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une 26,2019

인간은 왜 부끄러움을 느낄까

부끄러움의 과학, 부족 생존 위해 발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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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왕자의 이웃별에는 술주정뱅이가 살고 있었다. 어린 왕자가 왜 술을 마시냐고 묻자 그는 ‘잊기 위해서’라고 대답한다. 무엇을 잊기 위해서라고 다시 묻자 ‘부끄러움을 잊기 위해서지’라며 머리를 숙인다.

어린 왕자가 다시 물었다. “뭐가 부끄럽다는 거지요?” 그러자 술주정뱅이는 “술을 마시는 게 부끄러워!”라고 말하고 침묵을 지킨다. 생텍쥐페리의 동화 ‘어린 왕자’에 나오는 내용처럼 실제 연구에서도 부끄러움 때문에 술을 더 많이 마시게 된다는 사실이 밝혀진 바 있다.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대학 연구팀이 알코올 중독을 치료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연구한 결과, 자신의 취중 행동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끼는 이들일수록 금주에 실패하고 술을 다시 마시는 경우가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부끄러움은 우리가 작은 단위의 부족으로 살았을 때 사회적 결속력을 증진시키기 위해 뿌리내린 감정이다. ⓒ Public Domain

부끄러움은 우리가 작은 단위의 부족으로 살았을 때 사회적 결속력을 증진시키기 위해 뿌리내린 감정이다. ⓒ Public Domain

또한 부끄러움이 많은 사람일수록 행자이어티에 시달릴 가능성도 더 크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행자이어티(Hangxiety)란 숙취를 뜻하는 ‘Hangover’와 불안이라는 뜻의 ‘Anxiety’의 합성어로, 숙취로 야기되는 심리적 불안감을 의미한다.

영국 엑시터대학 연구진은 수줍음을 타는 정도가 다양한 97명의 피험자를 대상으로 친구들과의 모임에서 술을 마시기 전과 후의 행자이어티 수준을 측정했다. 그 결과 수줍음이 많은 피험자는 다음날 행자이어티 정도가 큰 것으로 드러났다.

부끄러움의 폐해는 술에서만 나타나는 게 아니다. 부끄러움이나 수치심 같은 감정은 긍정적인 의미보다 부정적인 감정으로 치부된다. 특히 요즘 같은 사회에서는 부끄러움을 잘 타지 않는 외향적인 성격이 대우받고 있다. 따라서 부끄러움을 잘 타는 내성적인 성격은 고쳐야 할 단점으로 인식되기도 한다.

부족 이익과 위반될 때 부끄러움 느끼도록 진화

그럼 왜 인간은 동물과 달리 이처럼 부정적인 의미의 감정을 진화시켜 왔을까. 거기엔 이유가 있다. 우리가 작은 단위의 부족으로 살았을 때 부끄러움은 사회적 결속력을 증진시키는 데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캐나다 몬트리올대학 연구진은 수치심의 발달 근거를 알아보기 위해 시베리아, 모리셔스 등 전 세계의 서로 다른 지역 15곳에 사는 사람 899명을 대상으로 조사를 진행했다. 그들과 동일한 성별을 지닌 가상의 인물들이 처한 여러 가지 상황을 제시하고 그 상황들이 부끄러운지의 여부도 체크한 것.

그 결과 가상의 인물들이 처한 상황들에 대한 부끄러움의 여부에 대해 실험 참가자들의 전반적인 답변 패턴은 일치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부끄러움이 각각의 문화에 의해 생성되었다기보다는 진화적 측면의 자연선택에 의해 뿌리내린 감정이라는 걸 암시한다.

규칙을 어긴 부족 구성원들은 외면당하고 수치스러워야 했다. 그 고통스러운 경험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구성원들은 규칙을 잘 따르고 부족의 이익을 위해 함께 일할 수밖에 없었다. 즉, 다른 구성원들과의 대립되는 행동은 집단의 생존에 위협이 되므로, 그것을 위반할 때 부끄러움과 수치심을 느끼도록 진화했다는 설명이다.

연구진은 이와 관련해 부끄러움의 기능을 통증과 비유해 설명했다. 통증의 기능이 신체 조직의 손상을 막는 데 있는 것처럼 부끄러움도 사회적 관계를 해치는 상황을 방지하거나 그 관계를 회복하도록 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이 연구결과는 지난해 9월 미국 국립과학원 회보(PNAS)에 게재됐다.

부끄러움을 잘 타는 내성적인 사람은 말수가 적어서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들어주는 데 능하다. 또한 신중한 태도 덕분에 의사 결정 과정에서 신뢰를 얻기도 한다. 때문에 성공한 CEO나 리더 중에는 외향적 사람보다 오히려 내성적인 성격을 지닌 이들이 많다.

미국 일간지 ‘USA 투데이’가 미국 내 주요 기업의 CEO를 대상으로 성격을 조사한 결과 내성적이라고 대답한 이들이 40%나 된 것. 빌 게이츠와 워런 버핏 등이 대표적이다. 또한 에이브러햄 링컨 및 버락 오바마 등 전 미국 대통령도 내성적인 성격으로 유명했다.

생산적 부끄러움은 자아 성장에 필요해

부끄러움과 비슷하게 부정적인 감정으로 평가받는 어색함도 우리 삶에서 늘 함께하는 감정이다. 하지만 어색함 역시 인간이 타인과의 관계를 유지하는 데 꼭 필요한 감정이다. 자신이 어색해 한다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 자체가 상대방에게 호의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음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또한 약간의 어색함은 그 사람이 덜 완벽하게 보이도록 해 그의 인간적인 모습을 부각시킴으로써 더 어울리기 쉬운 사람으로 만들기도 한다. 실제로 한 연구에서 자신의 말실수를 후회할 때 사람들은 그를 더 신뢰하거나 관대해지는 것으로 밝혀졌다.

마찬가지로 부끄러움이나 수치심은 대인관계를 지속하는 데 건설적인 역할을 한다. 이 같은 감정은 우리가 자신에 대해 가지고 있는 합리적인 기대를 실망시켰거나 스스로 선택한 가치를 위반했다는 것을 알려주는 표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부끄러움은 우리가 성장하고 더 나은 사람이 되는 데 도움이 된다. 다만, 어린 시절에 겪은 심리적 상처나 성적 학대처럼 마음 속에 자리 잡은 수치심의 경우 반드시 치유해야 하지만 말이다.

그러나 자신의 성장에 도움이 되는 생산적인 부끄러움은 때때로 우리가 항상 주의를 기울이고 더 열심히 일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만약 자신이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성향이라면 그것을 인정하고 이런 성격의 긍정적인 특성을 부각시키면 된다. 그러면 굳이 ‘어린 왕자’ 속의 술주정뱅이처럼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해 술에 더 취할 일도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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