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칼럼

48년 만에 정체를 드러낸 입자

노벨상 오디세이 (71)

현재까지 과학은 세상에 네 가지 힘이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질량을 지닌 물질이 서로 끌어당기는 힘인 ‘중력’과 전하에 의해 생기는 ‘전자기력’, 원자핵을 만드는 ‘강한 핵력’, 그리고 방사성 붕괴를 지배하는 ‘약한 핵력’이 바로 그것이다.

그중 기본 입자 같은 미소 우주에서 작동하는 강한 핵력과 약한 핵력, 전자기력을 하나의 방정식으로 표현한 것이 바로 입자물리학의 가장 성공적인 이론인 ‘표준 모형’이다. 이 이론에 따르면 쿼크, 렙톤 등과 같은 새로운 입자들이 있어야 하는데, 단 하나의 입자를 제외한 모든 입자는 약 40년 전에 이미 모두 발견됐다.

끝까지 발견되지 않아 입자물리학자들의 속을 태운 그 입자는 바로 ‘신의 입자’로 유명한 힉스 입자였다. 빅뱅 직후 모든 입자에 질량을 부여한 힉스 입자의 존재를 처음 예견한 것은 1964년에 발표된 두 편의 논문이었다.

힉스 입자를 예견한 논문 발표 49년 만에 노벨상을 수상한 피터 힉스 박사. ⓒ The University of Edinburgh

힉스 입자를 예견해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피터 힉스 박사. ⓒ The University of Edinburgh

프랑수아 엥글레르와 로베르 브라우는 새로운 특정 입자가 존재해야만 자연계를 이루는 기본 입자에 질량이 생길 수 있다는 연구 논문을 발표했다. 그 논문이 발표된 직후 영국 에든버러대학의 피터 힉스는 그 과정을 구체화해 특수한 장(場)과 기본 입자의 상호작용을 통해 질량이 생긴다는 내용의 논문을 유럽입자물리연구소(CERN)에 넘겼다.

그런데 CERN의 학술지 편집자는 ‘물리학과 명확한 연관성이 없다’는 이유를 들어 논문의 게재를 거절했다. 결국 피터 힉스는 미국 물리학회의 학술지인 ‘피지컬 리뷰 레터스’에 그 논문을 발표했다.

그로부터 48년이 흐른 후인 지난 2012년 7월, CERN은 피터 힉스와 프랑수아 엥글레르 등의 노과학자들을 초청했다. 엥글레르와 함께 논문을 발표했던 로베르 브라우는 이미 고인이 된 바람에 그 자리에 참석하지 못했다.

이휘소 박사가 힉스 입자라고 명명

CERN이 그들을 초청한 건 힉스 교수의 발표와 일치하는 새 입자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해당 입자가 힉스 입자일 가능성은 99.999994%에 이르렀다.

다음해인 2013년 3월에는 유럽원자핵공동연구소가 힉스 입자라고 공식 확인했으며, 그해 10월 4일에는 일본 도쿄대학과 고에너지가속기연구기구 등의 국제연구팀이 힉스 입자의 질량과 스핀 값 분석을 통해 힉스의 발견을 확정했다.

그로부터 불과 4일 후인 10월 8일 노벨위원회는 피터 힉스와 프랑수아 엥글레르가 2013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로 선정됐다고 발표했다. 그들이 노벨상을 받기까지 최소 몇 년의 시간이 더 걸리리라는 예상을 깬 이례적인 발표였다.

피터 힉스는 1929년 잉글랜드 북동부 뉴캐슬어폰타인이라는 항만도시에서 BBC 방송국 음향기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부친을 따라 이사를 자주 하고 천식이 심했던 탓에 어린 시절에 학교를 다니지 않고 홈스쿨링을 받았다.

그는 청소년기에 브리스톨의 코텀그래머스쿨을 다니면서 그 학교 출신인 양자역학의 권위자 폴 디랙의 영향을 받아 물리학자의 꿈을 가지게 됐다.

킹스칼리지런던 물리학과에 입학한 그는 수석으로 졸업한 후 같은 학교에서 1954년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에든버러대학의 교수로 재직하던 1960년대부터 원자 단위 이하의 보이지 않는 물질의 세계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사실 그는 1961년부터 힉스 입자에 대한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었지만 망설였다. 그러던 어느 날 이휘소 박사와 그의 스승인 클라인 교수가 입자에 대해 새로운 해석을 한 것을 보고 논문을 쓰게 된 것이 바로 그에게 노벨상을 안긴 1964년의 논문이었다.

이 일화는 그가 노벨상을 받은 후 대중들을 대상으로 하는 노벨 강연에서 직접 밝혔다. 이휘소 박사는 그의 연구에 영향을 미쳤으면서, 그 소립자에 힉스라는 명칭을 붙인 장본인이기도 하다. 사실 힉스 입자의 존재를 처음 예측한 이는 피터 힉스 외에도 5명의 물리학자가 더 있다.

그런데 1967년에 이휘소 박사는 피터 힉스와 미지의 입자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후 1972년에 열린 고에너지물리학회에서 ‘힉스 입자에 미치는 강한 핵력의 영향’이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이는 학회에서 처음 힉스 입자라고 명명한 논문으로서, 그 후 이 명칭이 굳어진 것으로 전해진다.

힉스 입자 발견한 인류 최대 실험장치

“내 생전에 이런 일이 생기다니, 정말 믿기 힘들다.”

CERN이 힉스 입자의 발견 사실을 처음 공개했을 때 피터 힉스가 감회에 젖어서 한 말이다. 힉스 입자를 그처럼 발견하기 어려웠던 데는 이유가 있다. 우주가 탄생하던 빅뱅 당시 생성된 힉스 입자는 다른 입자에 질량을 부여하고 순식간에 사라졌기 때문이다.

때문에 힉스 입자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빅뱅과 같은 조건을 재현하는 실험장치를 만들어야 한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인류 역사상 가장 거대한 실험장치로 불리는 CERN의 거대 강입자가속기(LHC)다. 스위스와 프랑스 국경의 지하 175미터에 설치된 이 가속기는 총길이가 무려 27㎞에 달한다.

힉스 입자의 발견으로 우주 역사를 이해할 수 있게 됐다는 찬사를 받았음에도 피터 힉스는 겸손한 과학자로서의 평소 태도를 그대로 지켰다. 노벨상 수상자 발표 직전, 그는 언론의 취재 요청을 피해 휴대전화도 꺼놓은 채 잠적했다. 앞서 1999년에는 영국 정부로부터 기사 작위를 제안 받았으나, 그런 종류의 타이틀은 원하지 않는다며 거절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지난 8월 CERN은 힉스 입자를 발견한 지 6년 만에 이 입자가 ‘바닥 쿼크(Bottom quark)’로 붕괴되는 것을 관측했다고 발표했다. 그동안 표준모형은 힉스 입자가 6종의 쿼크 중 두 번째로 무거운 2개의 바닥 쿼크로 붕괴할 것으로 예측해왔다. 이번 발견으로 표준모형 이론은 더욱 공고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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