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칼럼

한국 BEST SF작가 10인, 이영수(3)

[한국SF를 찾아서] 한국 과학소설로서의 정체성 판단

한국 과학소설의 현대적 지평을 개척한 선구자 중 한 사람인 이영수, 그녀의 작품은 과연 한국 과학소설로서 어떠한 정체성을 보여주고 있는가?

위의 물음은 보기에 따라 논란을 불러일으키기에 딱 좋다. 대체 어떤 주제와 소재 또는 표현 형식이어야 한국 과학소설로서의 정체성이 있다고 할 것인가? 더욱이 이러한 논의가 이영수처럼 무국적성 내지 글로벌리즘 성향이 강한 작가와 부합할까? 필자가 이제까지 이해해온 이영수라면 대뜸 ‘내가 왜 그런 질문에 관련돼야 하죠?’라고 반문할 것이다. (‘내가 왜 그런 질문에 대답해야 하죠?’가 아니란 점에 유의하라.)

아니나 다를까, 최근작 ‘제저벨’의 작가 후기에서 이영수는 한국형 SF에 대해 예상에서 그리 벗어나지 않은 대답을 내놓는다.





~ (전략) 이는 자연스럽게 한국형 SF에 대한 논의로 이어진다. 난 여기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다. 이 고민이 무의미하다는 것은 아니다. 그냥 나는 하지 않겠다는 거다. 이런 것까지 신경 쓰다간 운동화 끈 묶는 방법을 잊어버려 몸부림치는 라이너스 반 펠트처럼 한 줄도 못쓰고 출발점에 주저앉아 있을 판이다. 
                                                                                        — <제저벨>, 작가후기, 348~349쪽

아마 한국형 (또는 필자의 표현대로라면 한국향) SF에 대한 질문에 우리나라의 작가로서 가장 무난하게 비껴나갈 수 있는 답변은 ‘어느 나라 것을 담아내느냐를 따지기 전에 좋은 작품이면 그걸로 충분한 것 아닐까? 보르헤스가 단지 남미나 스페인어권에만 통용되는 작가인가?’라고 되묻는 식이 아닐까? 이영수도 별반 다르지 않은 취지의 대안을 제시한다.





내가 쓰는 현대 배경 이야기의 상당수는 서울 남서부나 그 주변의 위성도시가 무대다. (‘상당수’라는 표현은 수치상 상당히 임의적인데, <대리전>과 일부 단편들이 여기에 해당되긴 한다.; 필자주)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들이 특별히 더 한국적인 SF가 될까. 글쎄다. 몇몇 디테일을 손보면 그 이야기들은 페루나 필리핀, 벨기에를 무대로 해도 먹힐 거다. 대부분 SF가 그렇다. 이 장르는 이야기꾼이 사는 동네보다 더 큰 그림을 그린다. 어느 동네에 살건 그건 그리 중요하지 않고 언제까지 그 동네에만 있을 수는 없다. 
                                                                                             — <제저벨>, 작가후기, 349쪽

물론 생물처럼 진화해가는 사회문화의 반영인 문학과 예술에서 하나의 변치 않는 틀에 갇힌 질문과 대답은 나올 수 없다. 하지만 필자에게 위와 같은 답변은 질문의 취지를 교묘히 회피하는 행위로 보인다. 

이영수 혼자 고군분투 하던 시절이라면 위와 같은 답에 일단 만족했을지 모르겠다. 국내 과학소설 작가가 한 두 명밖에 되지 않는 판에 한국향 작품의 방향을 거론한다는 자체가 우스운 일일 테니까.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세상은 변하고 그에 맞게 패러다임도 업그레이드 될 필요가 있다.

2012년 현재 단편에 치중하는 경향이 있으나 과학소설을 주로 쓰는 작가는 열 명 안팎이다(물론 그들 전부를 과학소설 전업 작가라 말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여기에 간혹 과학소설도 곧잘 쓰는 작가들까지 포함하면 수십 명에 이른다. 

해외 번역물만큼은 아니지만 적어도 독자들이 창작 과학소설을 골라 읽을 수 있을 만큼 여건이 나아졌다는 이야기다. 게다가 장르 안팎에서 주제의식과 글 솜씨에서 우열을 가리기 어려운 작가들이 적지 않다.

