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bruary 23,2019

화폐수량설… 금융위기 더 키웠다

정운찬 교수, 화폐에 대한 새로운 해석 촉구

[편집자 註] 인문학과 과학이 서로 협력, 미래를 만들어가는 인문강좌 행사가 최근 줄을 잇고 있다. 가장 주목을 받고 있는 행사는 한국학술진흥재단이 주최하는 ‘석학과 함께 하는 인문강좌’. 학문 간 경계를 넘어, 세상과 대화를 시도하려는 적극적인 노력이 엿보이고 있다. <사이언스타임즈>는 석학들이 진행하는 인문강좌를 연재한다.
FacebookTwitter

석학 인문강좌 화폐가치의 지속적인 하락현상인 인플레이션은 경제의 효율적인 자원배분을 저해하고, 심할 경우 화폐경제 자체의 존립을 위협할 수 있다는 점에서 화폐가치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일은 시대를 막론하고 매우 중요한 과제로 여겨져 왔다.

인플레이션 이론들 가운데 최초의 것이자 가장 오래된 견해로, 물가수준이 화폐량에 의해 결정된다는 ‘화폐수량설’이 있다.

그동안 화폐수량설은 화폐금융이론의 전개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해왔다. 25일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열린 ‘석학과 함께 하는 인문강좌’에서 정운찬 서울대 교수는 “사실 화폐금융론의 역사는 화폐수량설에 대한 지지와 비판, 그리고 해석과 재해석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고 말했다.

화폐수량설은 고전적인 형태든 현대적인 형태든 결과적으로 “화폐는 중요하다”란 결론을 이끌어낸다. “때문에 본원통화의 발행량을 결정하는 중앙은행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주장으로 이어지지만, 최근 자본시장의 성숙과 금융시장의 발달로 화폐공급에 대한 외생성(外生性)에 대한 가정은 점차 생명력을 상실하고 있다”고 정 교수는 주장했다.

“더욱이 최근 서브프라임 위기의 배경이 되는 금융시장에서의 내생적(內生的)인 유동성 창조는 통화량과 물가 사이의 관계를 설명하는 화폐수량설의 명제를 뿌리에서부터 흔들어버렸다”며 최근 경제상황과 관련, 화폐수량설을 적용하는 데 대해 매우 부정적인 견해를 내비쳤다.

지난 20여 년간 무슨 일이 있었는가

정 교수는 지난 20여 년간의 시기를 설명하면서 ‘대완화(The Great moderation)’란 표현을 사용했다.

지난 20여 년간 중앙은행은 물가안정을 통화정책의 최우선 정책으로 삼았으며, 세계화는 관세를 비롯한 무역장벽을 제거해, 중국 제품과 같은 값싼 제품 생산업체들의 영향력을 강화시켰다. 또한 인터넷의 등장은 시장에서 소비자들의 영향력을 강화시켜 재화가격의 하락을 유도했다.

정부는 규제완화를 통해 시장에서의 가격경쟁을 촉진하는 한편 재정건전성 유지를 위해 정부 지출을 줄였다. 그 결과 (세계적으로) 성공적인 디플레이션이 이어졌다. 결과적으로 낮은 인플레이션은 거시경제의 변동성을 현저하게 낮추었으며, 고용·임금 및 이윤은 그 어느 때보다 안정됐고, 미래의 대한 기대는 낙관적이었고, 투자는 촉진됐다.

낮은 인플레이션은 값싼 돈을 의미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자본이 소비재의 구매보다는 자산 구매에 사용됐다. 그리고 이 같은 자산 구매는 자산가격의 상승을 이끌었으며, 이때의 자산가격의 상승은 경제성장(GDP 성장)보다 훨씬 높았고, 이는 증가한 유동성의 뒷받침 없이는 불가능했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유동성 증가를 가능하게 해준 것이 바로 새로운 금융기법과 파생 금융상품이었다.

과거 은행의 신용창조 과정은 지급준비율과 민간의 예금형태로부터 제약을 받았다. 그러나 대출자산의 증권화 및 유동화 기법이 발전하면서 유동성은 자체적으로 증가해, 은행은 더 이상 유동성이 낮은 대출자산을 보유하고 있을 필요가 없었다.

