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vember 14,2019

케추아어로 쓰여진 최초의 박사 논문

전 세계 토착어 1/3이 소멸 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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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탠퍼드대학의 레라 보로디츠키 교수는 눈을 가린 채 남서쪽을 가리키게 하는 실험을 진행한 적이 있다. 이 실험에 참가한 저명한 과학자들은 대부분 엉뚱한 방향을 가리켰다. 그런데 언제나 정확히 남서쪽을 가리키는 이가 한 명 있었다. 바로 5살짜리 호주 원주민 소녀였다.

그 소녀가 눈을 감고도 정확히 방향을 인지할 수 있었던 비결은 어릴 때부터 익힌 토착어에 있었다. 한국어 및 영어를 비롯한 대부분의 언어는 방향을 말할 때 사용자 중심이다. 예를 들면 자신이 바라보는 방향에서 왼쪽, 오른쪽, 앞, 뒤를 말하는 식이다.

그러나 호주 노스 퀸즐랜드의 구구 이미티르 원주민은 방향을 이야기할 때 절대적인 방위, 즉 동서남북을 사용한다. 이를테면 “내 왼쪽으로 움직여”라는 표현 대신 “서쪽으로 움직여”라고 말한다. 그들의 언어에는 오른쪽과 왼쪽을 표현하는 단어가 아예 없다.

마추픽추는 케추아어로서 '나이 든 봉우리'라는 뜻이다. 최근 케추아어로 쓰여진 논문이 페루의 산마르코스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통과했다.

마추픽추는 케추아어로서 ‘나이 든 봉우리’라는 뜻이다. 최근 케추아어로 쓰인 논문이 페루의 산마르코스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통과했다. © Image by Felipe Lopez from Pixabay

그들은 어릴 때부터 머릿속에 나침반을 하나 지니게 되는 셈이다. 이처럼 절대적 방위를 가진 언어를 사용하는 이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비해 뛰어난 공간지각능력과 항해능력을 가진다는 연구결과가 있다.

언어의 차이는 그 사람의 기억력에도 영향을 미친다. 러시아에서 태어나 미국으로 귀화한 뒤 ‘롤리타’ 등의 뛰어난 작품을 발표한 소설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는 러시아어, 영어, 불어를 완벽하게 구사한다.

그가 회고록을 영어로 출판했을 때 출판사에서는 그에게 러시아판의 번역도 요청했다. 그런데 러시아어로 자신의 회고록을 번역하는 동안 나보코프는 영어를 사용할 때 기억나지 않았던 과거가 기억나기 시작했다. 결국 그는 러시아어로 새로운 회고록을 썼고, 그 회고록이 다시 영어로 번역됐다. 이처럼 언어는 상당히 미묘하게 우리의 생각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언어의 차이가 기억력에 영향 미쳐

지난 2017년 지구 관측 역사상 최초로 발견된 성간 천체 ‘오무아무아(Oumuamua)’는 ‘먼 과거에서 온 전달자’라는 뜻의 하와이 토착민의 언어다. 페루의 대표적인 유적지 ‘마추픽추’는 잉카 문명권에서 쓰이던 ‘케추아어’라는 토착어로서 ‘나이 든 봉우리’라는 뜻이다.

케추아어는 안데스산맥 일대에 사는 사람들 800만 명이 여전히 사용하고 있는 언어다. 하지만 말을 적을 문자가 따로 없어 스페인어 알파벳으로 표기된다. 스페인이 잉카제국을 정복한 이후 많은 선교사와 가톨릭교회 신도들은 원주민에게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케추아어를 배웠다. 중남미 지역에는 현재 600개가량의 다양한 토착어들이 남아 있다.

그런데 최근 페루 리마에 있는 산마르코스대학에서 케추아어로 쓰인 시를 주제로 한 논문이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 논문은 케추아어로 쓰여 더욱 화제가 됐다. 468년 전에 개교해 남미에서 가장 오래된 산마르코스대학에서도 아메리카 대륙에 원래 살던 원주민들이 쓰던 언어로 논문이 발표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쿠스코의 아코마요 지역에서 출생해 성장한 록사나 키스페 콜란테스(Roxana Quispe Collantes)라는 학생이 쓴 이 논문의 제목은 ‘야와르 빠라’, 즉 ‘붉은빛의 비’라는 뜻이다. 이 논문에는 케추아어로 시를 쓴 시인의 작품 및 안데스 지방의 전통, 스페인 침략자들이 전파한 가톨릭의 상호작용에 관한 연구가 담겨 있다.

그녀가 이 논문을 굳이 케추아어로 작성한 까닭은 자신의 연구가 케추아어의 역량을 다시 평가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는 심정에서였다고 한다. 케추아어로도 학술적인 용어를 얼마든지 찾을 수 있고, 논문에 어울리는 문장을 쓸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2주마다 한 개의 언어가 사라져

소수 민족의 토착어들이 사라지는 이유는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토착어를 쓰면 놀림과 차별을 받으므로 자녀에게 가르치지 않는 부모들도 많다. 신문물이나 첨단기술을 표현할 단어가 없다는 점도 토착어가 지닌 큰 단점 중 하나다.

올해는 유엔(UN‧국제연합)이 정한 ‘세계 토착어의 해’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언어는 약 7000여 개에 달하는데, 유엔은 그중 1/3에 해당하는 2680개의 토착어가 사라질 위험에 처해 있다고 경고했다.

2680개 중에는 페루에 있는 21개의 토착어도 포함됐다. 이에 따라 페루 정부는 토착어의 사용을 장려하는 캠페인까지 벌이고 있다. 토착어로 된 이름을 짓도록 권장하는가 하면 2016년에는 공영방송에서 최초로 케추아어를 사용해 뉴스를 진행하기도 했다.

하지만 토착어는 너무 빠른 속도로 사라지고 있다. 한 조사에 의하면 2주마다 한 개의 언어가 사라지고 있다고 한다. 해마다 지구촌의 주요 현안을 주제로 한 ‘세계년’을 제정해 인류 공동의 노력을 호소하는 유엔이 올해를 세계 토착어의 해로 정한 이유이기도 하다.

하나의 토착어가 없어지면 사라지는 것은 언어만이 아니다. 그 속에 담긴 고유한 문화와 역사, 관습, 전통, 기억, 사고방식, 세계관까지 함께 사라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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