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칼럼

페스트를 추격하는 의학 탐정

[메디시네마 : 의사와 극장에 간다면] 박지욱의 메디시네마(102) 거리의 공황

2013년 12월 초에 아프리카의 마다가스카르에서 ‘(임파)선 페스트’가 발병하여 20명이 사망했다는 보도가 나왔을 때, 많은 이들이 아직도 페스트가 유행하는가 하는 의아한 생각을 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페스트라면 중세에 대유행을 했던 ‘흑사병’이 생각나기 때문입니다.

쥐벼룩의 몸 속에 숨어있는 페스트균(Yersinia pestis)이 일으키는 페스트(plague)는14세기에 ‘흑사병(Black Death)’이란 이름으로 대유행을 해서 무려 5천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끔찍한 살인마로 기억됩니다(제 83화 <인페르노> 참고).

올해(2017년) 통계를 보면, 콩고민주공화국, 마다르가스카르, 페루 등지에서 환자가 있었고, 발병 지역은 대부분 아프리카, 아시아, 남아메리카 대륙입니다. 전세계에서 매년 600명 정도의 환자가 생기는 21세기의 페스트는 초기에 진단하여 항생제 치료를 잘 받으면 큰 문제는 아닙니다. 하지만 불과 70년 전이라면 사정이 달랐습니다. 오늘은 1950년에 만들어진 흑백 영화를 통해 페스트의 공포에 대해 알아볼까요?

1940년대 말~1950년대 초 미국의 뉴올리언즈가 영화의 배경입니다. 한 사나이가 노름판에서 붙은 실랑이 때문에 총격을 받아 피살됩니다. 다음 날 아침 선창가에서 시신이 발견되고 검시관은 몸에 박힌 총알을 발견합니다. 그때까지는 별다를 것도 없는 흔한 살인 사건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희생자의 폐에서 폐렴을 일으킨 페스트균이 검출되고, 사건은 이제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가 됩니다.

공중보건국 소속의 의사이자 방역관인 클린턴 리드는 현장에 출동하여 희생자가 폐(렴성) 페스트의 잠복기 상태로 죽었음을 확인하고 매뉴얼에 맞추어 즉각적인 대응을 시작합니다. 시신을 발견하고 운반한 경찰관, 검시관,…모두 모아서 당장 혈청 주사를 놓고, 치료제인 항생제 스트렙토마이신을 준비합니다. 시신과 유류품은 당장 소각해버립니다.

쥐가 옮기는 선 페스트와 달리 공기로 옮는 폐 페스트는 치사율이 100퍼센트에 이르는데, 조금이라도 미적미적대다가 페스트가 도시를 빠져나간다면 온 미국에 큰 재앙이 몰아닥칠 위험이 커 서두를 수 밖에 없었지요.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시신을 발견한 다음에 접촉한 이들은 쉽게 확인하여 조처를 할 수 있지만, 문제는 희생자가 살아있을 때 접촉한 사람을 찾는 것입니다. 일단 유류품을 모두 소각해버려, 말항자로 의심되는 희생자의 신원을 알 수 없어 주변인물들을 찾을 수 없다는 점, 주변인물들을 수배할 수 없는 점이 큰 문제입니다. 특히 환자가 살아있을 때 접촉한 마지막 인물 즉, 살인범은 거의 확실한 잠복기 상태일 텐데 말입니다. 초동수사 단계부터 난관에 부딪힌 수사, 경찰서장은 해결의 단서이자 강력한 증거를 불태운 방역관을 질책하지만, 방역관의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시간을 끌다간 범인도 놓치고, 페스트균도 놓치고, ….이제 두 사람은 힘을 합하여 살인범이자 또 다른 대량학살범이 될 페스트의 보균자를 쫓아야 합니다. 잠복기 48시간, 그 안에 모든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과연 가능할까요?

경찰의 입장에서 살인범을 신속히 검거하려는 이유는 추가적인 범죄를 막으려는 목적도 있습니다. 개인적이든 공적이든 범죄의 확산을 예방하는 것이지요. 예방이란 입장에서 보면 방역관의 처지보다 더 다급하진 않을 것입니다. 질병의 확산을 막아야하는 방역관의 입장에서 보면 한시라도 빨리 보균자를 찾아내고 그를 격리시켜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 이 두사람은 다른 목적이지만 사실상 같은 대상을 추격합니다. 보이지 않는 병원균이 보이는 살인범의 이미지로 의인화된 영화입니다. 살인범이자 치명적인 전염병의 보균자, 그 설정 자체가 무척 매력적입니다.

