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bruary 23,2019

하멜을 만나 하루 종일 눈물만 흘리다

조선 최초의 서양인 외인부대장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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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과학실록 1627년 어느 날 경주의 해안가에 낯선 이국인 세 명이 보트를 타고 나타났다. 이들의 정체는 일본으로 향하던 중 풍랑을 만나 경주 인근의 외해에 표착한 네덜란드의 우베르케르크호 선원들. 물을 구하기 위해 본선에서 내린 보트를 타고 상륙한 이들은 이상한 외모를 보고 모여든 백성들에 의해 곧 사로잡혔다. 그 소식을 들은 우베르케르크호는 그들을 버려두고 닻을 올려 줄행랑을 쳐버렸다.

관가로 넘겨진 이국인 중에서 나이가 제일 많고 보스 격이었던 이는 당시 33세로서 네덜란드 데리프 시 출신의 얀얀세 벨테브레. 그리고 그의 두 동료는 라이프 출신의 드리크 히아베르츠와 암스테르담 출신의 얀 피에테르츠였다.

이후 세 사람은 동래부사에 인계되어 부산의 왜관을 통해 원래 그들의 목적지인 일본으로의 송환이 추진되었다. 하지만 왜관에서는 그들이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를 들어 인도를 거부했다. 그렇게 갈 곳 없이 부산에 머물고 있던 그들을 불러올린 이는 서인 세력과 함께 광해군을 몰아낸 조선의 제16대 왕 인조였다.

인조는 정권을 잡자마자 이괄의 난과 후금이 일으킨 정묘호란 등으로 인해 대내외적으로 좋지 않은 상황에 처해 있었다. 강력한 군사력이 필요했던 인조는 한양으로 불러올린 세 명의 네덜란드인들을 훈련도감에 편입시켜 대포의 제작법과 사용법을 가르치게 했다.

훈련도감은 임진왜란 중인 1593년 8월 임시기구로 설치되어 상설기구로 정착한 조선 후기의 중앙 군영이었다. 따라서 훈련도감은 특히 전쟁에 필요한 화포의 취급과 연습, 사격훈련 등에 중점을 두었는데, 병기 개발을 위한 신기술의 도입을 위해서는 그들과 같은 서양의 이국인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훈련도감군은 포수(砲手)ㆍ살수(殺手)ㆍ사수(射手)의 삼수군으로 조직되어 있었다. 포수는 총통을 다루는 병사였고, 살수는 창과 검을 다루는 병사, 사수는 활을 쏘는 병사로서, 훈련도감군의 주축은 포수였다.

훈련도감군의 또 하나 특징은 의무군역이 아닌 급료병이었다는 점이다. 조선 전기의 중앙 군사조직인 오위는 의무군역을 해야 하는 양인들이 주축을 이루었다. 하지만 포(布)를 내고 군역을 대신하는 양인들이 늘어나면서 임진왜란 때에 이르러서는 거의 유명무실한 군사조직으로 전락해 있었다.

이에 대한 대책으로 새 군사 편제에 의해 설치된 것이 훈련도감으로서, 훈련도감에 속한 군사들은 매월 쌀 4~9말씩을 급료로 받았다.

우베르케르크 호의 선원 3명이 훈련도감에 배속된 가장 큰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것은 바로 홍이포의 제작이었다. 그 무렵 명나라를 통해 전래된 서양 대포 중 하나인 홍이포는 가장 성능이 좋은 대포 중 하나였다.

당시에는 네덜란드를 아란타 또는 하란타, 하란, 홍이, 홍모 등으로 불렀다. 그렇게 볼 때 홍이포는 곧 네덜란드인들이 만든 대포로서, 네덜란드 선원이었던 그들이 홍이포에 대해 가장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그러나 이들이 홍이포의 관련 기술을 조선에 전수하던 중 사건이 터졌다. 국호를 청으로 바꾼 후금이 12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다시 조선으로 쳐들어온 것. 훈련도감에 소속되어 있던 이들도 당연히 전쟁터로 나가게 되었고, 병자호란의 와중에 그만 두 명의 네덜란드인이 낯선 이국 땅에서 전사하고 말았다.

이때 혼자 살아남은 이가 바로 박연, 즉 얀얀세 벨테브레이다. 박연이라는 그의 조선 이름은 문헌에 따라 朴淵ㆍ朴延ㆍ朴燕 등으로 적혀 있는데, 아마 벨테브레에서 ‘박’이라는 성을 취하고 얀얀세의 얀에서 ‘연’이라는 이름을 따온 것으로 추정된다.

정조 때 규장각에 재직했던 조선 후기 문신 윤행임의 시문집인 ‘석재고’를 보면 박연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박연은 하란타(河蘭陀 ; 네덜란드)인이다. 조정에서는 훈련도감에 예속시켜 항왜와 표류해온 중국인을 거느리게 했다. 박연의 이름은 호탄만이다. 병서에 재주가 있고 화포를 매우 정교하게 만들었다. 박연은 그 재능을 살려 나라에 홍이포의 제(制)를 전하였다.”

여기서 항왜란 김충선처럼 조선에 투항한 일본인을 일컫는 말이다. 향화왜 또는 귀순왜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임진왜란 초기만 해도 조정의 허가 없이 살해당하는 항왜가 많았다. 그러나 1594년 이후 항왜의 중요성을 깨달은 조정이 수용 정책을 펴자 수많은 일본군들이 투항해 왔다.

