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칼럼

한국 BEST SF작가 10인, 이영수(2)

[한국SF를 찾아서] 진정한 울림 있는 비판인가

이영수의 작품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대부분 냉소적이다 못해 싸늘한 시선으로 등장인물들과 세상을 바라보는 경향이 있다(물론 여기서 화자는 예외다. 그녀의 작품에서는 화자의 시선이야말로 대개 작가의 시선이므로) 기성의 권위체계와 남성위주의 가부장적 사고방식은 가장 좋은 그녀의 먹잇감이다.

진정한 울림이 있는 비판인가, 아니면 비판적 틀을 활용하는 것인가

기성 권위체계의 하나인 종교의 예를 들면, 초기 단편 <발정기; 1995년>1)에서 기독교 종말론적 징후의 하나인 휴거 현상을 희화해 종교의 맹목성이 야기하는 어이없는 결과를 담았듯이 최근작 중편 <브로콜리 평원의 혈투; 2008년>에서도 주인공은 십자가를 분해해 거기에다 칼을 끼워 넣어 살상용 무기로 둔갑시켜놓음으로서 종교적 권위에 대한 비아냥을 잊지 않는다.2)  





“그는 지금까지 우주를 떠돌면서 온갖 종류의 무기들을 임기응변으로 만들어 싸웠다. 십자가 창은 사치다.”
— 이영수, <브로콜리 평원의 혈투>, 동명의 작가선집에 수록, 2011년, 188쪽

▲ 이영수의 [브로콜리 평원의 혈투] ⓒ자음과모음


심지어 최근작 <제저벨>에 수록된 네 개의 중편 모두에서 ‘기독교마피아’라는 생경하지만 일견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개념으로 기성종교에 대한 조소와 불신을 거두지 않는다. 아니 아예 종교의 부조리한 면들에 대한 까대기가 생활화되었다고나 할까. 그녀의 이러한 작풍은 초창기부터 독자들의 눈길을 끌기에 충분했으니, 당시 영미권에서 들여온 장르성이 농후한 과학소설 번역물들은 사회성이 부족하거나 설사 그러한 메시지가 담겨있어도 우리의 정서와 거리가 있었고 일부 창작물들의 경우에는 과학소설로서의 세련미를 갖추기에도 급급했기 때문이다.

특히 필자가 이영수에게 큰 기대를 걸게 한 <대리전>의 장편 개작 버전은 한국사회의 고질적인 병폐들을 과학소설 안에 스스럼없이 끌어안음으로서 우리나라 과학소설의 지평을 넓혀주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듬해 발표된 중편 <용의 이>는 세상과 사회 그리고 인간에 대한 작가의 지극히 회의적인 태도는 여전하지만 구체성을 결여한 채 다시 초기 습작시절의 불특정 시공간으로 후퇴하는 인상을 받는다. <용의 이>에 메시지나 주제의식이 없다거나 약하다는 뜻이 아니다. 다만 공감하기 쉽지 않다.

이 중편은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치는 주요한 사회현상에 대해 사람들이 흔히 배후에 대단한 의미나 엄청난 음모가 숨어있겠거니 여기기 쉽지만 그것이 실제로는 어처구니없을 만치 아주 단순한 이유 때문이거나 아니면 이유라고도 할 수 없는 이유 탓에 비롯된 결과일 뿐임을 일깨워준다는 점에서 컷 보네것의 작풍을 떠올리게 한다.

오랜 세월 수많은 사람들이 두 편으로 갈려 골육상쟁을 벌인 까닭이 고작 생뚱맞은 달팽이 외계동물의 종족보호 본능에 휘둘린 까닭이라는 이영수의 설명은 고대인들이 스톤헨지를 세우고 지구와 화성이 전쟁에 돌입하며 어리석은 희생양 멜러카이 칸스턴트의 아들이 태어나고 그가 그 부속을 토성의 위성 타이탄에 가져오기까지의 기나긴 세월이 실은 우주선 고장으로 타이탄에 불시착한 트랄파마도어(Tralfamadore) 종족의 사절 세일로를 구하기 위한 과정이었다는 보네것의 설명과 마찬가지로 허무하다.3)

사회체제와 기성권력이 대중에게 충성을 요구하는 대신 내거는 구호는 속빈 강정이라는 이영수 특유의 허무주의가 <용의 이>에 잘 나타나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아’ 다르고 ‘어’ 다르다는 말이 있잖은가. <대리전>에서와 같이 우리나라 사람들 대부분이 공감할 수 있는 대중친화적인 접근방식 대신 <용의 이>는 끝까지 읽어보면 머리로 이해는 되지만 마음이 와 닿지는 않는 현란한 지적 기교를 감상하는 느낌이다.

