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ctober 16,2019

유전자공학의 주춧돌을 놓은 장본인

노벨상 오디세이 (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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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스탠퍼드대학은 1950년대 말에 학교 발전을 위해 의과학 분야의 부흥이라는 큰 그림을 그렸다. 우선 샌프란시스코에 있던 의과대학을 본교가 있는 팔로알토 캠퍼스로 이전시킨 후 의과대학 생화학과의 학과장으로 아서 콘버그를 초빙했다.

당시 워싱턴대학 미생물학 학과장이던 아서 콘버그는 흔히 말하는 ‘스타 과학자’였다. 스탠퍼드대학으로부터 강력한 권한을 위임받은 그는 자신이 직접 교수진을 스카우트해 생화학과를 창시하면서 새로운 학문 시스템을 도입했다.

즉, 모든 장비와 시약을 자유롭게 이용하게 하고 프로젝트마저 공유하게 한 것. 심지어 각자 수주한 연구비도 모두 통괄하여 운영했다. 일종의 커뮤니티 공동체처럼 운영된 스탠퍼드의 생화학과는 이 같은 자유로운 정보 교환 및 공유 시스템에 힘입어 이후 DNA 연구의 메카로 발전했다.

DNA 중합효소를 발견해 1959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한 아서 콘버그. ⓒ NIH History Office

DNA 중합 효소를 발견해 1959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한 아서 콘버그. ⓒ NIH History Office

아서 콘버그는 1918년 3월 3일 뉴욕 브루클린에서 3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오스트리아에서 미국으로 이민 온 그의 부친은 옷을 만드는 재단사였다. 아서 콘버그 역시 어릴 때부터 대학에 다닐 때까지 아버지를 도와 옷 가게 일을 돕곤 했다.

공부에 남다른 소질을 보인 그는 15세 때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19살이 되던 해 뉴욕대학의 생화학과에서 학사학위를 받았다. 1941년에는 로체스터대학에서 의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1년간 스트론병원 내과에서 인턴으로 근무하다가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미국 연안 경비대 중위로 임명됐다.

효소학에 매료돼 DNA 연구에 주력

그런데 그의 의과대학 시절 논문을 눈여겨본 국립보건원(NIH)의 이사 로버트 디어에 의해 발탁돼 1942년부터 3년간 NIH의 영양 부문 연구를 맡았다. 당시 그가 담당한 일은 새로운 비타민을 발견하기 위해 쥐들에게 전문적인 식단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그러다 1946년에 뉴욕대학 약리학 교수 세베로 오초아의 연구실로 옮긴 후 콘버그는 효소에 매료되었다. 이후 워싱턴 의대 칼 코리 교수에게 효소학을 공부하면서 그는 자신의 연구 분야를 DNA로 정하게 됐다.

콘버그는 1953년 워싱턴 의대의 미생물학과 교수로 부임한 이후 DNA의 생물학적 합성 기전에 관한 연구에 매진했다. 세포핵에 다량으로 존재하는 산성물질인 핵산은 당 부분이 디옥시리보오스인 DNA(디옥시리보핵산)와 리보오스인 RNA(리보핵산)로 크게 구별된다.

콘버그에게 효소의 매력을 알게 해준 세베로 오초아는 초산 박테리아 배양액으로부터 얻은 순도 높은 추출물로 연구하다 RNA를 합성하는 데 성공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RNA는 자연적으로 생성된 핵산과 동일하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세베로 오초아와 따로 연구를 하던 아서 콘버그는 1956년에 대장균의 배양액에서 또 다른 핵산인 DNA를 합성하는 효소를 발견했다. 그는 그 효소에 DNA 중합효소라는 이름을 붙였다. 기다란 DNA 사슬을 엮는 일꾼 노릇을 하기 때문이었다.

콘버그와 오초아는 나란히 DNA와 RNA라는 생명의 기본을 이루는 두 가지 물질의 합성에 성공한 것이다. 이로써 모든 생체에서 DNA와 RNA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도 알게 됐다. 이 같은 업적을 인정받아 콘버그는 오초아와 공동으로 1959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했다.

화학은 사투리 없는 우주 언어

핵산 분자가 복제되는 방식을 처음으로 알아낸 그의 발견은 현대 유전자공학의 주춧돌이 되었다. 그의 발견이 낳은 대표적인 첨단 기술 중 하나가 바로 PCR(Polymerase chain reaction, 중합효소 연쇄반응)이다. 캐리 멀리스에 의해 고안된 이 기술은 극소량의 DNA로부터 특정 부위의 DNA를 대량 생산할 수 있다.

이 PCR 기술은 사건 현장에 떨어진 피 한 방울로 범인을 검거하는 법의학이나 인류의 조상을 추적하는 고고학 등 활용 가치가 무한해 현재 모든 생명공학 연구에서 사용된다.

콘버그는 노벨상을 받은 후에도 DNA 합성과 분해에 관한 연구를 계속해 1967년에는 증식 활성이 있는 박테리오파지의 DNA 합성에 성공했다. 이 역시 바이러스 및 세포 등을 연구하는 데 매우 중요한 성과로 인정받고 있다.

화학은 여러 화합물 및 고분자 등에 의해 나타나는 다양한 특성으로 인해 흔히 ‘생명 현상의 언어’라고들 한다. DNA 복제 효소를 발견한 아서 콘버그 역시 “화학은 사투리도 없는 우주적 언어”라는 말을 남겼다.

1969년 스탠퍼드 대학에서 은퇴한 콘버그는 1991년 이후 연구의 초점을 동물의 진화에 참여했을 가능성이 있고 모든 박테리아에서 발견되는 인산염의 중합체로 바꾸었다. 그는 스트레스 및 긴장감에 대한 반응과 몇몇 주요 병원균의 활동 요인을 포함한 다양한 기능들을 발견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2006년에는 그의 아들인 로저 콘버그가 생명체 유전정보가 세포 내 유전자(DNA)에서 유전정보 전달물질(RNA)로 전달되는 과정을 규명한 공로로 노벨 화학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올렸다. 부자(父子)가 모두 노벨상을 수상한 것은 노벨상 사상 이것이 여섯 번째다.

바로 그 다음 해인 2007년 10월 27일 아서 콘버그는 호흡기 장애로 인해 89세를 일기로 조용히 눈을 감았다. 콘버그의 사망 소식을 접한 스탠퍼드대학은 “미국 의학사에서 가장 뛰어난 과학자 중 한 명인 그의 업적은 미래 세대에서도 꾸준하게 기억될 것”이라며 추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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