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칼럼

한국 BEST SF작가 10인, 이영수(4)

[한국SF를 찾아서] 성 역할의 고정관념, 이분법에서 자유로워질 수는 없는가?

이영수로서야 자신에게 도식화될 우려가 있는 어떤 레테르가 붙든 달가워하지 않겠지만 적어도 넓은 의미에서 그녀는 페미니즘 계열의 작가로 볼 수 있다. 조애너 러스가 전투적 페미니즘을, 어슐러 K. 르 귄이 보다 대중적이고 순화된 페미니즘을 지향한다면 이영수는 소위 ‘그들만의 페미니즘’에 경도되어 있다.

작품마다 주제와 소재 그리고 관심사가 천차만별이더라도 이영수의 소설이라면 지난 18년 간 추호도 변치 않는 한 가지가 있으니, 그것은 바로 남녀 간의 성별에 따른 역할의 고정화다. 그녀의 소설에서 남성은 늘 사고를 치거나 문제를 악화시키며 여성들은 문제를 깔끔하게 해결하거나 최소한 남성들의 그러한 무능함을 지켜보며 혀를 끌끌 찬다. 어느 작품에서나 열이면 열 문제의 원인은 전부 남성에게서 비롯된다.

가장 최근 간행된 선집 ‘브로콜리 평원의 혈투; 2011년’의 작가후기를 보면 이 중단편집에는 좌절한 남자들 이야기가 과반수 이상 담겼다고 밝히고 있다. 하지만 남성 독자인 필자가 보기에, 이 선집에 실린 중단편들은 스토리라인의 표층에 내세운 좌절하는 남자들 따위에는 안중에도 없는 듯하다. 읽다 보면 허수아비 같은 남자들은 진짜 중요한 스토리 선상에서는 종적을 감춰버리고 작가는 사실상 꿍짝이 맞는 여자들끼리의 수다에 장단 맞추느라 흥겹다.

여기에 수록된 단편 중 하나인 ‘호텔; 2003년’이 전형적인 예다. 과년한 딸이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또 다른 젊은 여성과 바람나 가출해버린다. 아이러니하게도 동성결혼을 반대하는 부모 자체가 게이 부부다. 이 작품에서 일반적인 남자는 주요 배역을 맡지 못하며, 사태의 전모를 지켜보는 화자의 시선은 게이 부부 중 여성 성(性)이 더욱 강한 배우자의 몫이다.

▲ 이영수의 초기 단편집 <태평양 횡단특급>, 이때부터 이미 작가는 재기발랄한 상상과 도발적인 풍자를 예사롭게 펼쳐보이기 시작했다. ⓒ문학과지성사


단편 ‘동전마술; 2006년’은 맞선 자리에서 상대에게 반했지만 딱지맞은 남자의 좌절을 그린다. 이 남자가 여성의 눈에 차지 않을 수밖에 없는 것은 애초에 체급부터가 다르기 때문이다. 다른 차원의 시공과 이어진 틈새로 사물을 주고받는 능력을 가진 여인이 그러한 메커니즘을 죽었다 깨어나도 이해할 수 없는 평범한 남자에게 어떤 감흥을 느끼겠는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여자와 눈앞 밖에 보지 못하는 남자의 관계란 결말이 뻔하다.

단편 ‘물음표를 머리에 인 남자; 2010년’는 더욱 노골적이다. 바람을 피우며 거짓말을 밥 먹듯 하거나 믿음이 가지 않는 짓만 골라 하는, 겉과 속이 따로 노는 남자들을 식별하게 해주는 인식표가 그들의 머리 위에 뜨는 세상을 생각해보라. ‘메리고라운드; 2008년’는 ‘대리전’과 마찬가지로 여성들만의 닫힌 생태계를 보여주는, 지극히 이영수적인 작품이다. 여기서 레즈비언 셋의 엇갈린 사랑과 질투, 갈등 그리고 오해는 일반 남녀의 삼각관계와 하등 다를 바 없다.

이영수에게 성별 역할 고정화 경향이 얼마나 일상화되어 있는가는 남녀 간의 관계가 주제와 무관한 작품들에서도 같은 패턴을 반복한다는 사실에서 새삼 재확인할 수 있다.

단편 ‘죽음과 세금’은 불사 바이러스에 걸린 장수 노인들 가운데 사회기여도가 낮은 이들을 쥐도 새도 모르게 안락사 시켜 인구압을 조절하는 정부비밀기관의 이야기다. 여기서도 문제의 진상을 깨닫지만 이내 기억이 지워지는 주인공은 여성 앞에서 기 한 번 펴지 못하는 소심한 남자다. 반면 그를 가까이서 감시 및 관리하며 눈치 채지 못하도록 예방하고 만에 하나 비밀이 탄로 나도 상황 일체를 예전과 다름없이 되돌릴 수 있는 유능한 정부요원이자 이 이야기의 화자는 여성이다.