페스트는 3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가장 유명한 것은 사타구니의 가래톳처럼 임파선(淋巴腺)이 부풀어 오르며 시작해 엄청난 고통, 고열, 멍이 들며 죽는 선(腺)페스트입니다 나머지는 균이 혈류속으로 들어가 온 몸의 모든 장기가 다 망가지는 패혈성(敗血性) 페스트와 폐에서 병을 일으켜 객혈을 일으키며 죽은 폐(폐렴성) 페스트입니다. 이 영화의 소재가 된 폐 페스트로 공기를 통해 쉽게 전파되며, 잠복기는 2~4일, 치사율은 100퍼센트가 되는 가장 무서운 페스트입니다.

영화의 한 장면 중에, 경찰서장이 방역관에게 비아냥거리듯 해군사관학교 나왔냐고 묻는 장면이 있습니다. 잘 이해가 되지 않는 장면인데, 경찰서장이 농담을 한 것일까요? 답부터 말씀 드리자면 방역관인 리드가 미국 공중보건국(United States Public Health Service; USPHS) 소속 유니폼을 입고 있어서죠. 리드는 의사이지만 방역관이기도 하며 군대식 계급장과 모자를 쓰고 있는데, 그 로고가 해군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미국 공중보건국 로고 ⓒ 위키백과

미국 공중보건국 로고 ⓒ 위키백과

우리에게는 생소한 미국 공중보건국은 미국의 공중 보건과 위생을 총괄하는 기구입니다. 1798년에 설립되었는데, 처음에는 미국 선원들의 의료 복지를 위해 만들었습니다. 운항 중 병을 얻거나 사고로 장애를 입은 선원들은 이 기구의 도움을 받고, 나중에서는 주요 항구 도시에 해양(수산) 병원도 만듭니다.

나중에는 의료진들에게 군대식 복장을 입게 하고 그에 걸맞는 군대식 계급을 부여합니다. 팀장, 과장, 부장이 아니라 대위, 대령 같은 계급을 받지요. 조직의 수장도 장관이나 국장이 아니라 ‘서젼 제너럴(Surgeon General)’이라는 군대식 명칭으로 불리게 됩니다. 사실상 미국의 서젼 제너럴은 미국 공중보건의 총책임자가 됩니다.

그렇다면 해군도 아닌데 왜 해군과 비슷한 로고를 쓸까요? 이 기구가 생길 당시에 선원들과 선박의 해충이나 쥐는 미국으로 유입되는 전염병이 중요한 보균체들이었습니다. 구대륙에서 횡행하던 황열, 두창, 콜레라, 페스트 같은 질병들은 대서양을 건너올 수는 없었지만 배를 탄 선원들이나 쥐를 통해서는 대양을 횡단할 수 있게됩니다. 그래서 미국이 입장에서는 전염병 유입을 차단하는 최전선이 바로 선박과 항만이었습니다. 이곳에서 일하는 조직원들은 방역 전선에서 일하는 군인과 다름이 없었답니다.

이 기구는 병든 선원들을 통해 감염병의 유입을 조기 발견하여 차단하고, 더 나아가서는 감염병을 퇴치하는 일은 물론이고 접종 사업까지 맡았습니다. 그래서 초창기 활동 무대였던 바다의 흔적이 남아 해군이나 해양 관련 기구처럼 보이는 로고를 쓰는 것입니다. 무론 지금은 뭍이나 물을 가리지 않고 활동합니다. 하지만 영화는 이 기구의 활동 무대를 잘 보여주듯, 영화의 시작과 마지막을 선창가에서 찍었고, 수상한 희생자 역시 배를 타고 밀항한 외국인으로 설정합니다. 일단 방역망에 구멍이 뚫린 상황입니다.

