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칼럼

혈액형 성격론과 바넘 효과

혈액형에 따라 질병 발병 위험 달라

19세기 말 미국의 링링 서커스단에는 신통력이 매우 뛰어난 곡예사가 있었다. P.T.바넘이라는 이름을 가진 그 곡예사는 서커스 도중에 관객을 아무나 불러내 다음과 같은 말로 그들의 성격을 족집게처럼 알아맞히곤 했다.

“당신은 평소에 쾌활한 성격이지만 때론 혼자 있고 싶어 하는 내성적인 면도 지녔군요” 그 말을 들은 관객은 그 자리에서 “어쩌면 그렇게도 내 성격을 잘 알아맞히죠?”라며 놀라곤 했다. 하지만 사실 바넘이 알아맞힌 관객들의 성격은 모든 사람이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는 성격이나 심리적 특징일 뿐이었다.

1940년대 심리학자 포러는 성격진단 실험을 통해 신문의 점성술 난 등에 기재된 사람의 보편적인 특성을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에게만 적용되는 것으로 착각한다는 사실을 증명해 보였다. 이런 심리적 현상을 ‘바넘 효과’라고 한다.

▲ 몇 년 전 한 백화점에서 진행된 혈액형별 패션쇼의 모습. ⓒ연합뉴스

그런데 바넘 효과가 요즘 같은 현대 사회에서도 대대적으로 통용되고 있다. ‘혈액형 성격론’이 바로 그것이다. A형은 소심하고, B형은 이기적이면서 변덕스럽고, O형은 통이 크고, AB형은 천재 아니면 바보 같은 이중적인 성격을 지녔다는 것이다.

일본의 경우 일기예보를 하듯이 혈액형별 운수를 알려주고, 혈액형별로 반을 나눠 가르치는 유치원도 있을 만큼 혈액형 성격론이 유행이다. 심지어 올림픽에 출전하는 운동선수들을 혈액형별로 훈련을 시킨 사례도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별반 다르지 않다. 혈액형 다이어트와 혈액형 공부법이 유행하는가 하면, 몇 년 전엔 지방의 한 금융기관에서 직원을 모집하면서 ‘O형과 B형만 지원하라’는 공고를 내 파문이 일기도 했다.

최근에는 대권주자들의 혈액형을 분류해, 이에 따른 성격과 리더십 스타일을 비교해 보는 뉴스 기사들이 심심찮게 눈에 띈다.

혈액형과 성격은 관련 없어

혈액형 성격론이 유래된 곳은 일본이다. 1927년 다케지 후루카와라는 철학 강사가 처음 주장한 이후, 한동안 잠잠하다가 1970년대 노미 마사히코라는 저널리스트가 ‘혈액형 인간학’이라는 책을 발간하면서 널리 회자됐다. 1980년대에는 그의 아들 노미 도시타카가 수십만 건의 데이터를 분석해 혈액형에 따라 성격이 서로 다르다는 과학적 결과를 얻어냈다고 주장하면서 과학적으로도 증명된 것처럼 소문이 났다.

그러나 사실 과학적으로 볼 때, 혈액형과 성격은 전혀 관련된 요소가 없다. 사람의 혈액형은 적혈구에 존재하는 항원에 의해 결정된다. 대략 400개 이상의 적혈구 항원이 존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므로, 인간의 혈액형도 수백 가지가 된다.

다만 수혈을 할 때 문제가 되는 항원의 종류는 수십 종에 불과한데,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이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ABO식 혈액형과 Rh식 혈액형이다. 때문에 유독 ABO식 혈액형만 성격과 관련이 있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또 성격은 환경이나 양육의 영향을 많이 받지만 혈액형은 100% 유전이므로 성격을 혈액형으로 설명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실제로 영국에서 혈액형과 성격과의 관계를 과학적으로 조사한 연구가 있었는데, 서로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각 나라와 인종별로 혈액형 분포도를 주기적으로 조사해 ABO식 혈액형 정보를 알려주는 ‘블러드북닷컴’의 최근 통계자료에 의하면 브라질 보로도 원주민과 페루 인디언의 경우 100% 모두 O형인 것으로 드러났다. 혈액형 성격론에 의하면, 이들의 성격은 모두 동일하다는 말이 된다.

그럼 왜 우리는 수혈도 마음대로 할 수 없어 불편하기 짝이 없게끔 서로 다른 혈액형을 지니고 있는 걸까. 이에 대해 가장 유력한 설명이 ‘질병에 대한 효과적인 방어 전략설’이다.

1960년대부터 혈액형에 따라 특정 질병에 잘 걸린다는 사실이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했다. 예를 들면 혈액형이 O형인 경우 바이러스 질병에 강하고, A형과 B형의 경우 세균 질병에 더 강하다는 것.

따라서 바이러스 질병이 유행할 경우 O형은 살아남을 수 있고, 세균 질병이 창궐할 경우 A형과 B형은 생존할 확률이 더 높아지게 된다. 영국 런던대 로버트 세이모어 박사팀은 ‘사람이 ABO식 혈액형을 일정 비율로 유지하는 것은 바이러스와 세균에 대한 방어를 균형 있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남아메리카의 인디언들이 대부분 O형인 것도 예전에 성병이 크게 유행해 A형과 B형이 절멸하고 O형만 살아남았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있다.

AB형은 콜레라에 강하고, O형은 암에 강해

그 외에도 O형은 콜레라에 잘 걸리는 반면, AB형은 콜레라 세균이 든 물을 먹어도 설사를 하지 않을 정도로 콜레라에 강하며 O형은 말라리아나 여러 종류의 암에 강하다는 연구결과 등이 나와 있다.

2005년 미국 콜로라도 대학 연구팀의 조사결과에 의하면, 혈액형별 인구집단 분포를 감안할 때 O형과 비교해 AB형의 경우 심한 말라리아에 걸릴 위험비가 7배, A형은 3배, B형은 2배 더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최근 우리나라 연구진에 의해서도 특정 혈액형이 특정 암에 더 잘 걸린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전남의대 권순석·조덕 교수팀이 발표한 논문에 의하면 A형 여성의 경우 O형 여성에 비해 위암에 걸릴 확률이 약 1.5배 높은 것으로 나타난 것. 하지만 남성 A형에선 이런 차이가 관찰되지 않았다고 한다.

혈액형에 따라서 심장병 발병 위험성이 다르다는 연구결과도 며칠 전에 발표됐다. 미국 하버드 대학 루치(Lu Qi) 교수팀이 발표한 논문에 의하면 O형에 비해 AB형 혈액형을 가진 사람의 경우 심장질환 발병 위험성이 23% 더 높고, B형의 경우는 11%, A형은 경우는 5% 더 높다는 것.

또한 A형의 혈액을 가진 사람일수록 몸에 해로운 저밀도 지질 수치가 높으며, O형의 혈액을 가진 사람은 혈액 순환을 돕고 혈전 생성을 예방하는 인자를 가지고 있다고 밝혔다.

하지만 연구진은 혈액형 자체가 심장병 발생 위험성을 증대시키는 것은 아니라고 강조했다. 즉, O형이 아닌 사람일지라도 혈액형으로 인해 심장병 발병 위험성은 크게 증가하지 않으며 오히려 나이나 혈압, 콜레스테롤 수치, 흡연, 당뇨병 등과 같은 요인들이 심장병 발병에 더욱 큰 영향을 발휘하므로, 그런 요인들을 제거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는 말이다.

결국 자신의 혈액형을 가지고 이러니저러니 하는 사람은 자신의 타고난 팔자만을 탓하는 못난 운명론자와 다름없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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