동명 선집의 표제작이기도 한 중편 <브로콜리 평원의 혈투>에서는 탈북자 문제를 다루고 있지만 그 시각에 대해서는 독자와 평론가마다 호불호가 갈리지 않을까 생각된다. 분단이 공고화된 오늘날 북쪽에 대한 남쪽의 불신과 증오가 과연 식인을 해야 할 정도인가에 대해서는 아무리 시대상황에 대한 비유라 해도 고개를 갸웃하게 만든다. 더욱이 남한도 북한도 아닌 외계행성이란 이질적인 시공간을 무대로 삼았다면 이제까지의 선입관과 편견을 오히려 깡그리 날려버리는 계기로 삼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일찍이 복거일이 <파란 달 아래>에서 선보였듯이 말이다. 이영수의 이 중편에서 한반도를 휘저어 놓으며 세상을 지배하려 드는 적(敵)은 외계에서 온 제멋대로의 기계괴물들이지만, 남과 북의 증오는 정작 오로지 서로에게만 쏠려 있다. 탈북자를 남한사회의 골칫거리이다 못해 사회질서를 어지럽히는 일종의 병원균으로 보는 시각이 우리사회에 만연해있다면 이영수의 이러한 비유법이 섬뜩할 법도 한데, 정말 그 정도인지는 곰곰이 곱씹어볼 문제다.

사실 작품 속에 드러나는 현실사회에 대한 이영수의 비판적인 시선은 필요 이상으로 냉소적으로 흐르거나 사건과 관련 인물들을 너무 희화화시키는 면이 없지 않다. 이러한 경향은 가장 최근작 <제저벨>에서도 별반 다르지 않다. 외딴 외계행성 카루소를 무대로 한 네 편의 중편들은 일견 저마다 공감할 수 있는 메시지를 품고 있긴 하다.

<로즈 셀라비>는 변두리 유배지 행성을 무대로 그곳을 벗어나려는 사람들의 희망을 돈벌이 수단으로 악용하여 기만과 살육을 일삼는 자들에 대한 감정적 응징을 그리며, <시드니>는 어떤 종(種)은 살고 어떤 종은 죽을 권리를 과연 누가 결정할 수 있느냐는 보편성의 원리에 수렴한다.

<레벤토>는 음모론을 배경으로 꼭두각시 조종자들과 꼭두각시 간의 의사소통의 부재를 다룬다. 의사소통의 단절은 링커기계들로 상징되는 초월적 외계지성들과 이들에 기술적으로(또는 지식과 정보 흡수 차원에서) 기생하는 열등한 인류 사이에서 뿐 아니라 권력을 쥔 인간들과 이들의 총알받이가 되는 인간들 사이에도 존재한다. 이러한 설정은 일방적으로 당하면서도 그 이유조차 가늠하지 못하는 현대판 계급사회의 약자들을 떠올리게 한다.

마지막에 수록된 <호가스>는 인간사회에 대한 풍자보다는 작가가 창작해낸 링커우주의 기원과 역할 그리고 목적에 관한 실마리를 푸는데 주안점이 두어져 가장 전형적 SF 느낌이 강하다. 기존 링커기계들에 맞서는 안티테제로서 기원이 다른 별개의 링커시스템의 끌어들인 복선이 대표적인 예다. 작가는 아마도 링커우주를 배경으로 한 연작을 계속 발표할 생각으로 <호가스>에다 밑밥을 가장 많이 뿌린 듯하다.

하지만 아쉽게도 사건의 시공간이 구체성을 결여하거나 지나치게 무국적성을 띠다 못해 무행성성(無行星性)마저 띠어 자꾸 우리사회의 유령처럼 겉돈다는 느낌을 준다. 한 마디로 아웃복싱형 사회비판이랄까. 사회의 부조리와 다양한 병폐에 대해 작가 나름의 분석을 시도하며 펀치를 날리기 무섭게 냉큼 뒤로 물러나는 느낌이어서 애초에 전달하고자 했던 본질이 희석되는 기분이다.

소극적인 아웃복싱으로도 불완전한 세상에 대해 얼마든지 험담이야 늘어놓을 수 있겠지만, 이는 사회사상이나 삶의 철학에서 우러나는 깊은 울림이 아니라 불만스런 수다로 오인될 우려가 있다. 작가가 반드시 사회사상가나 사회운동가가 되어야 할 이유는 없겠지만 이영수의 삐딱한 세상보기가 수다가 아니라 사회를 울리는 메아리가 되자면 그녀가 우리의 보다 구체적인 현실 속으로 들어와 진정성을 전달해줄 수는 없는 것일까?





1) 1997년 출간된 이영수의 단편집 <나비전쟁>에는 <오발행동>이란 제목으로 바뀌어 실렸다.
2) 중편 <브로콜리 평원의 혈투>에서 종교적 권위에 대한 거부감은 주요한 주제가 아니라는 점에서, 종교에 대한 작가의 이 같은 시선은 일상화되어 있다 봐도 좋을 듯하다.
3) 참고로 트랄파마도어 인들은 기계에서 진화한 지성체라 수명이 어마어마하게 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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