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ptember 19,2019

달에는 바다가 없는데, 왜 바다라고 부를까?

달 표면 작명에 얽힌 이야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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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여느때와 같이 늦게 퇴근하던 날이었다. 무심코 올려다 본 밤하늘에 보름달이 휘영청 떠 있었다.

그날도 어김없이 초미세먼지가 뒤덮은 하늘이었지만, 달빛이 교교하게 온 하늘을 환하게 밝히던 모습에 필자는 깊은 인상을 받았다.

우리는 보통 반가운 보름달에서 방아를 찧는 옥토끼 모습을 본다. 하지만 초점을 조금 돌리면 두 개의 고리 머리를 한 선녀의 모습으로 금세 변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우리나라, 중국 그리고 아메리카의 아즈텍인들은 달에서 토끼나 선녀를 보았다. 하지만 서양인들은 달에서 남자의 얼굴을 보았다.

무엇을 보든 간에, 사람들이 달을 보고 특별한 이미지를 떠올리는 이유는 바로 달 표면을 채우고 있는 얼룩 무늬 때문이다. 우리는 토끼나 선녀를 그려보는 수준이었지만, 서양의 천문학자들은 이 얼룩무늬의 진짜 정체에 관심이 많았다.

달의 외형과 표면을 탐구하고 기록으로 남기는 연구를 셀레노그래피(selenography) 라고 부르는데, 우리 말로는 월면학(月面學) 혹은 월면 지리학으로 번역한다. 이 명칭은 달의 여신 셀레네의 이름에서 따왔다.

셀레노그래피(selenography); 월면 지리학 ← 셀레네(Selene); 달의 여신

지오그래피(geography); 지리학 ← 가이아(Gaea); 대지의 여신

달의 얼룩무늬를 관찰하고 기록하는 작업은 17세기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길버트 달 지도는 이 정도 수준이다.  ⓒ 박지욱 / ScienceTimes

길버트 달 지도는 이 정도 수준이다. ⓒ 박지욱 / ScienceTimes

처음으로(1603년 이전으로 추정) 달의 지도를 남긴 사람은 엘리자베스1세 치세에 살았던 길버트(William Gilbert)다. 그는 의사이자 지구 자기장의 발견자로도 유명하다.

당시는 망원경이 아직 없던 시대라 길버트는 ‘맨 눈으로’ 관측한 달 표면을 지도로 남겼다.

그는 달의 얼룩무늬를 몇 개의 덩어리로 나누어 지명까지 붙였다. 이를테면 동부(Regio Magna Oreinetalis), 서부(Regio Magna Occidentalis), 남부(Continens Meridionalis), 북섬(insula Borealis), 길다란 섬(Insula Longa), 브리턴섬(Britannia) 등등으로 말이다.

길버트가 만든 최초의 달 지도는 그 자체로도 의미가 있지만, 특별히 더 흥미로운 부분이 있다. 지금 우리가 바다로 부르는 어두운 지역을 땅으로, 밝은 지역을 바다로 해석했다는 점이다.

길버트의 달 지도에서 말하는 ‘동쪽’과 ‘서쪽’은 달이 뜬 지구 하늘에서의 동쪽과 서쪽에 해당한다. 오늘날의 달 지리 개념과는 정반대이다.

해리엇의 달 지도 ⓒ 위키백과 자료

해리엇의 달 지도 ⓒ 위키백과 자료

1605년에는 영국의 천문학자인 해리엇(Thomas Harriot)이 ‘망원경으로’ 관측한 최초의 달 표면을 그림으로 남겼다. 이는 갈릴레오보다 조금 앞선 시점이었다.

최초의 달 지도인 길버트의 것은 엉성했지만, 해리엇의 것은 제법 지도다웠다. 이때부터 달은 어엿한 지도 하나를 가지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해리엇은 길버트와 달리 달의 어두운 곳을 바다로, 밝은 곳을 땅으로 생각했다.

해리엇은 또한 달의 바다는 진짜 바다이고, 땅에는 들판, 숲도 있다고 믿었다. 당대의 학자들은 달을 또 하나의 지구라고 여겼다.

1609년에는 그 유명한 이탈리아의 갈릴레오(Galileo Galilei)가 달 표면 관측 기록을 남겼다.

갈릴레오는 달의 어둡고 편평한 지역을 진짜 물이 가득한 바다로, 충돌구들이 박힌 밝은 지역을 대륙으로 여겼다. 하지만 그 명성과는 달리, 갈릴레오의 달 지도는 디테일이 부족해 해리엇의 지도보다도 완성도가 떨어졌다고 한다.

랑그렌의 달 지도 ⓒ 위키백과 자료

랑그렌의 달 지도 ⓒ 위키백과 자료

1645년에는 네덜란드의 랑그렌(Michael Florent van Langren)이 달 지도를 남겼다.

랑그렌은 자신이 망원경으로 관측한 달 표면의 바다, 산, 산맥, 곶 등지에 진지하게 지명을 붙였다.

그는 우선 큰 충돌구(crater)에는 가톨릭을 믿는 왕족이나 가톨릭의 성인 이름을 붙였다. 당시 유럽은 종교개혁 막바지 시기였는데, 랑그렌은 아마 독실한 가톨릭 신봉자였는지도 모른다.

랑그렌은 다음으로 작은 충돌구에는 과학자들의 이름을, 바다에는 (당시까지 알려진) 지구의 바다 이름을 라틴어로 붙였다.

헤벨리우스의 달 지도 ⓒ 위키백과 자료

헤벨리우스의 달 지도 ⓒ 위키백과 자료

그로부터 2년 후인 1647년, 랑그렌의 라이벌인 폴란드의 헤벨리우스(Johannes Hevelius) 역시 달에 붙일 지명에 대해 진지한 고민을 했다.

사람들은 그에게 성서에 나오는 인명 혹은 철학자나 과학자의 인명을 추천했지만, 헤벨리우스는 (랑그렌과는 달리) 굳이 달에까지 종교적인 인명을 쓸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지금도 종교적인 이름은 사용할 수 없다).

그는 또한 살아있는 과학자나 철학자의 이름 역시 피하려 했다. 생존 인물의 이름을 달의 지명에 붙인다면, 이런저런 말이 많을 것으로 걱정했기 때문이다.

헤벨리우스는 우선 달의 산, 산맥, 계곡에 지구의 산, 산맥, 계곡의 이름을 붙였다. 이는 현재까지 이어져 오늘날 달에서 알프스, 피레네, 코카서스, 쥐라, 아틀라스 산맥 등의 지명을 발견할 수 있다.

바다에는 당대가 아닌, 그리스-로마 문화권에서 불렸던 바다의 이름을 라틴어로 붙였다.

이렇게 당대의 지식인들에 의해 지속적으로 진행되던 달 지도 작업은 1651년 그 결실을 맺는다.

리치올리의 달 지도 ⓒ 위키백과 자료

리치올리의 달 지도 ⓒ 위키백과 자료

이탈리아의 천문학자 겸 사제인 리치올리(Giovanni Riccioli)는 그때까지의 작업을 집대성하여 정교한 달 지도를 만들어냈다. 이는 오늘 날 달 지리학의 근간으로 꼽힌다.

리치올리는 헤벨리우스와 달리 달 충돌구에 과감하게 과학자와 철학자의 이름을 붙였는데, 이러한 전통은 오늘날까지 이어져 현재 달의 충돌구에는 인명을 쓴다.

재미있는 것은 리치올리가 붙였던 충돌구 이름 중에 당시 살아있던 헤벨리우스도 포함됐다는 점이다. 과연 헤벨리우스는 이에 대해 무슨 생각을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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