단편 ‘소유권’은 인공지능과 로봇이 사회를 움직이고 인간들은 무위도식하는 시대에 한 로봇에게 농락당한 무기력한 중년남자의 삶의 굴곡을 사회복지공무원인 여성의 시선에서 그린다. 단편 ‘정원사’에는 아서 C. 클락의 장편 ‘2001년 우주 오디세이’에 등장하는 컴퓨터 ‘할 9000’처럼 명령 우선순위에 혼란을 일으켜 오작동하는 인공지능이 나오는데, 여기서도 사고를 쳐 곤경에 허덕이는 이는 고루한 늙은 남자이고 돕기는커녕 정보제공에 인색한 채 약만 올리는 냉소적 관찰자는 젊은 여성이다.

예를 들자면 한이 없다. 이영수의 세계에서 남성들은 무능하고 나약하다. 남성들은 강화제 같은 약물에 의지해야 자신의 신념을 고수할 수 있으며(‘죽음과 세금’) 충동적인 감정 조절이 어려워 대뇌에 바이오신경칩을 내장한다.(‘소유권’) 한 마디로 남성들은 책임감이라고는 눈을 씻고도 찾아볼 수 없으며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삶과도 동떨어져 있다.

이에 비해 여성들은 지혜롭다. 심지어 때로는 영악하고 능글맞다. 똑같은 문제에 봉착해도 여성들은 현명하게 해결하며 만일 여의치 않더라도 분노와 좌절 대신 훌훌 털고 쿨 하게 넘겨버린다. 이처럼 성별 역량에서 현격한 차이가 나다보니 이영수의 작품들 가운데 1인칭 시점으로 씌어지면 화자는 십중팔구 여성의 몫이다. 설사 어쩌다 성별이 분명하게 명시되지 않거나 중성적인 인간이 화자로 나온다 해도 말투나 심리에서 유추되는 성적인 아이덴티티는 여성으로 수렴된다.(‘호텔’)

드문 예외로 최근작 ‘제저벨’에 수록된 중편 ‘로즈 셀라비’에는 남성이 화자이자 주인공으로 등장하지만 어투와 1인칭 시점의 상황설명 지문이 기존의 여성 화자 스타일과 대동소이하여 남성 독자로 하여금 오히려 위화감을 준다. 작가가 여성이긴 하지만 남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울 경우에는 영악하게 그리든 멍청하게 그리든 간에 남성 성(性)에 대한 보다 치밀한 연구가 필요해 보인다.

이영수의 페미니즘은 앞서 언급한 대로 ‘그들만의 페미니즘’이다. 그녀는 남성 위주의 가부장적 사회를 직접 공격하기보다는 아예 이야기의 중심라인에서 남성들을 거세해버린다. 이영수의 소설을 읽다보면 만물의 영장은 여성들뿐인 듯하다. 남성들은 그녀의 세계에서 바보짓만 실컷 하다 쓰레기처럼 폐기되기 일쑤다.

문제는 대다수의 작품에서 이영수가 남성들을 이처럼 갖고 노는 데에 대한 설득력 있는 동기나 해석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사실이다.(‘너네 아빠 어딨니?; 2007년’는 드문 예외지만, 이 단편은 공교롭게도 과학소설이 아니다.) 남자들 또는 남성 위주 문화의 어리석음과 허황된 행태를 조롱하고 야유하려면 그에 대한 원인분석이 선행되어야 설득력이 높아질 텐데, 이영수는 단정적이고 결정론적인 전제 아래 어떻게 하면 남성들에게 더욱 다양한 모욕을 줄 수 있을까에만 신경 쓰는 모양새다.

한 마디로 이영수의 작품에서는 성공하는 남자나 정신이 제대로 박힌 남자 따위는 기대하지 않는 편이 좋다. 선집 ‘브로콜리 평원의 혈투’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하나같이 상대 남성들이(연인이든, 남편이든, 아빠든 상관없이) 좌절하든 말든 하등 관심이 없다. 누가 표면상의 주인공이건 간에 작품을 실제로 이끌어가는(사건에 참여하든, 관찰자로 머무르든 간에) 이는 여자들이다. 다시 말해 이영수의 소설들은 좌절하는 남자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좌절하는 남자들이 잠시 구색으로 나오는 새침데기 여자들의 이야기다.

초창기와 달리 남성들이 전면에 나오는 작품들이 일부 있다 해서 이영수의 작품세계가 본질적으로 달라진 것은 하나도 없다는 뜻이다. 그녀가 보기에 이 세상에 남자들을 위한 자리는 없다. ‘제저벨’ 연작에서 의사선생과 곰돌이 선장이 그나마 중립적 내지 호의적으로 그려지는데 이들은 정상적인 인간이 아니라 링커 바이러스에 의해 임의변형된 존재들이다. 그리고 선장은 툭하면 울어댄다. 울보가 더 이상 여성의 영역이 아니라는 듯이.

