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cember 13,2019

과학자 관점으로 조선을 분석하면

과학서평 / 조선시대 과학의 순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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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 살았던 조선시대 과학자들은 어떤 이들이며, 어떠한 삶을 살았을까? 과학은 국경이 없지만 과학자에게는 조국이 있다는 말처럼, 조상 중에 어떤 과학자가 있었는지 돌아보는 것은 과학발전에 중요한 의미가 있다.

2018년 한국과학창의재단이 선정한 우수과학도서 중 하나인 ‘조선시대 과학의 순교자’(이종호 지음)에 실린 13명의 과학자들은 지동설을 주장하다가 화형 당한 브루노처럼 실제로 ‘순교’라는 처형을 당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들의 대부분은 조선시대의 가장 일반적인 방법인 유배를 당한 이들이다.

조선시대에 유배당한 사람은 약 2만 명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주로 지식인으로서 고향을 떠나 외지에서 살면서 다양한 분야에 뛰어난 업적을 이루었다.

정약용과 같은 시대를 살았던 서유구(徐有榘 1764~1845)는 당대 조정에서 정약용보다 더 높은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서유구는 당쟁의 여파가 밀려들자 스스로 유배를 떠나 전국을 돌면서 백과사전 같은 ‘임원경제지’를 내놓았다.

정약용과 서유구는 모두 18년간 유배생활을 했다. 차이는 정약용은 말년에 유배당한 것이고 서유구는 중년에 유배를 마치고 말년에 조정으로 들어왔다. 서유구는 농학, 천문학, 공학, 수학, 요리, 의학, 어업, 예술, 상업 등 16분야에 걸쳐 113권의 저서를 남겼다.

그는 ‘사대부들의 일상을 개혁한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던 만큼, 사대부에 대한 비판 또한 통렬했다. 그는 조선의 백성이 열악한 삶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데는 집권계층인 사대부의 책임이 있다고 정면으로 도전했다. 특히 사대부가 농업기술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공업기술도 마음을 두려 하지 않으며, 굶어 죽을지언정 장사에는 손을 대려 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이종호 지음 / 사과나무 값 15,000원 ⓒ ScienceTimes

이종호 지음 ⓒ ScienceTimes

또한 타성에 젖어 손 하나 까딱 않고 메뚜기처럼 양식을 축내면서, 일하는 농부를 감독한다고 술병을 끼고 사는 ‘밥도둑’이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사대부들이 ‘칼만 안 들었을 뿐 날강도’라고 생각했던 서유구가 볼 때 조선이 가난한 나라가 되는 것은 너무나 뻔한 이치였다. 양반계층에 이런 백수가 50%나 된다는 서유구의 고발은 현실감각을 상실한 채 지식이라는 탑 속에 갇혀 일생을 보내는 현대의 일부 지식인들에게도 큰 경종이 된다.

실제로 이 책의 곳곳에는 조선이 왜 멸망했는지 단서가 될 만한 내용들이 숨어 있다. 젊어서 관직을 포기하고 30여년 동안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실학의 이상을 택리지(擇里志)에 담은 이중환(1690~1756)은 당시 지배층인 사대부의 뼛속까지 스며있는 당쟁의 폐해를 지적했다.

당쟁이 처음에는 사소한 것에서 발생했으나, 자손들이 조상의 당론을 고수하며 왔기 때문에 200년 동안 굳을 대로 굳어 깰 수 없는 지경이 됐으며, 나라 전체가 당쟁으로 피폐해졌다고 판단했다. 택리지는 유토피아처럼 살기 좋은 곳을 찾아나서는 매우 특이한 책이었기 때문에 조선시대 후기에는 베스트셀러로 등극하기도 했다.

당쟁과 사대부의 폐해를 비판한 과학자들

조선시대에 가장 많은 책을 쓴 최한기(崔漢綺 1803~1877)는 물려받은 재산을 가지고 관직에도 나가지 않고 평생 책을 구입하면서 저술에 몰두해 1000여권의 책을 썼으며 이중 120여권이 남아서 전해진다. 중국에서 새 책이 들어오면 먼저 최한기의 손을 거쳤다고 할 만큼 책 구입에 힘을 쏟았다. 서양 과학을 중국어로 번역한 과학책을 통해서 그는 뉴턴의 중력을 비롯한 서양 과학기술을 받아들였다.

가장 최근의 인물로 저자는 김용관(金容瓘 1897~1967)을 꼽았다. 김용관은 과학운동의 기수라고 할 수 있다. 일본에서 요업을 배우다가 3.1운동 이후 귀국한 김용관은 국민을 깨우치려면 과학에 대해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 본격적으로 과학운동에 뛰어든 인물이다.

김용관은 1924년 발명학회를 발족하고, 1933년 6월 과학조선을 창간했다. 과학조선은 1944년까지 발행됐다. 아울러 1934년 2월 28일에는 과학의 날 행사를 논의하는 모임을 열었다. 당시 그가 주장한 과학의 날은 다윈이 사망한 4월 19일이었다. (현재 과학의 날은 4월 21일이다.) 1934년 1회 과학의 날 행사는 1주일 이상 과학강연회 좌담회 견학 등으로 진행됐다. 여세를 몰아 김용관은 같은 해 7월 과학지식보급회 창립총회를 개최했다.

1935년에 열린 2회 과학의 날 행사는 한국 역사상 가장 성대한 과학행사라는 평가를 받았다. 서울에 있는 거의 모든 자동차인 54대가 동원돼 카퍼레이드를 벌이고 군악대가 과학의 노래를 연주했다. 카퍼레이드에는 ‘한 개의 시험관이 전 세계를 뒤집는다’ ‘과학 대중화를 촉진하라’는 표어를 붙였다.

김용관이 활발하게 진행한 발명 및 과학문화 운동은 오늘날의 과학문화운동에 큰 영감을 주었을 것이다.

조선시대의 위대한 과학자들은 대부분 핍박을 받았다. 그렇지만 핍박을 하게 만든 권력구조는 절대 오랫동안 지속될 수 없다. 여기에서 순교의 모순이 나타난다. 순교는 엄청난 토대가 되어서 그 분야의 발전을 이끌어낸다. 우리나라의 과학기술이 오늘날처럼 발전한 것은 조선시대 학자들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조선시대 과학자가 순교자가 될 수밖에 없는 구조는 다른 각도에서 보면 조선이 멸망한 원인을 과학적 측면에서 돌아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을 쓴 이종호는 고려대 건축공학과를 졸업하고 프랑스 페르피냥 대학에서 과학국가박사 학위를 받았다. 역피라미드 공법 등 10여개 특허를 출원했으며 100여 권의 책을 내면서 과학대중화에 앞장서고 있는 과학저술가이다. 한국과학저술인협회 회장을 맡고 있다.

이종호가 꼽은 이외의 과학순교자들은 최부, 허준, 전우형, 박제가, 정약전, 정약용, 김정희, 지석영 등이다. 최무선, 세종대왕, 이순지 등은 과학자로서는 업적이 탁월하지만 비교적 순탄하게 살았기 때문에 ‘순교자’의 목록에는 올리지 않았다고 저자는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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