그 중에서 검술이 뛰어난 왜장급의 항왜들은 훈련도감에 배속되어 검술 교관 등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박연으로 하여금 이 같은 항왜와 표류해온 중국인들을 거느리게 했다는 걸로 봐서 당시 훈련도감 내에는 그들로만 구성된 일종의 외인부대가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럼 왜 석재고에는 박연의 원래 이름을 얀얀세 벨테브레가 아닌 호탄만(胡呑萬)으로 기록하고 있는 걸까. 그것은 박연과 함께 표착한 네덜란드 동료들이 그를 호탄만이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이는 우레브케르크호에서의 박연의 지위를 알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네덜란드어 중 호프만(hopman)이라는 단어는 대장, 우두머리의 뜻을 지니고 있는데, 이것이 조선인의 귀에는 호탄만으로 들렸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즉, 박연은 보트를 타고 표착해온 3명의 네덜란드 선원 중 우두머리급에 해당하는 인물로서, 선장까지는 몰라도 갑판장이나 항해사 정도의 고급 선원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 같은 추정은 효종의 사위인 정재륜의 수필집 ‘한거만록’을 보면 더욱 명확해진다. 이 책에서 정재륜은 박연에 대해 “위인이 뛰어나고 훌륭하며 깊이 헤아리는 바가 있다”고 적고 있다.

큰 키에 노란색 머리, 푸른색 눈동자를 지닌 박연은 그가 보고 들은 동양 각국의 풍물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즐겼고, 선악과 화복의 이치 등에 대해 자주 말하는 도자(道者)로서의 면모를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왕실과 조정의 대신들에게서 인품과 자질을 인정받고 있던 박연은 급기야 조선의 무과에 장원 급제하기에 이른다. 1648년(인조 26년) 8월 25일 인조실록의 기록을 보면 “정시를 설행하여 문과에 이정기 등 9인을, 무과에 박연 등 94인을 뽑았다”고 되어 있다.

또 <증보문헌비고>의 ‘본조등과총목’에도 박연이 장원으로 급제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박연의 활동시기를 감안할 때 무과에 급제한 박연이 바로 조선 최초의 외인부대장이었던 네덜란드의 얀얀세 벨테브레임이 거의 확실하다.

그 후 박연이 조선왕조실록에 다시 등장한 것은 1653년(효종 4년) 8월 6일이다. 기록을 보면 제주목사 이원진이 “배 한 척이 고을 남쪽에서 깨져 해안에 닿았기에 대정현감 권극중(權克中)과 판관(判官) 노정(盧錠)을 시켜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보게 하였더니, 어느 나라 사람인지 모르겠으나 배가 바다 가운데에서 뒤집혀 살아남은 자는 38인이며 말이 통하지 않고 문자도 다릅니다.”라고 보고하고 있다.

이에 조정은 박연을 보내 그들을 조사하게 했다. 직접 제주도로 내려가 그들과 대면한 박연은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눈 후 바닷가에 주저앉아 하루 종일 옷소매가 다 젖도록 울었다. 제주도의 말이 통하지 않는 이국인들은 바로 자신의 고국인 네덜란드 선원들이었기 때문이다.

조선에 표착한 지 27년 만에 박연이 만난 그 네덜란드인들은 바로 하멜표류기로 유명한 하멜 일행이었다. 박연이 그처럼 눈물을 흘렸던 까닭은 네덜란드에 두고 온 아내와 자식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었다. 박연은 조선인 여자와 다시 결혼하여 아들과 딸을 두고 있었지만, 고국 사람을 만나자 그간 참았던 향수를 주체하기 힘들었던 모양이다.

하멜 일행은 박연이 책임자로 있던 훈련도감의 외인부대에 배속되었지만, 청나라 사신을 통한 탈출 기도 사건으로 인해 전라도로 유배를 가게 되었다. 그 후 하멜 일행은 탈출에 성공하여 1664년 조선을 떠났고, 박연은 또다시 혼자 조선에 남겨졌다.

조선 최초의 서양인 무관이기도 했던 박연은 병기 개발과 개량에 많은 공헌을 했다. 하지만 북벌 정책을 추진하던 효종이 1659년 5월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면서 박연의 활약상도 자취를 감추고 만다. 효종의 붕어와 함께 병기 개량에 의한 군사기술의 축적 의지도 점차 쇠퇴해갔기 때문이었다.

박연이 낳은 자식 역시 훈련도감에 배속되어 활동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사후 그의 자손에 대한 기록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300여 년이 흐른 지난 1991년 3월, 박연의 13대손이 불쑥 나타났다.

그 자손은 박연의 한국인 핏줄이 아닌, 네덜란드의 본처가 낳은 후손이었다. 당시 노틀담대 철학교수이던 헹크 벨테브레 씨는 자신의 13대조인 박연의 뿌리를 찾아 제주에서 4박 5일 동안 머무른 뒤 출국했다.

그때 헹크 씨는 대한민국 어디선가 살고 있을 13대조의 후손들을 만나보고 싶다는 의사를 타진했다. 또 박연의 고향인 데리프 시에는 현재 약 600여 명의 박연 후손들이 살고 있다고 전했다.

조선 최초의 서양인 외인부대장을 조상으로 둔 한국인 자손들이 살아 있다면, 박씨라는 성에 아마 푸른색 눈동자나 유난히 오똑한 코를 지녔을지 모른다. 과연 박연의 한국 핏줄들은 우리나라에 몇 명이나 뿌리를 내리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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