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bruary 21,2019

한국 BEST SF작가 10인, 박성환(1)

사회의 모순 돌아보는 풍자 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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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환은 과학기술창작문예에서 단편 <레디메이드 보살>로 등단할 때부터 뛰어난 장래성이 기대된 작가다. 하지만 등단 이후 발표작이 예상보다 많지 않아 아쉽다. 아마 현직교사로 근무하며 작가로서의 창작을 병행하는 데 따른 부담 탓이 아닌가 생각된다.

따라서 앞으로 박성환의 작품세계가 어떻게 진화하고 확장되어갈지 속단하기는 어렵지만 이제까지 발표한 작품들을 종합해 볼 때 대략 한 가지 공통점이 발견된다. 그것은 과학소설을 단지 ‘과학적인 소설’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모순과 어리석음을 돌아보는 풍자 도구로 쓰려 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시각은 영미권 과학소설의 외양을 흉내 내는 실속 없는 무한경쟁에 뛰어드는 대신 우리나라 작가만이 선사할 수 있는 독자들과의 교감을 우선시한다는 점에서 유효한 선택이다. 다만 상황 전개를 통해 독자들이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바를 자연스레 흡수할 수 있게 하기보다 노골적이고 직접적으로 작가의 메시지가 드러날 때가 왕왕 있는데, 이는 앞으로 개선되리라 믿는다.

여기서는 그의 작품 가운데 가장 눈길을 끄는 몇 편을 여러 차례로 나눠 리뷰해 보기로 한다.

자기 복을 차버린 인류 대신 인공지능이 이어받은 문명, <백만 광년의 고독>

중편 <백만 광년의 고독; 2009년>에서 대비되는 대립항은 인류와 인공지능이다. 전자는 후자의 창조주지만 얼마 가지 못해 자멸하고 후자는 전자의 피조물이지만 거의 영겁의 세월을 스스로 보수유지하며 버틴다.

표층 스토리 라인은 50만 광년 떨어진 작은 은하에서 보내온 외계문명의 메시지에 달기지의 인공지능이 답신을 보내고 나서 (인간의 기준으로는) 헤아릴 수 없이 긴 세월 동안 기다리며 온갖 사색에 잠기는 내용이다.

하지만 작가가 실상 염두에 두고 있는 주제는 역사시대 이래 성심껏 가꾸어온 과학기술문명을 만개시켜 구성원 모두가 행복을 누릴 수 있게 하기는 커녕 그러한 기회를 제 발로 차버린 채 어느 날 갑자기 자멸해버린 인류에 대한 조소(嘲笑)다.

달기지의 인공지능이 영겁에 가까운 세월을 기다려 몸소 찾아온 외계의 방문자와 만나 나누는 대화로 미뤄 보건대 외계의 방문자는 컷 보네것의 과학소설들에 단골로 출연하는 트랄팔마도어인 같다. 유유상종(類類相從)이라 했던가. 이 우주에서 일시적 충동이나 참을 수 없는 욕망으로 제 무덤을 파지 않고 문명을 꾸준히 담금질할 수 있는 지적 존재는 유기체가 아닌 기계생명체들뿐일까?

▲ 박성환의 <백만 광년의 고독>에 등장하는 인공지능은 컷 보네것의 과학소설들에 단골로 출연하는 트랄팔마도어인 같다. 위 일러스트는 미국 SF잡지 [F&SF] 1957년 7월호의 표지.


이러한 상상이 비단 작가들만의 전유물은 아니다. 폴 데이비스 같은 과학자는 장구한 문명을 유지할 수 있는 종족은 다혈질의 생물 유기체가 아니라 기계에서 진화한 고도의 자율 메커니즘 개체들에 수렴하리라는 전망을 내놓는다. 이러한 맥락 아래 <백만 광년의 고독>에서 인공지능은 인류가 멸망한 까닭을 다음과 같이 풀이한다.





한때 세상은 더 나은 곳이 될 수 있었습니다. 땀 흘려 일하는 것 자체가 정직한 즐거움이 되는 곳, 자기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으려는 사람들끼리 서로 믿음으로 맺어진 곳, 개인의 자유가 공동체의 기반으로 이어진 곳, 사람이 사람을 도구나 수단으로 깔보지 않고 사람으로 대접하는 곳, 그럼으로써 자기 자신의 존엄을 스스로 확인하는 곳…(중략)… 그러나 사람들은 자신들의 개인적인 탐욕에 눈이 멀어 그러한 세상을 저버렸습니다. 발로 차버렸습니다. 한때는, 사람들은 더 나은 존재가 될 수 있었습니다. 세상은 더 좋은 곳이 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결국 모두 끝나버리고 말았습니다.
— <백만 광년의 고독>, 동명의 선집에 수록, 2009년, 127~128쪽

이 작품의 분위기는 묵직하다 못해 지나치게 관조적인 것이 아쉽다. 이 때문에 앞으로 인류사회가 올바른 궤도에서 탈선하지 않게 하려는 계고성 발언이라기보다는 (작가의 의도는 아니겠지만) 비관적이고 체념적인 운명론으로 비쳐질 우려가 있다. 플롯의 대부분이 독백, 그것도 인공지능의 독백 형식이라는 점도 독자의 몰입도를 떨어뜨린다. 주제를 겉으로 드러내기보다 좀 더 안으로 품고 우려내는 편이 더 낫지 않았을까.

■ 작가에 대한 간략한 이력

박성환은 현재 교사로 재직 중이다. 등단 작품은 2004년 제1회 과학기술 창작문예에서 최우수 단편으로 뽑힌 <레디메이드 보살>이다. 온라인에서는 ‘나우누리 SF2019’와 워터가이드 그리고 환상문학웹진 ‘거울’ 등을 통해 동인활동을 해왔으며, 월간지 [판타스틱]을 비롯하여 여러 작가들과의 공동으로 펴낸 선집들에 다수 단편을 발표했다. 단행본으로는 전자책 <전직 흡혈귀의 회고>(북토피아 간행)를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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