▲ 가장 최근에 발표된 이영수의 연작선집 <제저벨>은 <브로콜리 평원의 혈투>보다 더 직접적으로 링커우주를 기반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문명의 기원을 알 수 없는 외계지성군집, 이른바 링커의 성간우주 도약 기술력을 지렛대 삼아, 이에 무임승차한 인류는 작가가 안내하는 외계의 어디든 도착해서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나간다. ⓒ자음과모음


그렇다면 창작 과학소설을 서점의 진열대에서 집어 드는 독자들의 기준은 무엇일까?

지난 2011년을 돌아보면 우리나라에서 창작 과학소설은 장르 안팎의 작가들을 두루 포함해 한 해 동안 적어도 단행본 열 권 남짓, 단편 수로는 사오십 편 이상 출간된 듯 보인다. 그렇다면 단지 해외 번역물 못지않은 세련미만으로 국내 작가가 승부하는 게 유리할까?

국내 작가라고 해서 로벗 L. 포워드나 버너 빈지처럼 인상적인 하드 SF를 써내지 말란 법은 없지만, 해외의 수작들이 꾸준히 번역 소개되고 있는 판에 단지 잘 썼다는 것만으로 충분할까? 혹여 유사품 취급을 받지는 않을까? 한물 간 사이버펑크든, 영원한 인기를 누릴 스페이스 오페라든, 1990년대 이후 작지만 차별화된 흐름으로 자리 잡은 뉴위어드(The New Weird)이건 아니면 21세기 SF의 새로운 조류 가운데 하나인 특이점 SF(Singularity SF)이건 간에 매한가지다.

가뜩이나 척박한 국내 과학소설 출판시장에서, 번역물로 만났을 때와 별반 차이 없는 세계관과 정서로 가득한 국내 창작 과학소설에 얼마나 많은 손이 갈까?

예컨대 고마츠 사쿄(小松左京)의 ‘일본침몰(日本沈没; 1973년)’을 다른 나라 독자들이 읽는다 해도 웬만큼 이해는 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1923년의 간토와 2011년의 후쿠시마에서 일어난 대지진의 참화를 잊을 수 없는 일본인들에게 이 소설은 단지 과학소설 이상의 작품이었기에 출간 당시 4백만 부나 팔려나가지 않았겠는가.

복거일의 ‘비명을 찾아서’를 식민 치하 경험이 없는 나라의 독자들이 읽는다면 과연 얼마나 피부에 와 닿을까? 배명훈의 ‘타워’가 고도경제성장을 이룬 우리 사회의 명암을 풍자적이면서도 맛깔나게 건드려주지 않았다면 어떻게 해서 웬만한 과학소설 번역물도 꿈꾸기 어려운 1만부 매출의 고지를 달성할 수 있었겠는가? 같은 여성작가이면서도 윤이형은 과학소설 형식에 시대와 사회의 고민을 담아내는 데 보다 적극적으로 달려들어 성공을 거두고 있지 않은가.





문제는 이 동네에서 벗어나는 과정이다. 영미권SF 작가들은 자기네들의 언어와 문화를 유지한 채 세계를 넓혀가는 것에 익숙해져 있다. 하지만 다른 문화권에서는 사정이 다르다. 심지어 나름 이 장르가 활성화되어 있는 유럽어권 나라들도 그렇다…(중략)… 상황이 조금씩 변하고 있기는 하다. 나는 지금 궤도 엘리베이터를 세우는 한국 기업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 있는데, 아직까지는 손발이 오그라드는 일 없이 그럭저럭 버티고 있다. 이런 미래를 상상해도 이상하지 않은 때가 온 거다…(중략)… 나는 한국적 SF에 대한 의무감은 없지만 한국인이 아닌 캐릭터를 등장시키는 것에 대해서는 늘 조금씩 민망함을 느낀다. 그렇다고 여기서도 다른 단편집에서처럼 서울 남서부나 그 주변의 위성도시를 무대로 한 현대배경 이야기로 시작하며 한국형 SF인 척하는 꼼수를 쓸 수도 없는 노릇이다. 
                                                                                          — <제저벨>, 작가후기, 349~350쪽

맞는 말이다. 과학소설을 번역본이나 원서로만 보던 시절이 엊그제 같은데 갑자기 한국인들이 우르르 나와 작가 말대로 안드로메다로 떠나는 모험소설을 쓴다면 곧바로 어린이 문고판용 끼워 팔기 작품 신세로 전락하지는 않을까 하는 우려가 나올 법도 하다. 더욱이 작가 말대로 배경 장소만 우리나라 어딘가로 설정한다고 해서 ‘한국향 SF’란 목표를 거저 달성할 수 있을리 있겠는가.

