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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칼럼

전력산업 현대화에 기여한 선각자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 한만춘 /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 (47)

지난 2013년 여름, 문화재청은 근·현대 산업기술 유물 가운데 산업사적인 면에서 문화적으로 가치가 큰 18건을 문화재로 등록했다. 산업 발전의 역사성을 갖춘 유물, 사회·문화적으로 큰 의미가 있는 유물, 산업기술사 또는 과학기술사 연구 및 교육에서 가치 있는 유물 등이 선정 기준이었다.

예를 들면 국내 최초의 흑백 텔레비전인 금성 VD-191, 후륜 구동 승용차로서 우리나라 최초의 양산형 고유 모델인 현대자동차의 포니, 우리나라 최초의 상용화된 반도체인 삼성 64K DRAM 등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그중에는 일반인에겐 좀 생소한 아날로그 컴퓨터도 포함되어 있었다.

한만춘 박사가 1961년에 제작한 ‘연세 1010 아날로그 전자계산기’가 바로 그것. 문화재청 등록문화재 제557호로 지정된 이 전자계산기는 진공관식 전자장치를 사용해 고등 미적분 계산을 실시간으로 할 수 있는 기능을 갖추고 있다.

디지털 컴퓨터가 도입되기 이전인 1960~70년대 우리나라 과학기술 발전에 크게 기여했을 뿐만 아니라 제어공학 분야에서 교육과 연구에 활용되었다는 게 선정 이유였다. 또한 부품 및 시스템의 제작과정과 제작기술, 제작 후 결과 등이 논문을 통해 공표되고 전수됨으로써 컴퓨터 기술 개발의 토대를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1961년 한만춘 박사가 제작하여 문화재청 문화재로 등록된 '연세 101 아날로그 전자계산기'.

1961년 한만춘 박사가 제작하여 문화재청 문화재로 등록된 ‘연세 101 아날로그 전자계산기’. ⓒ 문화재청

이 아날로그 전자계산기를 만든 한만춘 박사는 우리나라 전기공학을 개척하고 전력산업의 근대화에 선구자적인 역할을 한 공학자다. 특히 전기제어공학이론을 원자력발전 안정성에 응용하고 전기공학 분야의 교육과 인재 양성의 초석을 이룩한 산학협동의 선구자다.

그는 1921년 6월 26일 서울시 종로구 적선동에서 부친 한기악과 모친 남희정 여사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인 한기악 선생은 상해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했으며 신간회 간사로 민족독립운동에 진력한 애국지사다. 또한 동아일보사 창간동인으로 언론계 생활을 시작해 동아일보 편집국장 및 조선일보 편집국장 등을 역임하면서 항일운동에 기여한 공로로 건국포장 및 애국장이 추서된 독립유공자이다.

공업입국에 대한 지론을 강하게 펼쳐

이런 부친 덕분에 한만춘 박사는 일제강점기 때 박해를 받으면서도 창씨개명을 거부하는 등 민족관이 투철했으며 청렴결백한 생활을 했다. 또한 자신보다는 항상 국가를 먼저 생각하는 마음가짐으로도 유명한데, 생전에 그는 자원이 풍부하지 못한 우리나라가 부강하기 위해서는 산업발전만이 마지막 열쇠라며 공업입국에 대한 지론을 강하게 펼친 것으로 전해진다.

서울 매동보통학교와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현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1943년 경성제국대학 전기공학부를 1회로 졸업했다. 졸업과 동시에 당시 한국인으로서는 드물게 조선전업주식회사(현 한국전력)에서 기획과장 및 발전과장으로 근무하면서 해방 후 북한의 갑작스런 단전 조치에 따른 우리나라의 심각한 전력난 극복에 큰 역할을 했다.

해방 후 우리나라의 낙후된 전기전자 분야에 인재 양성의 시급함을 직시하게 된 그는 1948년 27세의 젊은 나이로 모교인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전기공학과에서 조교수로 교육과 연구를 시작했다.