이영수 식의 성 역할 고정관념은 좋게 말하면 작가의 색깔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보면 지나친 도식화로 굳어질 우려가 있다. 이 같은 패턴의 반복은 등장인물의 전형성은 부각시킬지언정 살아 숨 쉬는 다양한 인물상을 창조하는 데에는 장애요소가 될 수 있다. 혹여 남녀 간의 역할을 스테레오 타입화 하여 배분하는 방식이 플롯의 정형화를 낳아 작가의 다양한 창조력과 융통성에 제약을 가하지는 않을까?

지난 18년간 이영수의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남자건 여자건 일정한 성격 틀에서 거의 벗어나지 못했다고 생각해보라. 독자들이 이러한 일관성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과연 이영수가 고수하는 성(젠더) 패러다임은 그녀만의 개성이자 강점으로 받아들여야 할까? 아니면 그녀의 작품을 구닥다리로 인식하게 만드는 걸림돌일까? 이에 대한 답을 내기 전에 이제 양질의 과학소설을 꾸준히 펴내는 작가는 이영수뿐이 아니라는 현실도 함께 곱씹어봐야 하리라. 현재의 독자들에게 대안은 많고도 많다.

기대하기에 더욱 분발을 요구하고픈 작가, 이영수

21세기 한국 과학소설 출판시장에서 작가가 과학소설을 잘 쓰기만 해서는 2% 부족한 상황이 되었다. 나머지 2%는 다름 아닌 우리나라 독자들과의 내밀한 교감이 좌우하리라고 본다. 독자들이 고전이건 최신간이건 해외의 인기 과학소설을 번역판으로 읽으면서 괴리감을 느꼈던 부분을 속 시원히 어루만져 주는 것이 바로 창작 과학소설의 역할이 아닐까? 거듭 밝혀두지만, 한국형 과학소설이라 해서 갓 쓰고 도포 쓰는 1970년대 충무로 문예영화 흉내를 내야 한다는 뜻이 결코 아니다. 배명훈의 ‘타워’와 김보영의 ‘다섯 번째 감각’ 그리고 이영도의 ‘별뜨기에 관하여’가 반증하듯이 말이다.

▲ 구매 전에 수록된 단편의 상당수가 이전에 출간된 선집 <나비전쟁>과 겹친다는 사실을 미리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국민서관


그렇다면 이영수 역시 ‘대리전’과 ‘수련의 아이들’ 같은 경향의 작품들에 보다 신경 쓰는 편이 향후의 시장판도에서 유리하지 않을까? 필자가 ‘대리전’을 한국향 SF의 선구적 사례로 여기는 까닭은 이마트와 우리나라 변두리 학교 운동장 같은 지리적 배경 때문이 아니다. 한국 사회에서 성적 소수자인 레즈비언 여성이 바깥 세상에 전혀 눌리지 않으면서 살아가는 일상을 담담히 보여주고 있을 뿐 아니라 그러한 여성이 추구하는 사랑이 무엇인지에 관해서까지 탐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한국 사회 속의 이방인 아닌 이방인을 진솔하게 그려냈기 때문이다. ‘수련의 아이들’도 상황은 다르지만 한국 사회에서 밀려난 소수자에 대한 애정 어린 관심이란 차원에서는 동일한 맥락이다.

어차피 이영수가 자신의 작품들이 무국적성을 띠도록 의도하는 이유가 호시 신이치처럼 단지 세계인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보편 시공간을 무대로 삼기 위해서라기보다 한국이란 지정학적 공간이 감내해온 역사와 정치현실로부터 몇 발짝 물러나 자유롭게 되돌아보기 위함이라면, 이제 비판적인 텍스트가 보다 공감할 수 있는 우리 사회의 구체적인 시공간과 연동되는 편이 독자들의 마음에 깊은 울림을 주는데 더 효과적이라는 판단을 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

선택은 작가의 몫이다. 그러나 이제까지 이영수가 이루어 놓은 성과를 고려할 때 평소 그녀를 아껴온 독자의 한 사람으로 위와 같은 기대를 품지 않을 수 없다. 아울러 우리나라에도 영미권과 일본에서처럼 평생 과학소설을 쓰며 먹고사는 전업 작가들을 보게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도 그러하다.





■ 주요 작품

이영수는 주로 중단편 위주로 창작활동을 해왔으며 본격적인 장편은 ‘대리전’뿐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대리전’을 제외하면 여기저기 산재한 그녀의 중단편들을 일일이 명기하는 대신 선집 위주로만 정리해 기록한다. 아래 선집들에 아직 실리지 않은 단편들이 많으나 지면관계상 생략한다.

– ‘나비전쟁; 1997년’
– ‘면세구역; 2000년’
– ‘태평양 횡단 특급; 2002년’
– ‘대리전; 2006년’
– ‘용의 이; 2007년’
– ‘브로콜리 평원의 혈투; 2011년’
– ‘제저밸; 201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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