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칼럼

유명 과학자들의 로맨스

[과학기술 넘나들기] 과학기술 넘나들기(41)

근래 우리 사회에서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얘기가 상당히 유행한 바 있다. 사자성어(?)식으로 내로남불이라는 약어로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는데, 물론 원래의 뜻보다는 사회적 풍자의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저명 과학자들 역시 인간인 이상 개인적 사생활에서 로맨스 등이 없지 않았고, 그로 인하여 사람들의 구설수에 오른 적도 있다. 지극히 사적인 영역을 굳이 논하는 것이 적절치 않아 보일수도 있겠지만, 단순한 가십거리나 호사가적 취미 차원이 아니라 과학사에서 나름의 상당한 의미를 지니는 경우들을 살펴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듯싶다.

여성과학자들의 영원한 롤모델로 꼽히는 마리 퀴리(Marie Curie; 1867-1934), 즉 퀴리부인 역시 결혼 전후 로맨스가 있었다. 폴란드 태생으로 어릴 적에는 마냐 스클로도브스카(Manya Sklodowska)로 불렸던 그녀가, 가난한 집안사정으로 인하여 프랑스 유학 시절에 가정교사를 하면서 학비와 생활비를 벌었다는 얘기는 위인전 등에서 빠짐없이 나오는 대목이다.

그녀는 자신 뿐 아니라 의대에 진학했던 언니를 위해서도 힘든 가정교사 생활을 지속했는데, 자신이 일했던 돈 많은 집의 큰아들과 첫사랑에 빠진 적이 있었다. 그러나 남자의 부모는 폴란드 출신의 가난한 여자와의 결혼을 완강히 반대하였고, 결국 두 사람은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 훗날 마리는 자신에게 아픔을 안겨주었던 첫사랑에 대해서, “만약 그때 부잣집 아들과 결혼했더라면 라듐은 발견되지 못했을 것”이라고 회상한 바 있다.

언니가 의대를 졸업한 후에야 파리 소르본 대학 이학부에 입학한 마리는, 그곳에서 8살 연상의 노총각 과학자였던 피에르 퀴리를 만나 결혼하여 모범적인 부부과학자의 길을 걸었다. 그러나 부부가 함께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지 3년 후인 1906년, 남편인 피에르 퀴리가 갑작스러운 마차 사고로 불행히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홀몸이 된 퀴리부인은 남편의 제자였던 5살 연하의 물리학자 랑주뱅(Paul Langevin)과 위험한 사랑에 빠졌다는 소문이 퍼졌는데, 랑주뱅은 유부남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문제가 되었고 상당한 구설수에 올랐다. 마침 1911년 그녀의 두 번째 노벨상인 노벨화학상 수상을 앞두고 언론 등의 많은 비판을 받았는데, 노벨상 수상을 스스로 포기하라는 강요도 많았다.

그러나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 1879-1955)은 퀴리부인에게 당당하게 노벨상을 받으라는 격려를 했고, 퀴리부인은 “노벨상은 사생활에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라면서 거리낌 없이 노벨상을 받았다고 한다. 아인슈타인 역시 바람기가 상당했던 과학자로서 동병상련(?)을 느끼고 퀴리부인에게 그런 조언을 하지 않았을까 싶다.

언니와 함께 한 젊은 시절의 마리(왼쪽 1886년) ⓒ Free photo

언니와 함께 한 젊은 시절의 마리(왼쪽 1886년) ⓒ Free photo

과학의 발전에 적지 않은 힘이 되었지만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여성으로서, 에밀리 뒤 샤틀레(Émilie du Châtelet; 1706-1749), 즉 샤틀레부인이 있다. 그녀는 19세 때 샤틀레후작과 결혼하여 세 아이까지 두었지만, 1733년 파리에서 철학자 볼테르(Voltaire; 1694-1778)를 만난 후 그와 연인관계로 발전하면서 자연철학에 깊이 빠져들었다.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면 불륜으로 볼 수 있겠지만, 당시에는 유럽의 귀족 부인들이 따로 애인을 여럿 두는 것이 보편적인 풍속이었으므로 그 자체로 크게 비난을 받지는 않았다고 한다. 심지어 볼테르는 그녀의 남편이었던 샤틀레후작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였다.

볼테르는 프랑스의 대표적인 계몽사상가로서, 프랑스에 뉴턴의 자연철학을 소개하여 대중화시켰으나, 당시 프랑스 사회체제에 비판적이었던 그의 사상은 당국으로부터 탄압을 받기도 하였다.

대표적인 계몽사상가였던 볼테르 ⓒ Free photo

대표적인 계몽사상가였던 볼테르 ⓒ Free photo

샤틀레부인은 고위귀족의 부인으로서 그러한 볼테르에게 방패막이가 되어주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뉴턴주의 과학자 모페르튀(Pierre-Louis Maupertuis)에게서 수학을 배워서 볼테르의 부족한 점을 보충해 주었다. 볼테르는 과학자라기보다는 작가이면서 철학자였으므로 수학에는 모르는 부분이 많았는데, 이후 그가 ‘뉴턴철학의 기초’를 저술할 때 샤틀레부인은 큰 도움을 주었다. 뿐만 아니라, 수학적으로 어렵기로 유명한 뉴턴의 대표적 저서 프린키피아(Philosophie Naturalis Principia Mathematica;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를 프랑스어로 번역하고 상세한 주석을 첨부하였다. 이 책은 당대의 프랑스 지식인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샤틀레부인은 그뿐 아니라 사설 연구소를 만들어 직접 실험과 연구를 진행했다고 전해지며, 따라서 그녀를 최초의 근대적인 여성과학자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샤틀레부인은 불운하게도 프린키피아의 번역본이 출판되기 직전에, 40이 넘은 나이로 볼테르의 아이를 출산하여 그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녀가 죽은 후에 세상은 여성이 그처럼 중요한 업적을 남긴 것을 전혀 이해하려 하지 않았고 인정하지도 않았다.

볼테르는 앞서서 그녀에게 보낸 서신에서 “당신은 아름다우니 인류의 절반은 당신의 적이 될 것이오. 당신은 영민하니 사람들이 당신을 두려워할 것이오. 당신은 남을 잘 믿으니 사람들에게 배신을 당할 것이오” 라고 그녀의 불행한 운명을 예언한 바 있다.

최초의 근대적 여류과학자라 볼 수 있는 샤틀레 후작부인. ⓒ Free photo

최초의 근대적 여류과학자라 볼 수 있는 샤틀레 후작부인. ⓒ Free pho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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