이 개념에 대해서는 앞으로도 많은 이들에 의해 충분한 논의가 더 필요하겠지만 적어도 하나만은 분명하게 단언할 수 있다. 한국향 SF는 한국인이 다수로 나오고 배경이 한국 사회여야 한다는 어설픈 고정관념 따위가 아니다. 그런 접근방법이야말로 1970년대 충무로 문예영화식 토속물과 하등 다를 바 없는 도식적인 접근이다.

한국향 SF는 무늬만 된장을 바를 게 아니라 진짜 된장냄새를 풍겨야 한다. 다시 말해 이 시대 한국인들이 고민하는 시대정신을 함께 아우르고 가야 한다. 한국인 독자들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바탕 위에 과학소설적인 설정을 덧입혀야 하는 것이다. 복제인간이 나오고 뇌에다 정보 다운로드 칩을 박고 나노 탄소 튜브로 명품신발을 만들든 간에 그런 것들은 이러한 논의의 본질과 아무 상관이 없다.

어차피 현재의 창작 과학소설을 영어로 옮겨 해외출판 한다 해서 읽어줄 독자가 있는 것도 아니며 설사 그런 날이 온다 해도 많은 시일을 요할 것이다. 세계향 SF는 한국향 SF라는 고지를 넘어선 뒤 다시 숨 고르며 생각해봐도 늦지 않는다. 당장 국내 창작 과학소설계가 번역소설 시장과는 별개로 제자리를 잡기 위해서는 한국인 독자들을 충격에 빠뜨리거나 확 사로잡을 만한, 우리만의 이야기를 창조해내야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필자는 ‘대리전’ 그리고 이후 나온 ‘브로콜리 평원의 혈투’, ‘여우골’, ‘수련의 아이들’1) (그리고 과학소설은 아니지만 ‘너네 아빠 어딨니?’) 등과 같은 이영수의 작품들에서 그러한 가능성의 단초를 읽어냈지만 아직 확신을 하지는 못했다. ‘대리전’ 이후 굵직한 문제작을 내놓지 않고 있다. 가장 최신작인 ‘제저벨’조차 할리우드 영화에서 따온 제목이 시사하듯2) ‘브로콜리 평원의 혈투’보다 더 무국적성의 허무주의를 자랑하는 등장인물들의 무용담으로 가득하다.

어떤 노선을 택하든 그것은 전적으로 작가의 자유다. 다만 필자로서는 이영수의 필력이 지나치게 비유적이고 상징적인 우화 못지않게 우리 사회 내부를 향한, 보다 직접적인 동시에 섬세한 관찰이 동원돼 우리나라 창작 과학소설의 중흥에 기여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이러한 기대에 부응한다면 이영수는 일각에서 제기되는 ‘뛰어난 재능을 지녔으나 진화하지 않는 작가’라는 아쉬움을 불식시킬 수 있을 것이다.





1) 여주인공 채수련은 유전공학연구소의 청소부로 어렵사리 생계를 꾸려나가는 한편 폭력을 일삼는 남편에게 하루가 멀다 하고 학대에 시달린다. 실험실에서의 사고로 괴세포들의 숙주가 된 채수련이 직장을 버리고 남편을 죽이고 괴세포들과 함께 그녀 또한 바다 생물로 진화하여 사라지는 결말은 사회의 나락에서 소외받는 자는 실제로는 갈 수 있는 곳이 없다는 암울한 현실에 대한 고발로 읽힌다.

2) 사실 <제저벨>에는 주요인물은 물론이거니와 비중 없는 조연들과 항공모함, 통통배 그리고 여러 도시에 이르기까지 이들을 지칭하는 이름을 걸핏하면 할리우드 배우들 아니면 미국과 유럽의 스타들 아니면 명사들에서 따왔다. 일종의 작정하고 시작한 ‘이름 코스프레 잔치’라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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