전염병은 이민자들을 통해 들어온다고 여겨졌다. 그래서 해상 검역이 중요했다. 뉴욕 엘리스 섬 이민 박물관 ⓒ 박지욱

전염병은 이민자들을 통해 들어온다고 여겨졌다. 그래서 해상 검역이 중요했다. 뉴욕 엘리스 섬 이민 박물관 ⓒ 박지욱

영화 속에는 혈청 치료와 스트렙토마이신도 등장합니다. 혈청은 감염병에 걸렸지만 회복된 환자의 혈청 속에 있는 항체를 이용하는 치료법입니다. 전염병이 창궐하는 이야기를 보여주는 영화에서 많이 등장하지요? 초기에는 환자의 혈청을 썼지만 나중에는 동물을 이용해 대량 생산한 것을 씁니다. 지금은 각 질병에 다른 항생제 등의 있어 잘 쓰지는 않지만 만약 신종 전염병이 돌게 된다면 회복기 환자의 혈청은 아주 중요한 치료제가 될 수 있습니다.

스트렙토마이신(streptomycin)은 페니실린만큼이나 중요한 항생제입니다. 1943년에 셀먼 왁스먼(Selma A Waksman; 1888~1973)이 토양 미생물에서 분리 추출한 항생제로 최초의 결핵 치료제가 되었지요. 그전까지 결핵은 인간의 손으로 치료할 수 없는 병이었는데 스트렙토마이신 주사만으로 무려 80퍼센트의 치료율을 보여주었습니다. 기적의 신약을 개발한 덕분에, 웍스먼은 1952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습니다.

초창기에 스트렙토마이신은 결핵 외의 감염병에도 썼는데, 그 중에는 페스트도 있었답니다. 의학 역사적인 고증도 소홀히 하지 않았군요.

스트렙토마이신을 개발한 셀먼 웍스먼.  ⓒ 위키백과

스트렙토마이신을 개발한 셀먼 웍스먼. ⓒ 위키백과

그런데 이 영화는 까뮈의 <페스트>에 대한 오마쥬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선박을 검색하는 과정에서 희생자가 ‘오랑(Oran)’에서 배에 오른 밀항자라는 사실이 밝혀집니다. 오랑은 북아프리카 알제의 도시로 까뮈의 소설 <페스트>은 1940년대 오랑을 소설의 시간, 공각적 배경으로 설정했습니다. 영화는 1940년대의 뉴올리언즈로 감독은 <페스트>의 후속 이야기로 그렸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영화의 말미에 이르면, 경찰의 뒤쫓긴 범인이 밀항선을 타기 위해 배를 묶는 밧줄을 타고 올라가다가 랫가드(rat guard)를 넘어가지 못해 물에 빠지는 장면이 나옵니다. 랫가드는 각종 병원체를 옮기는 쥐들이 배 위로 올라오지 못하도록 만든 장치인데, 영화에서는 병원체를 가진 범인이 마치 쥐처럼 그 장벽을 넘지 못하고 물에 빠지는 장면이 나오네요. 살인자이기도 하지만 병원균의 보균자인 범인이 랫가드를 넘어가지 못하고 물에 빠져버린다는 것은 절묘한 은유라 생각됩니다. 범인은 수중에 떨어졌고, 형사적인 관점으로도 방역의 관점으로도 문제가 이제 수중에 떨어진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조사해보니 우리나라에는 페스트가 발병한 적인 단 한번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소문만 듣고도 페스트하면 ‘호환’이나 ‘마마’만큼이나 무서운 병으로 골수에 사무친 듯 합니다. 그 연유를 찾아보니 1911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1911년에 북만주에서 페스트가 유행하자, 한반도를 지배하던 일제는 이 땅에 페스트가 유입될까 신경을 곤두세웁니다. 국내로 페스트가 유입된다면 그 루트는 바로 강이나 바다입니다. 그래서 압록강, 두만강은 물론이고 중국과 접촉할 수 잇는 해상으로 검역을 강화합니다. 이 때 처음을 감시를 위한 수/해상 순찰용 경비선(警備船)을 도입 운용합니다. 이것이 수상경찰의 효시가 됩니다. 영화에서 주인공이 일하는 미국공중위생국의 시작과 비슷하지요?

마지막으로 영화에는 보너스가 하나 있습니다. , ‘재즈의 고향’인 뉴올리언즈입니다. 재즈 음악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뉴올리언즈의 선창가나 오래된 커피 창고를 구경하는 재미도 클 것이라 생각합니다. 포스터의 스타일은 매너리즘에 빠진듯하고, 색상은 낡아 서 마치 B급 저 예산 영화처럼 보이지만 볼만한 영화입니다. 아니 이 분야에 관심 있는 독자라면 꼭 보시라고 권해드리고싶은 영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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