우리나라 전기공학을 개척한 선구자인 고 한만춘 박사. ⓒ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

우리나라 전기공학을 개척한 선구자인 고 한만춘 박사. ⓒ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

1955년부터는 연세대학교 이공대학 전기공학과 교수로 근무하면서 초대 공학부장, 이공대학장, 산업대학원장 등을 역임함으로써 오늘날의 연세대 공학 교육 기반을 갖추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또한 전문대학의 필요성을 느껴 산업대학원을 설립하고 산업대학원장으로 재직했으며, 산학협동의 실현을 위해 산업기술연구소를 설립해 초대 연구소장을 맡기도 했다. 이외에도 그는 컴퓨터센터 초대소장을 맡았는데, 이것은 오늘의 연세전산원의 모태가 되었다.

연세대학교에 근무하던 시절, 그는 우리나라 전력계통의 확충과 1973년부터 시작된 우리나라 농촌 및 가정의 전력 보급에 전환점이 되었던 220/380V의 배전전압승압의 이론적 근거를 제시하기도 했다.

그는 원자력발전제어의 안정성 문제를 분석한 획기적인 연구에서도 큰 업적을 남겼다. 1958년부터 1960년까지 우리나라 최초의 원자력 국비 해외파견으로 영국 노팅검대학교에 유학하여 원자로 제어분야에서 공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는데, 이는 우리나라 전기 및 제어공학 분야에서 최초의 공학박사로 알려져 있다.

공학 교육과 연구에 기여

귀국한 후에도 그는 국내에서 이 분야의 연구를 지속하여 ‘원자로 동특성에 관한 고찰’을 대한전기학회 논문지를 통해 게재하는 것을 시작으로 연구결과를 계속 동 논문지에 발표했다. 그가 ‘연세 101 아날로그 전자계산기’의 시험 제작을 수년에 걸쳐서 완성할 수 있었던 것도 정부의 원자력 관련 연구비 지원 덕분이었다.

전기전자공학 분야에서 우리말로 된 대학 교재를 처음 출간한 것도 바로 한만춘 박사였다. 해방 이후 대학 현장에서 주로 사용되던 교재는 일본과 미국 등의 것이었으며, 우리말로 출판된 교재는 전무했다.

그런데 한 박사는 1960년 ‘교류회로’라는 책을 번역 출판함으로써 우리나라 말로 된 교재를 처음 대할 수 있게 했으며, 그 후에도 ‘배전공학’, ‘송전공학’, ‘발전공학’, ‘자동제어이론’, ‘전기통론연습’ 등의 저서를 출간하여 후학들의 학문 탐구에 큰 도움을 주었다.

그는 산학협동에도 앞장서 학계 및 관계, 산업계 등 다양한 분야에서 사회에 봉사하고 기여한 공로가 크다. 국무총리실 평가교수로서 에너지와 전력 정책에 관해 자문한 것은 물론 동력자원부의 정책자문위원, 공업진흥청 표준심의회의 전기부회 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또한 국제전기기술위원회 및 기능올림픽에 한국 대표로 활동하면서 우리나라의 과학기술 위상을 높이는 데 크게 기여했다. 대한전기학회에서는 총무이사, 부회장, 회장 등을 두루 역임하면서 학술단체로서의 확고한 위치와 기틀을 마련하는 데 큰 역할을 했으며,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부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1984년 8월 5일 사망한 이후 그를 기리는 후학들이 ‘춘강 한만춘 교수 기념사업회’를 조직하여 매년 ‘춘강학술상’을 시상하고 있다. 전기 및 전자공학 분야에서 연구업적을 인정받아 학문발전에 이바지한 논문을 선정하는 이 상은 그의 탄생일인 6월 26일 즈음에 맞춰 시상한다. 1986년 제1회 시상식을 가진 이후 매년 우수한 논문을 발표한 젊은 전기공학도를 격려함으로써 전기공학계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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