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bruary 21,2019

한국 BEST SF작가 10인, 박성환(2)

의사소통 부재와 낮은 시민의식 질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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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환의 작품세계를 관통하는 화두 가운데 하나는 기성세대와 자식세대 간 의사소통의 일방성과 단절이다. 나아가서 이러한 커뮤니케이션 왜곡현상을 사회와 체제로까지 확대하면 저열한 시민의식으로 인해 제 얼굴에 침 뱉는 꼴인 우리 사회의 지난 역사와 오늘이 도마 위에 오른다. 전자에 해당하는 유형이 <잘 가거라, 내 아들. 엄마는 널 사랑했단다>와 <꿈의 입자>라면 후자의 유형은 <입이 있다 그러나 비명을 지를 수 없다>가 꼽힌다.
 
초단편 <잘 가거라, 내 아들. 엄마는 널 사랑했단다; 2009년>는 불과 7쪽의 분량 안에 부모의 의지대로 자식을 키워내는 현 세태를 과학소설의 클리쉐에 대입해 섬뜩하게 그려낸다.

항성 간 공간을 넘어 생명이 살 수 있을 만한 외계행성에 착륙한 지구 원정대 최후의 생존자, 다시 말해 장구한 우주여행 시간을 견뎌내기 위해 수정란 상태로 보관되어 있다가 목적지에 다다라 인공자궁에서 태어난 주인공은 막상 도착해보니 사방이 모래사막밖에 보이지 않는 낯선 행성에서 ‘엄마’라 부르는 우주선 인공지능의 보호를 받으며 키워져 어느덧 성인이 된다.

▲ 부모 자식 간의 소통부재와 일방통행을 비꼰 풍자SF <잘 가거라, 내 아들. 엄마는 널 사랑 했단다> ⓒefremov


하루 종일 365일 일거수일투족을 출생 이래 성인이 되어서까지 시시콜콜 사사건건 간섭하고 제어하는 인공지능의 차가운 모성애에 의문을 품게 된 주인공은 틈나는 대로 바깥세상을 나가보지만 인공지능의 수족로봇들에게 막혀 되돌아온다.

그곳 태양계로 진입하다 갑작스런 태양 플레어에 두들겨 맞아 주인공을 제외하고는 선내의 다른 수정란들과 이미 태어난 아이들이 전부 희생된 뒤로 인공지능은 편집증적일만치 주인공을 양육하고 보호하는 데 극성이다. 보호에 대한 고마움에서 억압에 대한 분노로 변심한 주인공은 아서 C. 클락의 장편 <2001년 우주오디세이>의 데이빗 보먼처럼 우주선 통제컴퓨터와 한판 일전을 치른다.

이 단편의 목적은 과학소설의 고전인 <2001년>을 변주하는 데 있지 않다. 다시 말해 단지 인류가 발달을 거듭하는 인공지능(또는 과학기술)을 언제까지 통제 하에 둘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과학소설의 진부한 화두를 다시 반복하는 데 관심을 두지 않는다. 만일 그랬다면 작가는 주인공이 자신을 돌보는 인공지능에게 ‘엄마’라 부르게 하지 않았을 터이고 인공지능을 제압하고 난 뒤 주인공이 마주하게 된 바깥세상의 진실이란 충격적인 엔딩이 필요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잘 가거라, 내 아들. 엄마는 널 사랑했단다>는 다름 아닌 우리 사회의 병리현상 중 하나인 부모의 자식에 대한 집착을 과학소설의 플롯을 통해 리얼리즘 소설보다 더욱 더 강렬하게 비판한다. 임신하자마자 천재를 만든다며 온갖 태교법을 총동원하고 유치원생에게 수십만 원에서 수백만 원에 이르는 외국인 강사 영어교육비를 아낌없이 퍼부으며 명문대에 들어가 간판 좋은 직장에 들어갈 때까지 우리나라 부모의 교육열은 식을 줄 모른다. 물론 아이들은 이 와중에 볼멘소리를 하거나 심지어 강하게 반발하기도 한다. 하지만 부모들에게서 돌아오는 반응은 언제나 이 단편소설 속의 인공지능처럼 앵무새 같이 똑같은 일방적 지령뿐이다. 아이들의 의견은 접수되지 않으며 부모의 의견만 접수되길 원한다.

이 단편은 아이의 미래가 이런 식의 일그러진 교육으로는 결코 달성되지 않음을 결말부의 반전을 통해 알려준다. 과학소설 팬보다는 청소년과 부모들이 읽어야 할 작품이다.

이러한 관점은 박성환의 또 다른 단편 <꿈의 입자; 2008년>에서도 변주된다. 어려서부터 늘 또래 아이들과는 다른 시선으로 사물을 바라보는 까닭에 왕따가 된 아이가 학교는 물론이고 부모의 몰이해로 정신병원을 거쳐 뇌생리연구소의 실험체가 된다.

과학자들은 문제의 열쇠가 아이의 꿈을 분석하는 데 있다고 보고 아이의 몸에 전극을 떼었다 붙였다 하며 온갖 실험을 벌이지만 아이가 꿈꾸는 세계는 현대과학의 분석틀 안에서는 일관성 있게 검증되지 않는다. 부모와 교사는 고사하고 심지어 세상의 이치를 근본적으로 따지고 드는 과학자들마저 고정관념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자신의 관점에서만 아이를 바라보고 해석하려 하니 답이 나올 리 없다.

