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ch 24,2019

정확한 표준 단위가 중요한 이유

과학기술 넘나들기 (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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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월 중순 프랑스에서 열린 제26차 국제도량형총회(CGPM)의 의결에 따라서, 질량을 비롯해 전류, 온도, 몰(mol) 등 국제단위계(SI) 기본단위 7개 중 4개 단위의 정의가 바뀌게 되었다.

이는 내년 5월 20일부터 적용되는데, 당장의 일상생활에 가시적인 변화가 오는 것은 아니지만, 첨단과학기술에서는 대단히 큰 의미를 지닌다.

도량형의 통일 및 표준의 관리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정치, 경제적으로 늘 중요한 관건이었다.

도량형을 통일했던 중국의 진시황 ⓒ Wikipedia

도량형을 통일했던 중국의 진시황 ⓒ Wikipedia

최초로 중국을 통일했던 진시황은 도량형 또한 일찍이 통일한 바 있다. 조선시대의 암행어사들은 말과 역졸을 동원할 수 있는 신분증인 마패(馬牌)뿐 아니라, 유척(鍮尺)이라 불리는 놋쇠로 된 자를 반드시 지니고 다녔다. 유척은 세금 징수를 위한 잣대나 형구의 규격 등을 측정함으로써, 지방관리들의 전횡을 감시하기 위한 도량형의 표준 역할을 하였다.

현재 도량형의 세계 표준으로 쓰이는 미터법 역시 정치적 맥락과 관련이 깊다. 오늘날의 미터법은 18세기 말 프랑스 대혁명의 열기에 의하여 혁명 정부의 사업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당시 정부의 위탁을 받아 사업을 추진한 파리과학아카데미의 인물들은 라부와지에(Antoine Laurent Lavoisier; 1743-1794), 쿨롱(Charles-Augustin de Coulomb; 1736-1806), 라플라스(Pierre Simon de Marquis Laplace; 1749-1827)같은 당대 최고의 프랑스 과학자와 수학자들이었다. 추진위원장은 라그랑주(Joseph Louis Lagrange; 1736-1813)가 맡았다.

미터법 제정 추진위원장이었던 프랑스의 과학자 라그랑주 ⓒ Wikipedia

미터법 제정 추진위원장이었던 프랑스의 과학자 라그랑주 ⓒ Wikipedia

미터법 제정의 가장 큰 관건은 ‘길이의 기준을 무엇으로 삼을 것인가’였다. 학자들은 논란 끝에 지구 자오선 길이의 4천만분의 1, 즉 북극에서 적도까지 거리의 1천만분의 1을 ‘1m’로 하기로 결정하였다.

다른 쉬운 기준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어렵게 실측을 해야만 하는 지구 자오선 길이를 기준으로 삼은 것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즉 당시 미터법 제정 추진위원회는 프랑스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통용될 수 있는 도량형의 표준을 도모하였는데, ‘과연 다른 나라들도 순순히 따라줄 것인가’가 고민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지구 자오선 길이의 측량과 같은 어려운 작업을 완수하여 이를 바탕으로 미터법을 제정한다면, 다른 나라들도 납득하고 받아들일 수 있지 않겠느냐’고 생각했던 것이다.

물론 북극에서 적도까지의 거리를 모두 잰 것은 아니고, 실제로 측량한 것은 위도 10도 차이인 프랑스 북부의 덩케르크부터 스페인의 바르셀로나까지였다. 하지만 이 작업도 쉽지는 않았다.

측량대원들은 무려 8년에 걸쳐서 전염병으로 죽기도 하고 스페인군의 오해로 감옥에 갇히기도 하는 등 온갖 고비를 넘기면서 겨우 측량작업을 마쳤다.

길이 표준 단위의 확립과 더불어, 질량 표준 단위도 정립되었다. 섭씨 4도의 물 1리터를 1kg으로 정한 것이다.

그동안 질량의 표준을 제공했던 킬로그램원기(복제품) ⓒ Wikimedia

그동안 질량의 표준을 제공했던 킬로그램원기(복제품) ⓒ Wikimedia

그리고 길이와 질량의 표준 원기(原器)를 백금과 이리듐의 합금으로 제작하여 파리에 보관하고, 복제품을 다른 나라에 공급함으로써 미터법은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었다. 미터법은 1875년 국제적인 미터조약에 의해 국제통일 단위계(SI)로 인정되었고, 오늘날 세계의 대부분의 나라들이 이를 따르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지구의 모습 자체가 불변이 아닌데다가, 길이와 질량의 원기 역시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미세하게 변한다는 문제가 있어 새로운 기준이 필요해 졌다.

사실 1m의 기준은 벌써 두 차례나 바뀐 바 있다. 한때 크립톤86(86Kr)에서 방출되는 주황색 스펙트럼선의 파장을 기준으로 정의하였다가, 지금은 다시 진공에서의 빛의 속도를 기준으로 재정의하였다. 즉 1983년 제17차 국제도량형총회의 결의에 따라, 1미터는 빛이 진공에서 299,792,458 분의 1초 동안 진행한 경로의 길이로 정의됐다.

프랑스 파리에 있는 최초의 미터원기(metre-etalon) ⓒ GNU Free

프랑스 파리에 있는 최초의 미터원기(metre-etalon) ⓒ GNU Free

그런데 빛의 속도에 의하여 길이를 측정하자면 그 짧은 시간 역시 표준이 대단히 중요하다. 하지만 기존에 기준이 되었던 지구의 자전은 여러모로 기준으로서 적합하지 않아 시간에 대한 표준도 여러 번 바뀌어 왔다.

즉 1초(秒, second)의 정의는 원래 평균태양일의 1/86,400였다. 그러나 지구의 불규칙한 자전으로 평균태양일 자체를 정확히 정의하기 쉽지 않은데다가, 조석력의 영향으로 자전 주기가 조금씩 느려지는 문제마저 있다.

따라서 원자 단위로 1초의 정의를 다시 정립하는 작업이 진행되었다. 그 결과 ‘바닥상태에 있는 세슘(Cs) 133 원자가 2개의 초미세구조 사이에서 전이(轉移)할 때의 복사 또는 흡수하는 전자기에너지 주기의 9,192,631,770배’로 1초가 재정의되었다.

세슘원자시계를 살펴보고 있는 미국표준기술연구소(NIST)의 물리학자들 ⓒ Wikipedia

세슘원자시계를 살펴보고 있는 미국표준기술연구소(NIST)의 물리학자들 ⓒ Wikipedia

한편 길이, 시간과 달리 그동안 바뀌지 않았던 질량의 표준 단위, 즉 1kg의 기준 역시 최근 국제도량형총회의 의결에 따라, 킬로그램 원기가 아니라 불변의 물리 상수인 플랑크 상수(h)를 기준으로 바뀌게 됐다.

양자역학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플랑크 상수로 질량의 표준 단위를 정의할 수 있게 된 것은, ‘키블 저울’이라 불리는 정밀한 저울 덕분이다.

이를 바탕으로 ‘기계적인 일률과 전기적인 일률은 같다’는 원리를 이용해 질량 표준 단위가 정의되었다. 플랑크 상수의 단위인 J·s(줄· 초)는 ㎏·㎡/s으로도 표현할 수 있는데, 미터(m)와 초(s)를 알면 역으로 ㎏을 환산할 수 있다.

앞서 길이와 시간의 기준을 바꿀 수 있었던 것 역시 원자시계 등 정밀 측정기술이 발전한 덕분이다. 보다 정확한 표준단위의 확립은 향후 기초과학과 첨단기술의 발전에 큰 기여를 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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