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칼럼

침팬지의 우정도 신뢰에 기초한다

[일러스트가 있는 과학에세이] 일러스트가 있는 과학에세이 154

새해 들어 내일모레면 쉰을 바라보게 된 필자는 문득 그 동안 살아오며 ‘확보한’ 친구가 몇 명이나 되나 꼽아봤다. 물론 SNS에서 친구를 하는 그런 친구 말고 ‘좁은 의미의’ 친구다. 씁쓸하게도 허심탄회하게 속 얘기를 할 수 있는, 즉 나의 단점이나 비밀까지도 믿고 말할 수 있는 친구를 세는데 열 손가락이 다 필요하지 않았다.

약간 삭막하게 경제학의 관점에서 믿음, 즉 신뢰를 정의하면 이렇다. 어떤 사람 A가 다른 사람 B를 신뢰한다는 건 어떤 법적인 보증 없이도 자신의 자산을 B의 처분에 자발적으로 맡길 수 있는 상태다. 상처를 해 홀로 아이를 키우던 남자가 죽을병에 걸려 친구에게 자식을 부탁하며 전 재산을 넘기고 세상을 떠났는데 친구가 돈만 챙기고 아이를 보육원에 넘기는 스토리의 드라마를 보는 시청자는 “저건 친구도 아냐”라고 분노하기 마련이다.

침팬지 사이의 우정과 신뢰가 서로 관련돼 있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왼쪽 침팬지는 안전하게 작은 먹이통에 달린 줄을 당길 지 상대를 믿고 큰 먹이통에 도르래로 연결된 줄을 당길지 결정해야 한다. 큰 먹이통은 오른쪽 침팬지에게로 가고 절반의 먹이만 먹을 수 있는 침팬지는 줄을 당겨 나머지가 담겨 있는 통을 왼쪽 침팬지쪽으로 가게 할 수 있다. 실험결과 평소 친한 사이일수록 큰 먹이통을 당기는 비율이 높았다.  ⓒ ‘커런트 바이올로지’

침팬지 사이의 우정과 신뢰가 서로 관련돼 있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왼쪽 침팬지는 안전하게 작은 먹이통에 달린 줄을 당길 지 상대를 믿고 큰 먹이통에 도르래로 연결된 줄을 당길지 결정해야 한다. 큰 먹이통은 오른쪽 침팬지에게로 가고 절반의 먹이만 먹을 수 있는 침팬지는 줄을 당겨 나머지가 담겨 있는 통을 왼쪽 침팬지쪽으로 가게 할 수 있다. 실험결과 평소 친한 사이일수록 큰 먹이통을 당기는 비율이 높았다. ⓒ ‘커런트 바이올로지’

확실한 불신과 불확실한 신뢰 사이에서

그렇다면 신뢰에 기초한 우정은 사람처럼 고도의 지능을 지닌 존재만의 특징일까. 독일 막스플랑크진화인류학연구소의 연구자들은 침팬지를 대상으로 이 질문에 답하는 실험을 해 그 결과를 학술지 ‘커런트 바이올로지’ 1월 25일자에 실을 예정이다(논문은 1월 14일 미리 공개). 답이 궁금한 독자를 위해 미리 알려주면 침팬지 역시 우정은 신뢰에 기초한다. 어찌 보면 당연한 얘기같지만 말 못하는 동물을 대상으로 이를 입증하기는 쉽지 않다.

연구자들은 케냐 스위트워터스 침팬지보호구역에 사는 침팬지 열다섯 마리를 대상으로 5개월 동안 행동을 관찰해 각 침팬지의 친구와 비친구(non-friend)를 선정했다. 즉 털을 골라주는 시간, 그 밖의 신체접촉을 하는 시간, 팔을 뻗으면 닿을 거리에 있는 시간, 함께 먹이를 먹는 시간 등을 합쳐 지수화해 그 값이 가장 높은 개체를 친구, 가장 낮은 개체를 비친구로 정했다.

그리고 침팬지의 우정이 신뢰에 기초하는지 여부를 판단하기 위해 교묘한 실험장치를 고안했다. 즉 침팬지 두 마리는 서로 격리돼 있고(왼쪽 침팬지가 실험대상이고 오른쪽 침팬지가 그 상대다) 둘 사이에 먹이통이 이동할 수 있는 판이 가로놓여있다. 그런데 여기에 침팬지를 곤혹스럽게 하는 장치가 있다. 왼쪽 침팬지가 작은 먹이통에 연결된 줄을 당기면 통이 와 그 안에 들어있는 먹이(바나나 두 조각)를 먹을 수 있지만, 그 순간 이를 지켜보던 사람(연구원)이 큰 먹이통에 연결된 줄을 손이 닿지 않게 치운다.

‘그러면 먼저 큰 먹이통에 연결된 줄을 당기면 되지 않나?’ 물론 그럴 수 있다(이번에는 작은 먹이통에 연결된 줄을 치운다). 다만 이 경우 먹이통이 나에게 오는 게 아니라 건너편 우리의 침팬지에게로 가게 도르래처럼 장치가 설계돼 있다. 즉 남 좋은 일만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조건이라면 침팬지들은 다 작은 먹이통에 달린 줄을 당길 것이다.

그런데 큰 먹이통은 두 칸으로 나뉘어 있고 상대 침팬지는 그 가운데 자기에게 가까운 쪽 먹이통 안의 먹이(바나나와 사과 각각 세 조각)만을 먹을 수 있다. 그리고 자기 앞에 있는 줄을 당기면 이번엔 큰 먹이통이 왼쪽 침팬지에게로 이동해(역시 도르래 원리) 그 침팬지도 바나나 세 조각과 사과 세 조각을 먹을 수 있게 된다. 결국 왼쪽 침팬지는 상대를 믿지 못하고 바나나 두 조각을 먹는데 만족할지 상대를 믿고 먼저 먹이를 건넬지를 결정해야 한다. 만일 상대가 자기 몫만 먹고 줄을 당겨주지 않으면 배신감에 치를 떨 것이다.

그런데 침팬지가 과연 이런 실험설계를 이해할 수 있을까. 여러 차례 반복학습을 통해 머리가 나쁜 수컷 한 마리를 제외하고 열네 마리가 장치의 원리를 깨우쳤다. 따라서 열네 마리를 대상으로 우정과 신뢰의 상관관계를 알아보는 실험이 진행됐다. 그 결과 친구사이일 경우 큰 먹이통에 연결된 줄을 당기는 비율이 비친구사이일 경우보다 훨씬 높았다. 즉 침팬지의 우정도 신뢰에 기초한다는 말이다.

이 결과에 대해 연구자들은 “친구 사이의 신뢰는 사람만의 특성이 아니라 우리와 가까운 영장유와 진화적 뿌리를 공유하고 있다”고 해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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