대신 은행은 대출자산을 특수목적기구(SPV 혹은 SIV)에 매각함으로써 추가적인 대출 및 주자를 위한 유동성을 확보하고, 은행의 대차대조표에서 대출자산을 없앴다. 특수목적기구는 매입한 자산을 기초로 해서 자산유동화증권(ABS)을 발행했으며, 이는 또 다시 모아져 부채담보부채권(CDO)로 발행됐다. 부채담보부채권은 여러 투자기관에 매각되는데, 그 과정에서 신용파산스왑(CDS)이 체결됐다.

이처럼 일련의 자산유동화 과정에서 은행뿐만 아니라 투자은행, 헤지펀드 등 다양한 금융, 투자기관들이 파생 금융상품을 통해 개입되고, 유동성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이렇게 증가한 유동성은 다시 자산 매입에 사용되면서 자산가격의 지속적인 상승을 이끌게 된다.

이처럼 자산의 증권화·유동화와 파생 금융상품이 유동성 창출에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상황에서 중앙은행이 통제하는 본원통화의 역할은 그 비중이 작아질 수밖에 없었다.

전통적 이론에 따르면 중앙은행에 의해 본원통화의 공급량이 정해지면, 예금창조 과정을 거쳐 통화승수배 만큼의 통화량 증가현상이 나타난다. 그러나 변화된 금융환경에서는 이에 더해 증권화, 파생 금융상품 판매가 이루어지고 그 결과 유동성은 더욱 증가했다.

결국 세계 유동성에서 본원통화가 차지하는 비중은 극히 작아지고, 파생 금융상품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서브프라임 사태로 화폐수량설, 한계 봉착

정운찬 교수는 “지난 20여 년간의 경제분석에서 통화량이 물가에 영향을 미친다는 화폐수량설의 명제는 성립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통화량의 정의를 보다 넓은 의미의 유동성으로 확장한다 하더라도, 유동성의 증가는 물가의 상승이 아니라 자산가격의 상승을 가져왔다고 말했다.

특히 자산거래에 사용되는 유동성은 본원통화를 조절하는 중앙은행에 의해 ‘외생적’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경제주체들의 미래에 대한 기대, 각종 금융상품의 발전을 비롯한 금융시장 내부 요인 등에 의해 ‘내생적’으로 결정된다는 사실이 확인됐다고 말했다.

물론 최근의 세계경제 유동성의 증가와 이로 인한 자산가격 상승, 지속적으로 유지돼온 낮은 인플레이션과 거시경제 안정성은 새로운 경제 패러다임으로 이해하기보다는 ‘행운(serendipity)’에 의한 일시적인 현상으로 이해돼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경제의 생산능력을 상회하는 자산가격의 상승”은 결국 붕괴될 수밖에 없다. 서브프라임 위기 이후 최근의 신용경색과 세계적인 경기침체 등은 이미 이러한 붕괴가 시작됐음을 보여주고 있다고 말했다.

“더 이상 상승기조의 유동성 순환은 없을 것이며, 지속적인 디스인플레이션도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자산가격의 상승으로 증가했던 소비지출도 줄어들 것이다. 파생 금융상품의 거래 또한 예전처럼 이루어지기 힘들 것이다.”

지금의 현실은 변화한 환경 속에서 더 이상 화폐수량설의 명제가 설득력을 가지지 못한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고 정 교수는 주장했다. 금본위제도가 시행되던 19세기 고전적 화폐수량설도 그렇고, 20세기 중엽 이후에 등장한 신화폐수량설 또한 마찬가지라고 평했다.

화폐수량설이 다시 한 번 각광받는 경제이론으로 등장하기 위해서는 ‘화폐’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화폐란 무엇인가”란 가장 기본적인 명제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용어설명

▶ 화폐수량설(quantity theory of money): 인플레이션 이론들 중 최초의 것이자 가장 오래된 견해로, 물가수준이 화폐량에 의해 결정된다는 이론.

▶ 유동성(流動性 Liquidity): 현금으로 바꿔 쓸 만한 재산을 얼마나 갖고 있는가를 나타내는 말. 현금화할 수 있는 재산이 많으면 유동성이 풍부하다고 표현하고, 반대의 경우에는 유동성이 부족하다고 말한다.

▶ 파생 금융상품(derivative securities): 주식과 채권 같은 전통적인 금융상품을 기초자산으로 하여, 새로운 현금흐름을 가져다주는 증권을 말한다. 대표적인 파생상품으로는 선도거래, 선물, 옵션, 스왑 등이 있다.

의견달기(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