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uly 16,2019

기후변화를 최초로 예언한 과학자

노벨상 오디세이 (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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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말 영국 의학전문지 ‘랜싯’은 2030년부터 전 세계에서 매년 25만 명이 사망할 것이라는 경고를 담은 보고서를 펴냈다. 여기서 지목한 사망 원인은 바로 기후변화다. 기온 및 수온 상승으로 오염물질 및 감염병 등이 증가하면서 건강을 잃고 사망하는 사람들만의 숫자다.

그뿐만이 아니다. 온실가스 상승으로 인한 기후변화는 홍수, 가뭄, 폭염, 한파 등의 기상이변을 훨씬 더 강하고 자주 발생시킨다. 이 같은 기상이변 탓에 지난해 전 세계에서 약 5000명이 사망했다.

또한 지구온난화는 인류에게 무서운 질병을 발생시킬 수도 있다. 지난 2014년 캐나다 북부의 영구동토층에서 700년 전의 순록 배설물이 녹은 채 발견됐다. 그런데 이 배설물 속에서 미지의 바이러스가 검출된 것. 그 바이러스의 정체는 예전에 이미 멸종했던 바이러스였다. 지구온난화로 인해 이처럼 얼어붙어 있던 고대 미생물이 다시 깨어날 경우 페스트나 스페인 독감 같은 대재앙이 재현될 수 있다.

기후변화에 대한 최초의 논문을 쓴 스반테 아레니우스(오른쪽). 왼쪽은 그의 전리설을 적극 지지했던 오스트발트. ⓒ public domain

기후변화에 대한 최초의 논문을 쓴 스반테 아레니우스(오른쪽). 왼쪽은 그의 전리설을 적극 지지했던 오스트발트. ⓒ public domain

요즘은 지구온난화 및 기후변화의 주범이 온실효과 때문이라는 사실이 널리 알려져 있다. 이러한 온실효과의 개념을 처음 발견한 이는 프랑스의 물리학자인 요셉 푸리에다.

그는 1822년 지구의 대기에 의해 태양열이 머물게 되면서 지구의 온도가 태양에서 오는 에너지보다 높다는 이론을 제시했다. 1856년에는 아일랜드의 존 틴들이 이산화탄소 등의 가스가 열을 가두는 효과가 있다는 실험적 증거를 제시했다.

그 후 온실효과가 가져오는 지구의 기온 상승에 대해 최초로 상세하게 밝혀낸 이가 바로 1903년 노벨 화학상을 수상한 스반테 아레니우스다. 그는 이산화탄소 농도가 2배 상승하면 지구 온도는 5~6℃ 상승하게 된다는 내용의 논문을 1896년 스톡홀름 물리학회에 기고했다.

전리설에 관한 업적으로 노벨 화학상 수상

이 논문은 기후변화에 대한 최초의 과학논문이자 이산화탄소를 최초로 정량화한 논문이다. 또한 그는 지구를 온실에 비유함으로써 최초로 온실가스라는 단어를 사용한 사람이기도 하다.

현대 기상학자들조차 그처럼 복잡한 분석을 하기 위해선 슈퍼컴퓨터를 사용하는 모델링이 필요하다. 아레니우스는 그 작업을 노트와 연필만 가지고 혼자서 해냈다. 그럼에도 그는 이산화탄소의 농도 증가 폭과 온도 상승의 상관 수치 등을 놀라우리만치 정확하게 예측해냈다.

하지만 그의 주장은 당시 주류 과학자들에게 배척당했다. 이산화탄소가 증가할지라도 지구 전체 표면의 70%를 차지하는 거대한 대양이 흡수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정작 그에게 노벨상을 안긴 연구는 이와 전혀 관련 없는 ‘전리설’이었다.

아레니우스는 1859년 2월 19일 스웨덴 웁살라 부근의 비크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대대로 농사를 지어오던 집안이었으나 그의 부친은 측량기사로 일하다가 웁살라 대학의 직원으로 근무했다. 때문에 그의 가족은 그가 태어난 이듬해 웁살라로 이사했는데, 그는 어릴 적부터 신동이라는 소리를 들을 만큼 산술 계산에 소질을 보였다.

17세 때 웁살라 대학에 입학한 그는 물리학을 전공한 후 박사학위 논문을 위해 화학과의 클레베 교수 밑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그의 지도 방식에 흥미를 느끼지 못해 1881년 스톡홀름으로 가 과학 아카데미의 에드룬드 교수 밑으로 들어갔다.

에드룬드는 아레니우스의 자질을 알아차리고 독자적인 연구를 허락했으며, 그는 전해질이 물에 용해될 때 전기적으로 반대되는 양극과 음극 이온으로 나뉘거나 분리되는 정도가 다양하다는 연구결과를 1884년 박사학위 논문으로 제출했다.

전기해리이론 혹은 전리설로 불리는 그의 연구결과는 이온화설의 기초를 이루는 획기적인 업적이었다. 그러나 당시 심사위원들은 최고 낮은 등급으로 그의 박사학위 논문을 통과시켰다. 그의 주장이 이단에 가깝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특히 그의 박사학위 논문 최초 지도 교수였던 클레베의 반대가 심했다.

하지만 그의 논문을 접한 러시아 리가공업대학의 오스트발트 교수는 직접 웁살라대학을 방문할 만큼 아레니우스의 업적을 극찬했다. 이후 삼투압을 연구하던 네덜란드의 반트호프 등과 만나게 되면서 아레니우스의 전리설은 한층 더 빛을 발하게 됐다.

조국을 버리지 않은 애국자

1902년 영국 왕립학회의 데이비 상을 수상한 아레니우스는 1903년 노벨 화학상 후보에 올랐다. 공교롭게도 노벨 화학상위원회의 위원장으로 그의 스승인 클레베가 선정됐다. 하지만 처음과는 달리 클레베는 그의 노벨상 수상을 지지했으며, 결국 그는 스웨덴인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가 될 수 있었다.

아레니우스는 죽을 때까지 조국을 버리지 않은 애국자로도 유명하다. 전리설 발표 후 그의 명성이 한창 올라갈 무렵 독일의 한 대학으로부터 교수직을 제안받았지만, 그는 떠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스웨덴 왕립공과대학의 조교수 자리를 택했다.

또한 노벨상을 받은 후인 1905년에는 독일 베를린대학에서 그를 교수로 초청했다. 하지만 그때 역시 조국인 스웨덴에 남기 위해 거절했다. 이 소식을 들은 스웨덴 국왕은 노벨물리연구소를 설립한 후 아레니우스를 연구소장으로 임명했다.

그는 자신이 확립한 물리화학 분야 외의 다른 과학적 주제에도 다양한 관심을 보였다. 오로라의 기원에 대한 가설, 화산활동의 원인에 대한 분석, 면역 작용의 화학적 탐구 등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기후변화에 대한 최초의 과학논문을 남긴 그는 온실효과가 인류에게 축복이라고 생각했다. 기온이 상승하면 인류의 생활 반경이 그만큼 더 넓어지고 먹을거리도 풍성해질 것이라고 추측해서다.

지구온난화에 대한 아레니우스의 그 같은 낙관론엔 이유가 있었다. 그는 현저한 기후변화가 나타나기까지 적어도 1000년 이상의 시간이 필요할 것이라고 봤기 때문이다. 당시의 관점에서 정밀한 계산을 추구했던 그조차도 지금과 같은 화석연료 사용량의 급증을 미처 예상하지 못한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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