이 백열등을 발명하자 그에 대응하기 위한 기초과학의 개발이 시급했다.

특히 전등의 필라멘트 색깔이 온도에 따라 왜 변화하며 어떤 경우에 최대의 에너지를 낼 수 있는지가 중대한 관심사였다. 그 같은 기초과학 연구를 위해 독일은 1887년에 제국물리기술연구소(PTR)를 설립하기까지 했다.

선수를 친 것은 헬름홀츠의 조수로서 열복사에 대한 연구를 이어오던 PTR 소속의 빌헬름 빈이었다. 그는 흑체를 가지고 다양한 실험을 수행해 1893년 복사의 변위법칙을, 1896년에는 복사의 분포식을 발표했다. 그런데 빈이 발표한 법칙은 짧은 파장의 빛만 설명할 수 있었고 긴 파장의 빛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1900년에 영국의 물리학자 레일리가 긴 파장의 빛을 설명할 수 있는 법칙을 발표했는데, 이후 이 법칙은 더욱 체계화돼 ‘레일리-진스 복사 법칙’으로 불리었다. 하지만 두 법칙 모두 각자의 영역만 설명할 수 있을 뿐 짧은 파장과 긴 파장 전체를 설명할 수 있는 이론은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1900년 12월에 플랑크는 매우 특별한 가설을 발표했다. 빛의 에너지가 연속적인 값이 아니라 일정한 단위의 덩어리로 구성되어 있을 수도 있다는 주장이었다. 그는 파장의 크기에 관계없이 모든 영역에 적용할 수 있는 ‘플랑크 상수’의 관계식도 함께 발표했다.

그의 가설은 혁명적인 제안이었다. 에너지가 연속적인 값을 가지지 않는다는 것은 빛이 파동이 아닐 수도 있다는 의미였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선 빛이 작은 에너지 덩어리의 모임, 즉 입자여야 했다.

독일 과학 발전 위해 나치 정권에 협조

하지만 당시엔 플랑크 자신도 이에 대한 정확한 개념이 없었으며, 고전 물리학으로 설명이 가능할 것으로 생각했을 뿐이다. 1905년에 아인슈타인이 발표한 광양자설은 플랑크의 가설을 뒷받침해주는 유력한 이론이 되었다. 아인슈타인은 이 가설에서 빛이 에너지 덩어리로 구성되어 있다고 본 것이다.

이후 보어가 제안한 원자 모형에서도 플랑크의 양자가설이 사용되었으며, 미국 물리학자 콤프턴은 1923년에 빛을 입자로 간주한 콤프턴 효과를 발표했다. 그리고 1926년에는 하이젠베르크와 슈뢰딩거가 양자현상을 설명하는 이론을 발표함으로써 마침내 양자이론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과 함께 현대 물리학의 양대 산맥을 이루게 되었다.

막스 플랑크는 양자이론을 제안하고 발전시킨 공로를 인정받아 1918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이후 그는 독일 전역에서 강연을 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는데, 이와 관련해 그의 운전기사가 피곤해 하는 플랑크를 대신해 강연했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막스 플랑크는 과학 업적뿐만 아니라 그의 훌륭한 개인적 자질 때문에 동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특히 그는 히틀러가 집권한 이후 유대인 정책을 반대했지만 독일의 과학 발전을 위해 정권에 적극 협력하며 조국을 떠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가정사는 매우 비극적이었다. 그는 슬하에 두 아들과 쌍둥이 딸을 두었는데, 장남은 1916년에 전사했다. 그리고 쌍둥이 딸은 1917년과 1919년에 차례로 사망했으며, 작은 아들은 히틀러의 목숨을 노린 사건에 연루되어 1945년 게슈타포에 의해 처형됐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 플랑크는 미군에 의해 부인과 함께 괴팅겐으로 옮겨진 다음 1947년 89세를 일기로 그곳에서 사망했다. 그의 죽음을 기리기 위해 독일 정부는 카이저빌헬름협회의 이름을 막스플랑크협회로 바꾸었으며, 막스플랑크연구소는 일체 간섭을 하지 않는 운영 철학으로 세계 최다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한 연구기관으로 우뚝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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