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pril 21,2019

프로보다 위대했던 아마추어들

최성우의 데자뷔 사이언스(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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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래? 아마추어 같이…’ 언젠가 어느 개그프로그램에서 꽤 인기를 끌었던 대사이다. 아마추어하면 사전적 의미와는 무관하게 비전문가, 즉 ‘프로에 비해 서툰’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통하곤 한다.

과학기술사에서 큰 업적을 남긴 사람들 중에 연구개발을 직업으로 삼았던 이들이 매우 많았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직업적인 과학기술자’로 보기에는 어려운 인물들 또는 다른 일을 생업으로 삼았던 아마추어들에 의하여 매우 중요한 과학기술상의 발전이 이루어졌던 경우도 의외로 많았다.

근대화학의 아버지 라부와지에. ⓒ Free Photo

근대화학의 아버지 라부와지에. ⓒ Free Photo

라부와지에, 멘델, 아인슈타인도 아마추어

오늘날 과학기술자 하면 이공계 대학 교수, 정부 출연 연구기관이나 민간기업의 연구원을 떠올리게 되므로, 사람들은 직업으로서의 과학기술자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된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과학기술자들이 시쳇말로 ‘과학기술 연구로만 먹고 살 수 있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근대 과학혁명 초기에만 해도 소수의 대학교수들을 빼면, 많은 과학자들은 생활에 여유가 있는 부자나 귀족 출신이었다. 만유인력 상수를 측정한 캐번디시(Henry Cavendish; 1731-1810), 근대 화학의 아버지 라부와지에(Antoine Laurent de Lavoisier; 1743-1794),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를 남긴 페르마((Pierre de Fermat; 1601-1665) 등이 모두 여기에 포함된다.

캐번디시는 막대한 재산을 가지고 있었던 귀족으로서, 사람들을 싫어하고 은둔에 가까운 생활을 했던 과학자로도 유명하다. 비틀림 진자를 이용한 만유인력 상수의 측정, 수소(水素)의 발견, 열 및 정전기의 연구 등 수많은 업적을 남긴 그는 ‘모든 학자 중에서 가장 부유했으며, 또한 모든 부자 중에서는 가장 학식 있는 사람’으로 일컬어진다.

라부와지에 역시 아버지가 유명 변호사였던 부유한 집안 출신으로서, 젊은 시절부터 과학연구에 매진하여 많은 업적을 남겼지만 그의 본업은 세금 징수관이었다. 그러나 이 직업은 훗날 프랑스 대혁명이 발발한 후에 ‘가난한 시민들을 수탈한 죄’로 그를 단두대로 몰아넣은 원인을 제공하게 되었다.

17세기 프랑스의 수학자 페르마는 20세기말까지도 풀리지 않았던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를 남긴 것으로 유명한데, 그 역시 변호사, 지방의회 의원 등으로 활동했던 아마추어 수학자였다.

산소를 발견한 프리스틸리 목사(왼쪽)와 가장 부유한 과학자였던 캐번디시. ⓒ Free Photo

산소를 발견한 프리스틸리 목사(왼쪽)와 가장 부유한 과학자였던 캐번디시. ⓒ Free Photo

역사상 저명한 과학자 중에는 부자나 귀족 출신은 아니라 해도, 성직자로서 비교적 여유롭게 과학을 연구할 형편이 되었던 이들도 있었다. 영국의 프리스틀리 목사, 오스트리아의 멘델 신부가 대표적인 경우이다.

프리스틀리(Joseph Priestley; 1733-1804)는 산소(酸素)를 발견한 화학자 중의 한사람이며, 전기학의 연구에도 조예가 깊어서 관련 저술을 남겼다. 그러나 그의 본업은 목사로서, 신학자이자 사회사상가로도 활발한 활동을 한 바 있다. 멘델 신부(Gregor Johann Mendel, 1822-1884)는 유전법칙을 처음으로 발견한 과학자로 유명하다. 그는 자신이 몸담던 수도원의 뒤뜰에서 완두콩을 재료로 실험했던 자신의 연구가 당시 생물학자로부터 아무런 관심을 끌지 못하자, 수도원장으로서 조용한 여생을 보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위에서 예로 든 근대 과학자들, 즉 부유한 귀족이나 성직자 출신으로서 취미나 기호 삼아 과학연구를 하였던 이들이야말로 ‘애호가’라는 본래 의미의 아마추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직업적인 과학기술자들과의 경쟁에서 끝내 승리하거나, 이들을 능가하는 업적을 남긴 위대한 아마추어들도 적지 않다.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 1879-1955) 역시 상대성이론 등을 발표할 당시, 스위스 특허청의 심사관이 본업인 아마추어 과학자였다.