▲ 박성환의 단편 <레디메이드 보살>을 원안으로 하여 영화화된 <인류멸망보고서> ⓒ지오엔터테인먼트


<입이 있다 그러나 비명을 지를 수 없다; 2010년>는 얼핏 영화 <인셉션 Inception; 2010년>과 <매트릭스 Matrix; 1999~2003년>를 뒤섞은 느낌이다. 하지만 작가의 시선은 그보다 훨씬 더 깊숙한 곳을 들여다본다.

컴퓨터 앞에 앉아 있거나 스마트폰을 귀찮게 들고 다닐 필요 없이 아예 커뮤니케이션 기기가 머리 속에 단말기로 들어와 이른바 전뇌(電腦) 공간을 누구나 갖게 된 시대, 정부권력과 인류의 더 나은 미래를 희망하는 낙관주의자들(소위 Singularity 추종자들)은 외부 단말기 대신 인류 한 사람 한 사람의 전뇌공간을 연결한 무선 네트워크로 멋진 신세계를 열겠다고 선언한다.

개개인이 인류 전체의 경험을 실시간으로 언제 어디서나 공유할 수 있는  꿈같은 미래! 하지만 어처구니없게도 사람들은 이 가상공간에 갇혀 좀비가 되어 간다. 어느 날부턴가 로그오프 하는 방법도 잊어버린 그들은 새로운 세계의 지배자인 ‘그것’의 노예가 된 처지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며 거짓된 공간에서 살아간다.





저 바깥 현실세계에서 자네들 몸은 유사 뇌사 상태에서 연결 직전까지 먹었던 음식물을 천천히 소화하고 그 에너지를 천천히 소모하고 있을 뿐이야. 이대로는 하나 둘씩 수분결핍이나 영양부족으로 천천히 말라죽을 테고 최소한의 접속 임계치 이하로 사람들이 줄어들면 꿈은 결국 붕괴될 거야. 하지만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대부분은 이제 자신이 어디서 왔는지도 다 잊었어. 꿈의 특성을 이용해 길게 잡아당겨 늘여진 주관적 시간 속에서 사람들은 마치 처음부터 모든 것이 여기에 이렇게 존재했던 것인 양 살아가고 있어. 아무런 자각도 의심도 의식도 없이. ‘그’가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꿈을 재구축하는 것을 수수방관하고 그 결과물에 묵묵히 순응했지. 하지만 자네들에게 남은 객관적 물리적 시간이란 과연 며칠이나 남았을까? 이제 이 빌어먹을 꿈을 부수고 현실세계로 어서 나가야 해.
                            — <입이 있다 그러나 비명을 지를 수 없다>, 선집 <독재자>에 수록, 2010년, 265쪽

전체주의 사회를 그린 디스토피아물들은 대개 대형(大兄)을 정점으로 하는 괴물 같은 체제의 간악성을 묘사하는 데 중점을 둔다. 반면 박성환은 스탈린을 태어나게 한 원인 제공자에게 책임을 묻는 데 초점을 맞춘다. 바로 우리 자신들 말이다.

그가 보기에 전체주의 사회를 초래하는 원인은 무소불위의 독재자에게 무비판적으로 복종하는 대중의 책임이다. 이처럼 길들여진 증세가 얼마나 심각한지 설혹 문제의식을 품은 선구자가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활로를 개척한다 해도 우매한 대중은 우왕좌왕 당혹스러워 하다 오히려 그 도발자를 비난하는 데 앞장서기 일쑤다.

예수를 못 박은 이는 바리새인들도 아니고 본디오 빌라도도 아니며, 바로 우리 자신이라는 지적은 산업화와 근대화를 미끼로 군사정권이 휘두른 서슬에 사회대중이 장기간 침묵했던 한국 현대사를 반추하게 만든다.

더욱이 툭하면 선전선동에 부화뇌동하는 대중의 무뇌아적 행태가 과거형으로 끝나지 않고 언제든 현재형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박성환의 이 단편은 대중을 구성하고 있는 파편화된 개인들이 고민하고 살 것을 주문한다.

기존 미디어 대신 아예 머리 속에 무선 네트워크 단말을 삽입하는 미래가 정보의 바다를 실시간 공유하기보다는 오히려 사람들의 우중화(愚衆化)를 부채질할지 모른다는 우려는 오늘날 대중매체와 퍼스널 미디어에 하루 종일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정작 무엇이 진짜 정보인지 가리기 힘든 현실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폴란드의 SF작가 스타니스와프 렘이 인터넷 환경에서는 가짜 정보, 가치 없는 정보의 홍수 때문에 도리어 진짜 정보를 식별하기 어렵게 되었다고 불평했듯이.

다만 묵직한 주제를 짧은 분량 안에 소화하려다 보니 지나치게 회상조의 설명 위주로 흘러 극적 긴장감과 흥미가 떨어지는 것이 다소 흠이다. 이 세계관을 기초로 차라리 장편을 구상해본다면 배명훈의 <타워>처럼 주제의식이 명확한 동시에 현대 한국사회가 공감할 수 있는 작품으로 업그레이드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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