‘프로’인 그레이와의 경쟁에서 승리한 아마추어, 벨

‘프로를 이긴 아마추어’의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전화기의 발명자인 벨(Alexander Graham Bell; 1847-1922)이다. 많은 사람들은 “벨과 그레이가 전화기를 최초로 발명하여 미국 특허청에 경쟁적으로 특허를 출원하였으나, 벨이 그레이보다 한두 시간 앞섰기 때문에 정식 특허권자로서 인정을 받을 수 있었다.”고 알고 있으나, 역사적 사실은 이와 크게 다르다. 즉 벨이 전화기의 ‘최초’ 발명자도 아닐 뿐더러, 그레이(Elisha Gray: 1835-1901)가 전화기의 특허권 획득 및 이후 사업화 과정에서 밀려난 것은 특허 신청이 재빠르지 못해서도 전혀 아니다.

음성학자 출신으로서 아마추어 발명가라 볼 수 있는 벨이 성공을 거둔 진짜 이유는, 발명 이후에도 ‘통신수단으로서 전화의 실용성’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꾸준히 자신을 길을 걸었기 때문이다. 반면에 전문 발명가였던 그레이는 벨보다 성능이 우수한 전화기를 발명하고도, 전화의 실용화를 위한 노력을 그다지 기울이지 않았다. 즉 벨이 아마추어였던 점이 도리어 그레이와의 경쟁에서 승리하는 데에 도움이 되었다고 보는 학자들도 적지 않다.

전문발명가였지만 벨과의 경쟁에서 패배한 그레이(왼쪽)와 자신의 전화기를 시험 중인 벨. ⓒ Free Photo

전문발명가였지만 벨과의 경쟁에서 패배한 그레이(왼쪽)와 자신의 전화기를 시험 중인 벨. ⓒ Free Photo

벨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음성학자이면서 농아들에게 말을 가르치는 교육자였는데, 벨 역시 집안의 전통을 따라 음성학을 연구하면서 농아학교를 운영하기도 하였다. 벨이 전화를 발명하게 된 동기도 역시 농아들에게 발성법을 더 잘 가르치려던 것에서 출발하였다.

벨과 비슷한 시기에 전화기를 발명한 그레이는 대학에서 물리학을 전공하였고, 주로 전자기학 분야에서 유능한 발명가로서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 그레이는 전문발명가였기에 그의 전화기는 벨의 것보다 성능 면에서 더 우수했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미국의 통신사업을 독점하던 거대기업 웨스턴 유니언 전신회사의 후원을 받고 있었던 그레이는, 전화보다는 회사와 직접 관련이 있는 다중전신을 개발해 달라는 요구를 받았고, 스스로도 전화의 실용화에 크게 기대를 걸지 않았다. “전화라는 것은 통신수단이 되기에는 결점이 너무 많다. 이 기구는 우리에게 별로 가치가 없다.”라고 했던 웨스턴 유니언 최고경영자의 주장은 이제 역사적 명언(?)이 되었다.

반면에 아마추어로서 웨스턴 유니언과 아무런 관계가 없었던 벨은 누구의 눈치 등도 보지 않고 독자적으로 전화의 실용화 및 사업화를 밀어붙일 수 있었고, 이는 결국 나중에 그레이 측과의 격렬한 특허분쟁에서도 승리할 수 있는 커다란 요인이 되었다.

물론 오늘날 대부분의 과학기술적 발견, 발명들은 과학기술 연구를 업으로 하는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진다. 특히 정부나 민간자본의 지원 아래 수십, 수백 명 이상의 과학기술자를 동원한 조직적 연구개발이 빈번한 요즘에는 옛날보다 아마추어 과학기술자들의 입지가 더 줄어들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전히 분야에 따라서는 직업적인 전문 과학기술자 못지않게 아마추어들도 좋은 업적을 낼 수 있는 부문도 분명 있으며, 아마추어들의 기발하고 창의적인 사고가 다시 과학기술의 새로운 지평을 넓힐 가능성도 충분하다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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